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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학교

다른 표기 언어 大成學校

요약 1908년 안창호가 설립한 중등교육기관. 평양의 김진후, 선천의 오치은, 철산의 오희원 등의 재정적 원조를 바탕으로 설립되었으며, 개교시의 입학생은 90여 명이었다. 교장에 윤치호, 대변교장에 안창호, 교무책임에 장응진, 교사에 차이석·장기영·문일평·이상재·정인목 등이 근무했다. 1909년 일본국기 불게양운동이 대성학교를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한때 폐교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안창호는 이 사건과 105인 사건 등으로 1910년 4월 중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1912년 봄 제1회 졸업생 19명만을 배출하고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당했다. 대성학교는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정주의 오산학교와 더불어 평안도 일대 애국계몽운동의 근거지로서, 초기 항일민족해방운동에 있어 커다란 역할을 담당했다.

평양의 김진후(金鎭厚), 선천의 오치은, 철산의 오희원(吳熙源) 등의 재정적 원조를 바탕으로 설립되었으며, 개교시의 입학생은 90여 명이었다. 교장에 윤치호(尹致昊), 대변교장에 안창호, 교무책임에 장응진, 교사에 차이석·장기영·문일평(文一平)·이상재(李相在)·정인목(鄭仁穆) 등이 근무했다.

인재양성을 통한 교육구국의 이념 아래 교육방침을 ① 건전한 인격의 함양, ② 애국정신이 투철한 민족운동가의 양성, ③ 실력을 구비한 인재의 양성, ④ 건강한 체력의 훈련 등에 두었다. 이런 교육방침은 당시 군사관 정인목을 체육교사로 초빙, 체육시간에 군사교육을 실시한 데에서도 엿볼 수 있다.

1910년에는 교사들의 재교육을 위해서 장응진을 소장으로 한 하기사범강습소를 부설하기도 했다. 1909년 일본국기 불게양운동이 대성학교를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한때 폐교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안창호는 이 사건과 105인 사건 등으로 1910년 4월 중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1912년 봄 제1회 졸업생 19명만을 배출하고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당했다. 대성학교는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정주의 오산학교와 더불어 평안도 일대 애국계몽운동의 근거지로서, 초기 항일민족해방운동에 있어 커다란 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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