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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55년
사망 1895년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로서 부패한 관리를 처단하고 시정개혁을 도모했다.
전라도 지방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동학의 조직 강화에 힘썼으며,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했다.

한국 민중 저항사의 상징

전봉준은 우리 역사상 최초로 일반 민중들을 역사의 주역으로 이끌어 낸 인물이다. 그는 민중이라는 아래로부터의 힘을 결집해 봉건 제도를 타파하고, 침투해 오는 일본의 자본주의적 진출을 저지하고자 했다. 그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기간은 2년 남짓에 불과하지만 그가 남긴 파장은 시대의 흐름을 변화시켰다. 그의 민중운동 정신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국민이 주권자라는 위치를 자각시키는 계기가 되고 있다. 비록 그의 정신은 일본의 군사력에 좌절되었지만 그가 이끈 동학농민혁명은 조선의 봉건 제도가 붕괴하고 있음을 만천하에 드러내 보였고 민중을 각성시킴으로써 이후의 사회변혁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전봉준은 1854년 전라도 태인군 산외면 동곡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명숙(明叔)’이었지만 키가 작고 몸집이 야무지다 하여 ‘녹두(綠豆)’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향리였던 아버지 전장혁(全彰爀)은 당시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이 모친상에 과도한 부조금을 거둬들이자 이에 저항하다가 매질을 당해 장독(杖毒)으로 죽었다. 조병갑과 전봉준의 악연은 이때부터 시작된 셈이다.

그는 작은 땅을 경작하며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았다. 한때는 지관의 일도 했다고 한다. 당시의 조선 사회는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개항 후 외세가 물밀듯이 밀려들어 왔고, 봉건 사회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각종 농민봉기들이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전봉준 역시 나라의 장래에 대해 고민했으며, 지식인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려고 했다. 그가 동학에 입교한 나이는 서른 살이 넘었을 무렵이라 추정된다.

전봉준의 고택

전라북도 정읍에 있는 전봉준의 고택. 전봉준은 전라도를 중심으로 사회 개혁의 뜻을 펼쳤으나 일본군에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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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은 당시 천주교를 의미하던 서학에 대립하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었다. 동학의 기본 이념은 인간 평등 사상에 기초한 ‘인내천(人乃天)’으로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의미이다. 그는 훗날 재판장에서 “동학은 수심(守心)하여 충효로써 근본을 삼고 보국안민(輔國安民)하려는 것이다. 동학은 수심경천(守心敬天)의 도이다.”라고 동학에 입교하게 된 동기를 밝히기도 했다. 젊었을 때부터 지역의 지도자 역할을 했던 그는 입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부 지역의 포교를 담당하는 접주(接主)로 임명되었다.

1892년 고부 군수가 된 조병갑이 과중한 세금을 거두고, 태인 군수를 지낸 아버지의 송덕비를 만든다는 구실로 강제 모금을 하려 했다. 고부 농민들은 군청으로 몰려가 어려운 사정을 호소했으나 조병갑은 요청을 듣기는커녕 이들을 가두어 버렸다. 이때 이들의 구명에 앞장선 이가 바로 전봉준이다. 그러나 탐관오리들의 악행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자 전봉준은 1893년 11월에 최경선(崔景善), 김도삼(金道三) 등 20여 명과 함께 사발통문을 작성하고 고부성 점령, 조병갑 처형, 탐관오리 처단, 전주성 점령, 서울로의 진격 등을 내용으로 하는 봉기를 계획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조병갑이 익산 군수로 이동하면서 보류되었다. 전봉준은 고부 고을 농민 60여 명과 함께 전주의 감영에 가서 감사 김문현(金文鉉)에게 고부의 폐정을 시정해 달라고 등소(等訴, 여러 사람의 이름으로 올리는 조선 시대의 청원서)했으나, 모두 쫓겨나고 말았다. 그런데 이듬해 1월 익산 군수로 이동했던 조병갑이 다시 고부 군수로 오게 되었다. 고부 농민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갑오년인 1894년 2월, 봉기를 시작했다.

전봉준은 최경선, 김도삼, 정익서(鄭益西)와 함께 1,000여 명의 농민을 이끌고 고부 군청을 습격했다. 창고의 곡식을 풀어 농민에게 나누어 주고 무기고에서 무기를 빼앗아 탐관오리의 부정부패 개선을 요구하는 농성을 시작했다. 조정에서는 고부 농민봉기 발생의 책임을 물어 조병갑을 체포하고, 용안 현감 박원명(朴源明)을 고부 군수로, 장흥 부사 이용태(李容泰)를 고부군 안핵사로 임명했다. 박원명은 부임 후 난민들을 회유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진 해산했으나 이용태가 강제로 난민을 완전히 해산시키자 상황은 다시 악화되었다. 전봉준은 본격적인 무력 항쟁에 나서게 되었다.

전봉준은 고부군 백산면에 진을 치고 주변 지역의 접주들에게 통문을 보내 궐기를 권했고, 각지의 농민 수천 명이 이에 호응해 그의 진영으로 몰려들었다. 그는 농민들을 군사 조직으로 편성하고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전봉준 부대는 금구, 부안까지 진격했고, 곧 호남 일대가 농민 봉기군에게 점령되었다. 농민군은 백산에서 농민대회를 열고 제세안민(濟世安民), 축멸왜이(逐滅倭夷), 진멸권귀(盡滅權貴) 등의 강령을 발표했다. 대장 전봉준, 총관령 손화중, 김개남, 총참모 김덕명, 오시영, 영솔장 최경선 등이었다.

농민군은 전라감영군 1,600여 명을 황토현으로 유인해 격파하고 그날로 정읍을 장악했다. 다음 날 흥덕과 고창을 점령한 후 4월 27일에는 전주에 입성했다. 농민군이 이렇게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이유로는 정부군보다 지형을 잘 알고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는 점, 지역 민중들에게서 절대적인 지원을 받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전주성 함락에 놀란 조정에서는 4월 28일 청나라에 병력을 요청했다. 5월 5일 청나라 군사 3,000여 명이 아산에 상륙했다. 이에 한반도에서 세력을 확장하려던 일본은 톈진 조약의 규정에 따라 다음 날 바로 약 4,000여 명의 군대를 인천에 상륙시켰다. 갑자기 조선이 국제 분쟁의 무대가 된 것을 깨달은 농민군은 외국의 군대를 끌어들인 조정에 분노했지만 당면한 문제들 때문에 정부군과 타협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교섭 끝에 정부는 농민군의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자진 해산을 유도했다. 이 〈폐정개혁안〉은 탐관오리의 처벌과 축출, 보부상의 폐단 철폐, 간신 축출 등 보편적이고 제도적인 차원에서 여러 가지 폐정을 시정하려는 것이었다.

그 후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물러나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무장과 조직은 그대로 유지했다. 전봉준은 개혁안이 시행되지 않으면 농민군의 무장과 조직을 풀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당시의 조정은 폐정 개혁을 단행할 의지도, 능력도 갖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자 농민군은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농민들의 억울한 일을 해결하는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에 김학진은 농민군의 집강소를 사실상 인정하고 기존 감사-수령의 행정 질서와의 공존을 제의했다. 전봉준과 김개남은 집강소 질서를 체계화하기 위해 6월 15일경 남원에서 농민군대회를 열고, 각 고을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농민군 중에서 집강을 뽑아 수령의 일을 행하도록 했다. 이에 나주를 제외한 전라도의 52개 고을에 집강소가 설치되고 본격적으로 활동이 시작되었다.

한편 청군이 조선에 주둔하면 일본은 자신들의 이익이 잠식될 것을 우려하여 톈진 조약을 빌미로 군함과 병력을 파견했다. 그리고 “내란이 종결되었으니 공동으로 철병하자.”라는 청나라의 제안에도 이를 따르지 않았다. 급기야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는 1894년 7월, 군대를 끌고 궁궐에 들어가 고종을 위협해 내정개혁을 추진한다는 명분으로 친일내각을 구성하고 대원군을 섭정에 앉혔다. 이후 발발한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청나라 세력이 물러가자 보국안민의 기치를 내걸었던 전봉준은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우금치 동학비

우금치에서 퇴각한 동학군은 패퇴를 거듭했다. 동학군의 넋을 기리기 위해 전라도 장흥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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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논산에서 농민군을 모집해 2만여 명의 병력을 확보하고, 10월 24일 공주로 진격했다. 전봉준은 이 궐기가 항일 구국항쟁 차원이지 정부와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했으나 정부는 호위부장 신정희를 순무사로 임명해 동학군을 토벌할 것을 지시했다.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도 이용가치가 떨어진 동학군을 이번 기회에 완전히 소탕하고자 본국에 추가 파병을 요청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동학군은 11월 10일까지 약 2,500명의 정부군 및 약 200명의 일본군과 두 차례에 걸쳐 처절한 전투를 치렀으나 연이어 패함으로써 제2차 동학농민혁명은 좌절로 끝나고 말았다.

전봉준은 12월 2일 순창군 피노리에서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넘겨진 후 서울로 압송되었다. 1895년 2월 9일부터 3월 10일까지 형식적인 재판을 받은 후 사형을 언도받았고, 3월 30일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한(成斗漢)과 함께 처형되었다. 당시 전봉준의 나이는 42세였다. 그는 “나라를 걱정하는 단심(丹心)을 누가 알 것인가!”라면서 자신의 피를 종로 거리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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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운 집필자 소개

고려대 사학과와 동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한국사연구실, BK21한국학 교육연구단 국제화팀에서 연구원을 지냈으며,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연구소에서 고대사에 ..펼쳐보기

장희흥 집필자 소개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현 대구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조선 시대사, 정치사에 관심이 많으며 연구 논문으로 <조선시대 정치권력과 환관>, <소통과 교류의 땅 ..펼쳐보기

출처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 저자윤재운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한국 고대사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영역의 인물이 두루 다루어지도록 구성했다. 인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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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부터 대한민국까지 변방의 무장에서 새 왕조의 주인으로, 이성계 500년 조선왕조의 기반을 다지다, 정도전 태종의 치적 뒤에 자리한 장자방, 하륜 조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세종 청백리의 표상, 황희 신분의 굴레를 뛰어넘은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 왕위 찬탈자인가, 위대한 군주인가, 세조 모사가인가, 지략가인가, 한명회 단종을 향한 일편단심, 성삼문 국력을 신장시킨 외교와 국방의 달인, 신숙주 사림의 영수, 김종직 비운의 폐왕, 연산군 도학 정치를 꿈꾼 급진적 이상주의자, 조광조 조선 최초의 자연철학자, 서경덕 조선 주리철학의 선구자, 이언적 중세의 봉건적 질서에 반기를 들다, 임꺽정 동방의 주자, 이황 조선의 주자학을 일구다, 조식 동서 분당의 시대, 정인홍 어린 천재에서 희대의 정치가로, 이이 전란 속에서 나라를 구한 재상, 유성룡 한국 해전의 역사를 새로 쓰다, 이순신 조선 의학의 집대성 《동의보감》, 허준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 정여립 홍길동의 아버지, 허균 대동법을 실시한 실리적 개혁가, 김육 명분인가 실리인가, 최명길 우리말의 가락을 살려 우리 글자로 쓰다, 윤선도 유림 위에 군림한 정치 사상계의 거장, 송시열 성리학계의 이단아, 윤휴 붓으로 살려낸 만물의 조화, 정선 경세치용의 학문을 열다, 이익 당쟁 속에서 탕평을 실천한 재상, 채제공 못다 한 개혁의 꿈, 정조 정조의 남자, 홍국영 실학의 아버지, 박지원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정약용 한국화의 전통미를 일구어 낸, 김홍도 조선을 뒤흔든 농민봉기의 지도자, 홍경래 한국적 서체를 완성하다, 김정희 자주적 근대화를 주장한 개화 사상가, 박규수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 조선의 마지막 봉건주의자, 이하응 격동의 역사 속 비운의 황제, 고종 풍전등화의 조선에서 치열하게 살다 간 여걸, 명성황후 암살당한 개혁의 불꽃, 김옥균 한국 민중 저항사의 상징, 전봉준 민중 계몽으로 자주독립을 꾀하다, 서재필 청년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운, 안창호 총 한 자루로 제국주의를 처단하다, 안중근 〈님의 침묵〉, 한용운 나라는 망해도 민족은 망하지 않는다, 신채호 항일 무장 투쟁의 영웅, 김좌진 삼천 만 동포에게 고함, 김구 좌익과 우익, 한국 현대사의 갈림길에서, 여운형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 시대를 앞서 간 비운의 여인, 나혜석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받지 않는다, 박정희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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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전봉준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윤재운,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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