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요약 테이블
출생 1948년
사망 1970년

초등학교를 4학년에 중퇴하고, 17세 때부터 평화시장의 의류 제조 회사에서 재단사로 일했다.
동료 재단사들과 바보회를 만들어 평화시장의 노동 조건 실태를 조사하고, 이를 토대로 노동청과 서울특별시에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했지만 묵살당했다.
22세의 젊은 나이에 노동자의 근로 조건 개선을 요구하고,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한 후 분신자살했다.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전태일은 대구부 남산동(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재봉사였던 아버지 전상수는 의류업 계통의 봉제 노동자였는데 나이가 들면서 집에 재봉틀 한두 대를 들여 놓고 삯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다. 전태일이 여섯 살 때 부산에서 소규모 양복점을 하던 그의 집은 염색공장에 맡긴 원단이 장마로 상하는 바람에 파산하고 서울로 상경하게 되었다. 몇 년간의 고생 끝에 전상수는 천막집 한 채와 재봉틀 한 대를 사들여 삯바느질 일을 하게 되었고, 가세는 점점 나아졌다.

그러나 4·19혁명으로 인해 막대한 옷값을 떼먹히고 다시 빈손으로 거리에 나앉게 되면서 대구로 돌아왔다. 전태일은 학교를 중퇴하고 신문팔이, 삼발이 장사 등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떠맡았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일에 1년간 가출했다 돌아왔지만 잠시 학교 생활을 하다 재봉 일을 하라는 아버지의 말에 동생 태삼과 함께 서울로 야반도주를 감행했다. 그의 손에는 작은 이불 한 채와 아버지가 만든 어른용 모직 점퍼 8장뿐이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갈 곳을 찾지 못하고 헤매던 그는 동생 걱정 때문에 곧 다시 대구로 돌아왔다.

전태일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계속되는 술주정과 구타로 어머니가 서울로 식모살이를 떠나자 전태일도 여동생을 데리고 서울로 오게 되었다. 서울에서 그는 아버지에게 배운 재봉 기술로 청계천 평화시장의 한 의류 공장에 보조로 취업했다.

그는 하루 14시간씩 노동을 하며 일당으로 당시 차 한 잔 값이던 50원을 받았다. 다음 해 미싱사로 옮겨 재봉사로 일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어린 여공들이 적은 월급과 열악한 환경, 과중한 노동에 시달리는 것을 보며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특히 함께 일하던 한 여공이 가혹한 노동 환경으로 인한 직업병인 폐렴으로 강제 해고되자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 역시 여공을 도왔다는 이유로 해고되었다. 그는 그 후 재단사 보조로 취직했고 재단사가 다른 회사로 옮기면서 마침내 재단사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재단사가 되었어도 그의 어려운 형편은 여전했다. 1967년 3월 17일의 일기에서는 당시 노동 현실을 엿볼 수 있다. “정말 하루하루가 못 견디게 괴로움의 연속이다. 아침 8시부터 저녁 11시까지 하루 15시간을 칼질과 다리미질을 하며 지내야 하는 괴로움, 허리가 결리고 손바닥이 부르터 피가 나고, 손목과 다리가 조금도 쉬지 않고 아프니 정말 죽고 싶다. ……육체적 고통이 나에게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고통이 더욱 심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만 없어도 좋겠다. 미싱 6대에 시다가 6명, 다른 집 같으면 재단사, 보조, 시다 3명이 해야 할 일을 나 혼자 하니 정말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법인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 뒤 해설서를 구입해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면서 법에 규정되어 있는 최소한의 근로 조건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 분노를 느끼게 되었다. 전태일은 종종 어린 보조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밤늦도록 혼자서 보조가 해야 할 일을 해 주곤 했는데 이것을 여러 번 업주에게 들켜 해고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1969년 6월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운동 조직인 ‘바보회’를 창립했다. 그리고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의 내용과 현재 근로 조건의 부당성을 알리고 설문을 통해 근로 실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일은 업주들의 방해로 실패했고 전태일은 더 이상 평화시장에서 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한동안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지냈다.

1970년 9월 전태일은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평화시장 안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평화시장으로 돌아왔다. 그는 재단사로 일하며 이전의 바보회를 발전시킨 ‘삼동친목회’를 조직했다. 그는 틈나는 대로 서울시청, 노동청 등을 찾아다니며 진정서를 내고 신문기자들을 만나거나 방송국을 찾아갔다. 좀 더 자료가 많다면 방송을 고려해 보겠다는 방송국 관계자의 말에 그는 노동 실태 조사 설문지를 돌려 126장의 설문지와 90명의 서명을 받아 1970년 10월 6일 노동청장 앞으로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제출했다.

마침내 이 내용이 다음 날 석간신문인 〈경향신문〉에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이라는 표제로 사회면 톱기사로 실렸다. 전태일 등 삼동회 회원들은 본격적으로 임금, 노동시간, 노동환경의 개선과 노동조합 결성 등을 위해 사업주 대표들과 협의를 벌였다. 삼동회를 주축으로 재단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르자 사측과 정부에서는 안절부절 못했다. 업주들은 삼동회를 사회주의 조직으로 매도함으로써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그러나 당시 신민당의 김대중이 국정 전반에 걸쳐 비판의 소리를 높여가고 있던 시절이라 박정희 정권이 그 어느 때보다 사회 여론을 살피던 때였다. 만약 노동자들의 참상이 언론에 계속 보도된다면 대통령 선거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 뻔했다. 그러다 보니 이를 무마하기 위해 노동청에서는 뒤늦게 실태 조사를 하겠다며 전태일 등에게 ‘노동절에 포상하겠다’라거나 ‘모범청년’이라며 회유하려고 들었다. 결국 노동청에서 해고된 재단사들의 취직을 모두 보장하고 일주일 안에 노동 조건을 개선하겠다고 제안했다. 회원들은 모두 취직했고 전태일도 재단사 보조로 취직했다. 그러나 근로 조건은 개선되지 않았다.

전태일과 삼동회 회원들은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은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무능한 법임을 고발하는 뜻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갖기로 결의했다. 결행일은 11월 13일이었다. 그는 이때 “이번만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결단코 물러서지 말고 싸우자.”라고 힘주어 말했다.

11월 13일, 평화시장 일대는 경찰들이 삼엄하게 진을 치고 있었고 업주들은 종업원에게 “오늘 행사에 절대 가담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의를 내렸다. 삼동회 회원들은 평화시장 앞에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업주와 경찰 들이 현수막을 빼앗는 등 시위를 진압하려 하자 전태일은 온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평화시장 앞을 달렸다.

뒤늦게 도착한 기자들이 취재를 시작했다. 약 3분가량 전태일의 몸이 불탔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뜻밖의 상황에 당황해 불을 끌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 소식을 듣고 공장의 수많은 노동자들이 달려 나와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전태일은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렇다 할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자신이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이루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스물두 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전태일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지금도 노동자들의 정신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윤재운 집필자 소개

고려대 사학과와 동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한국사연구실, BK21한국학 교육연구단 국제화팀에서 연구원을 지냈으며,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연구소에서 고대사에 ..펼쳐보기

장희흥 집필자 소개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현 대구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조선 시대사, 정치사에 관심이 많으며 연구 논문으로 <조선시대 정치권력과 환관>, <소통과 교류의 땅 ..펼쳐보기

출처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 저자윤재운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한국 고대사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영역의 인물이 두루 다루어지도록 구성했다. 인물..펼쳐보기

전체목차
조선부터 대한민국까지 변방의 무장에서 새 왕조의 주인으로, 이성계 500년 조선왕조의 기반을 다지다, 정도전 태종의 치적 뒤에 자리한 장자방, 하륜 조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세종 청백리의 표상, 황희 신분의 굴레를 뛰어넘은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 왕위 찬탈자인가, 위대한 군주인가, 세조 모사가인가, 지략가인가, 한명회 단종을 향한 일편단심, 성삼문 국력을 신장시킨 외교와 국방의 달인, 신숙주 사림의 영수, 김종직 비운의 폐왕, 연산군 도학 정치를 꿈꾼 급진적 이상주의자, 조광조 조선 최초의 자연철학자, 서경덕 조선 주리철학의 선구자, 이언적 중세의 봉건적 질서에 반기를 들다, 임꺽정 동방의 주자, 이황 조선의 주자학을 일구다, 조식 동서 분당의 시대, 정인홍 어린 천재에서 희대의 정치가로, 이이 전란 속에서 나라를 구한 재상, 유성룡 한국 해전의 역사를 새로 쓰다, 이순신 조선 의학의 집대성 《동의보감》, 허준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 정여립 홍길동의 아버지, 허균 대동법을 실시한 실리적 개혁가, 김육 명분인가 실리인가, 최명길 우리말의 가락을 살려 우리 글자로 쓰다, 윤선도 유림 위에 군림한 정치 사상계의 거장, 송시열 성리학계의 이단아, 윤휴 붓으로 살려낸 만물의 조화, 정선 경세치용의 학문을 열다, 이익 당쟁 속에서 탕평을 실천한 재상, 채제공 못다 한 개혁의 꿈, 정조 정조의 남자, 홍국영 실학의 아버지, 박지원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정약용 한국화의 전통미를 일구어 낸, 김홍도 조선을 뒤흔든 농민봉기의 지도자, 홍경래 한국적 서체를 완성하다, 김정희 자주적 근대화를 주장한 개화 사상가, 박규수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 조선의 마지막 봉건주의자, 이하응 격동의 역사 속 비운의 황제, 고종 풍전등화의 조선에서 치열하게 살다 간 여걸, 명성황후 암살당한 개혁의 불꽃, 김옥균 한국 민중 저항사의 상징, 전봉준 민중 계몽으로 자주독립을 꾀하다, 서재필 청년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운, 안창호 총 한 자루로 제국주의를 처단하다, 안중근 〈님의 침묵〉, 한용운 나라는 망해도 민족은 망하지 않는다, 신채호 항일 무장 투쟁의 영웅, 김좌진 삼천 만 동포에게 고함, 김구 좌익과 우익, 한국 현대사의 갈림길에서, 여운형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 시대를 앞서 간 비운의 여인, 나혜석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받지 않는다, 박정희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전태일
전체목차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한국사

한국사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



[Daum백과] 전태일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윤재운, 청아출판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