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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응칠, 安重根출생 | 187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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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10년 |
구한말의 독립운동가로 삼흥학교를 세우는 등 인재 양성에 힘썼다.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사형당했다.
사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총 한 자루로 제국주의를 처단하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헤이룽 성 하얼빈 역. 일본의 정치 거물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의 문무 관병과 악수를 나누는 찰나, 여섯 발의 총성이 울렸다. 이토는 총을 맞고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숨졌다. 총을 쏜 30대의 조선 청년은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라는 의미의 러시아 어)!”를 외쳤고,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청년은 뤼순 감옥에 144일 동안 갇혔다가 1910년 3월 26일, 서른두 살의 젊은 나이에 처형되었다. 그가 바로 대한의용군 참모중장인 안중근이다.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 수양산 아래 광석동에서 안태훈과 조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안자미(安子美)의 30세손이며 고려 조의 명현 안향의 26대손이다. 할아버지 안인수는 진해 현감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성균관 진사였고, 고조부 때부터 해주, 봉산, 연안 일대에 많은 전답을 지니고 있던 황해도의 부호 가문이었다. 안중근의 아버지는 일본 국비유학생 70명에 선발될 정도의 인재였으나 갑신정변이 실패하면서 수구파 정권이 개화 세력을 탄압하자 고향으로 은거했다.
안중근은 태어날 때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을 타고 태어났다며 ‘응칠(應七)’이라는 아명으로 불렸다. 어린 시절에는 할아버지에게서 한학(漢學)을 배웠지만 무술 공부에 더 열심이어서 틈만 나면 화승총을 메고 포수들을 따라 사냥을 다니곤 했다. 열여섯 살에 한 살 연상인 김홍섭의 딸 김아려와 결혼해 2남 1녀를 두었다. 그리고 바로 그해 동학혁명군 진압에 나선 아버지를 도와 선봉장이 되어 적장소를 급습하고 공을 세웠다. 그러나 아버지 안태훈이 동학당에게 노획한 1,000여 부대의 쌀을 군량미로 사용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탁지부 대신 어윤중과 전 선혜청 당상 민영준은 양곡을 상환하라는 압박을 가했다.
이 사건은 개화파 김종한의 중재로 무마되었지만 다시 민영준이 양곡 상환 문제를 들고 나오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안태훈은 명동성당으로 피신했다. 이곳에 머무는 몇 달간 그는 성서를 읽고 천주교 강론을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 사이 민영준의 일이 마무리되고 안태훈은 120권의 천주교 교리문답 서적을 가지고 청계동으로 돌아와 전교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숙부, 사촌 등 일가친척과 청계동 마을 사람 등 모두 33명이 함께 세례를 받게 했다. 이때 안중근도 세례를 받고 ‘도마(Thomas)’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안중근은 이런 과정을 통해 신학문을 접하고 가톨릭 신부에게 프랑스 어를 배웠다. 또 청계동을 사목 방문한 뮈텔(한국명 민덕효) 주교를 해주까지 수행하는 등 교회 일에 헌신하기 시작했다.
1904년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의 주권을 침탈하려는 의도를 드러내자 그는 아버지와 상의 끝에 상하이나 산둥에 국외 항일 투쟁 터전을 잡을 계획을 세웠다. 처음에는 외국의 도움을 구하여 국가의 난국을 타개하고자 했으나, 프랑스 인 르각(한국명 곽원량) 신부로부터 “국내에서 젊은이들에게 실력과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교육이 필요하다.”라는 충고를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 귀국했다.
평양에서 안중근은 한재호, 송병운 등과 함께 ‘삼합의’라는 석탄 회사를 만들었으나 수천 원의 손해만 보았다. 그는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사업을 정리한 뒤 삼흥학교를 세우고, 남포의 돈의학교를 인수해 인재 양성에 힘썼다. 하지만 1907년 7월 한일신협약까지 체결되자 나라의 앞날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고 느끼고 연해주로 가서 의병 운동에 참가했다. 그는 연해주에서 한인 사회 유력자들의 협조를 구하는 데 힘썼다. 다행히 많은 조력으로 무기와 자금을 마련했고 국외 의병 부대를 조직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1909년 김기룡, 엄인섭, 황병길 등 11명의 동지들과 단지회(斷指會, 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을 3년 이내에 암살하지 못하면 자살로 속죄할 것을 단지의 피로 맹세한 것이었다. 그러던 중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토가 러시아의 대장대신 코코프체프(V. N. Kokovsev)와 하얼빈에서 회견을 할 것이라는 신문기사를 보았다. 안중근은 우덕순(禹德淳), 조도선(曺道先), 유동하(劉東夏)와 이토의 암살을 모의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를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토는 코코프체프와 약 25분간 열차 회담을 마치고 차에서 내려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 순간 안중근이 군중 속에서 뛰어나와 권총을 발사해 이토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다이지로(森泰二郞), 만철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田中淸太郞) 등이 중상을 입었다. 그는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되어 뤼순의 일본 감옥에 수감되었다.
나라 안팎에서는 그를 구명하기 위한 변호모금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그의 변호인을 허가하지 않았고, 심지어 일본인 관선변호사 미즈노 요시타로(水野吉太郞)와 가마타 세이지(鎌田政治)의 변호조차 허가하지 않으려 했다. 안중근은 재판을 받는 내내 논리정연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미즈노는 그의 태도에 감복해 “그 범죄의 동기는 오해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토를 죽이지 않으면 조선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적성(赤誠)에서 나온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고 변론했을 정도였다.
안중근은 “3년 전부터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포살하고자 했으며, 이 의거는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조선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결행한 것이다.”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결국 사형이 언도되었고, 죽음을 앞둔 안중근은 동생인 정근(定根)과 공근(恭根)에게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하지 말라.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했다. 그는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 감옥 형장에서 순국했다.
사살된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에서 메이지 헌법(1889년)의 초안을 마련하고 양원제 의회(1890년)를 수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한제국을 강제 합병시킨 인물로 기억된다. 이토는 1905년 11월 9일 특명 전권대사로 조선에 부임하면서 온갖 협박으로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는 한편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이후 그는 일본의 침략을 미화하기 위해 순종을 앞세워 부산-대구-의주 등 전국을 순행하면서 통감부와 순종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음을 선전했다. 조선에서의 임무를 마친 이토는 대륙 진출의 길을 모색하기 위하여 중국을 방문했다. 그는 1905년 러일전쟁 최고의 격전지였던 뤼순의 203고지에 올라 대륙 진출의 열망이 담긴 시를 짓기도 했다.
오랜만에 듣는 203고지
1만 8,000명의 뼈를 묻고 있는 산
오늘 올라 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하늘을 바라보니 산머리에 흰 구름이 둘러져 있네.
때문에 안중근에 대한 평가는 일본에서는 테러리스트로, 한국에서는 독립운동을 한 의사(義士)로 극과 극을 달린다. 2010년 그의 서거 100주년을 맞이해 옥중에서 집필한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를 통해 독립운동가만으로서가 아닌 교육자로, 동양 평화를 주장한 사상가로 재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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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영역의 인물이 두루 다루어지도록 구성했다. 인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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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안중근 –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윤재운,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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