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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431년
사망 1492년

문장과 경술(經術)에 뛰어나 이른바 영남학파의 종조(宗祖)가 되었다.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이 사후인 1498년의 무오사화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무오사화 당시 부관참시를 당했으며, 많은 제자가 죽임을 당했다.
중종 때 신원되고, 숙종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사림의 영수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표방했지만 그것이 제대로 뿌리를 내린 것은 100여 년이 지나 생활의 실천을 강조하는 사림(士林)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조선을 건국하는 데에는 정도전 등 관학파의 노력이 컸다. 이후 관학파들은 집현전에서 학문을 연구하며 《경국대전》 등 각종 서적을 편찬하면서 유교 윤리의 기틀을 닦고 조선의 제도를 만들어갔다. 그러나 조선이 조선다운 모습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성종 즉위 후 사림이 등장하면서부터이다.

사림은 15세기 중반 이후 영남과 기호 지방을 중심으로 중소 지주적인 배경을 가지고 성장한 세력들을 말한다. 이들은 투철한 성리학적 이념을 발판으로, 향촌 자치를 내세우며 도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강조했다.

일반적으로 조선 시대 성리학의 도통(道通)은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조광조-이황으로 이어진다. 이 도통론은 처음부터 존재했다기보다는 훗날에 만들어진 것이다. 정몽주에게 길재가 배웠다고는 하지만 그다지 깊은 관계는 아니었고, 길재가 선산으로 낙향한 후에는 선산 출신인 김숙자가 그에게서 배웠다. 김숙자의 아들 김종직은 임지에서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관혼상제를 시행하도록 하고 봄, 가을로 향음주례(鄕飮酒禮)와 양노례(養老禮)를 실시하는 등 성리학적 향촌 질서를 수립하는 데 주력했다. 김굉필, 정여창, 이승언, 홍유손, 김일손 등 여러 제자들을 기른 것도 이때의 일이다.

김종직은 외가인 경상남도 밀양에서 아버지 김숙자와 밀양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려 말 정몽주와 길재의 학통을 이은 대학자로 문장과 역사에 두루 능했다. 조선이 세워진 이후 선산 교수, 성균관 사예 등 많은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자 낙향한 후 제자들을 양성했다. 아버지의 이러한 가르침은 1486년에 신종호(申從濩) 등과 함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편차(編次)할 때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러나 무오사화 때 그가 쓴 많은 책들이 사라져 그의 학문적 성향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가 성리학에 뜻을 두게 된 것은 열여덟 살 때이다. 그는 《주역(周易)》을 읽으며 성리학의 근원을 알게 되었고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들과 교류하면서 학문은 더 깊어졌다. 과거를 보러 길을 떠난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3년간 상복을 벗지 않고 나무토막을 베고 잤으며 껍질을 벗긴 조밥으로 끼니를 이었다. 그를 지켜본 사람들은 그의 효심에 혀를 내둘렀다.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한 그는 사가독서하고, 1462년 승문원 박사로 예문관 봉교를 겸했다. 성종이 즉위한 후 경연을 열어 학문이 뛰어난 선비들을 선발했을 때 선발된 19명의 선비들 중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성종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성종은 그가 늙은 어머니의 봉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자 그 사정을 딱히 여겨 함양 군수와 선산 부사를 맡겨 귀향할 수 있도록 해 줄 정도였다. 그가 향리에 머무른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이곳에서 제자들을 양성하며 일생 중 가장 평화로운 시절을 보냈다. 그가 이런 외직(外職)을 원한 것은 조정에서의 복잡한 파벌 정치를 피하고 소외된 지방 백성들을 살피면서 후진 양성에 힘쓸 수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학사루

최치원이 함양 태수였을 때 자주 이 누각에 올라 시를 읊었다고 하여 학사루라 불렸다. 후일 김종직이 함양 군수로 재직할 때 이곳에 붙여진 유자광의 시를 적은 편액을 떼어내어 대신들의 불만을 초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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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김종직의 문하를 ‘영남학파’라고 일컫는 것은 그는 물론 그의 가르침을 받은 수많은 학자들이 이곳 출신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정여창과 김굉필은 그의 학문을 이어받아 도학(道學)을 일으켰고, 남효온은 생육신의 한 사람이며,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김일손은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사림들이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1485년(성종 16) 이후이다. 1478년 홍문관이 생기면서 삼사(三司,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기능이 갖추어졌고, 사림들이 삼사로 진출하면서 언로(言路)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사림파와 관학파의 학문에 큰 차이는 없었다. 사림들이 경학을 중시한 것도 그들의 입지가 확고해진 후의 일이다. 과거를 통해 중앙에 진출한 사림 세력은 주로 전랑과 삼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훈구 세력의 비리를 비판함으로써 그들의 일방적인 독주를 견제했다. 사림으로 등장하는 첫 번째 인물이 바로 김종직이다. 성종은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 세력을 중용했으므로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이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얼마 후 성종은 그를 조정으로 불렀다. 성종은 그에게 홍문관 응교, 지제교 겸 경연 시강관, 춘추관 편수관 등의 요직을 맡겼다. 이듬해에는 승정원 부승지라는 초고속 승진에 이어 우부·좌부승지를 거쳐 이조 참판에 이르렀다.

그러자 훈구대신들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다. 젊은 신진 인사가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데에다 직위도 오르자 경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와중에 성종이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을 그에게 맡기자 훈구파들의 소외감은 극에 달았다. 그러자 오랫동안 대제학직을 차지하고 있던 서거정이 물러나면서 적임자인 김종직을 제외시키고 홍귀달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었다. 전임자가 후임자를 천거할 수 있다는 당시의 전례를 이용하여 김종직을 따돌린 처사였다. 김종직으로서는 대제학의 꿈을 잃었지만 성종의 총애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전라도 관찰사와 형조 판서 등을 거치면서 공정하게 일처리를 해 나갔다. 그러던 중 김종직은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1492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인품과 학문을 존경하던 전국의 유생들이 모여들어 그의 장례를 치렀다.

그러나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계속되었다. 일찍이 훈구파의 거두인 이극돈이 전라도 감사로 있을 당시 정희왕후의 상중에 장흥의 한 기생집에 머물러 논 일이 있었다. 김종직의 문하인 김일손이 이 일을 사초(史草)에 기록했고, 이극돈은 삭제를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이렇듯 첨예하게 대립하던 두 세력은 연산군이 등극하면서 마침내 폭발하게 되었다.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문제 삼아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파의 대부분을 축출하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김종직은 1457년(세조 3) 10월 밀양에서 경산(京山, 지금의 성주)으로 가다가 답계역에서 숙박을 한 일이 있었다. 그날 밤 신선이 칠장복을 입고 나타난 꿈을 꾸고 나서 그는 서초패왕 항우(項羽)를 세조에, 의제(義帝)를 단종에 비유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하는 내용의 글을 지었다. 이것이 〈조의제문〉이다. 이는 세조와 그 후손들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사건은 당시 사관이던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이 글을 사초에 기록해 스승을 칭찬하면서 비롯되었다. 1498년(연산군 4) 이극돈, 유자광, 노사신 등이 연산군에게 이것은 “선왕의 명예를 실추시킨 대역무도한 글”이라고 간언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김종직은 부관참시되고 김일손은 능지처참되었으며 김굉필과 정여창 등 40여 명이 참해지거나 유배된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존의 집권 세력인 유자광, 정문형, 이극돈 등 훈구파가 성종 때부터 주로 삼사에 진출해 언론과 문필을 담당하면서 자신들의 정치 행태를 비판해 왔던 김종직 문하의 사림파를 견제하기 위하여 내세운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김종직은 중종반정 이후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그의 도학 사상은 제자인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유호인, 남효온, 조위, 이맹전, 이종준 등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의 도학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김굉필은 조광조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시켜 그 학통을 그대로 계승시켰다. 그는 세조와 성종 대에 걸쳐 벼슬을 하면서 항상 정의와 의리를 숭상하고 실천했는데, 그 정신이 제자들에게 전해졌고 실제로 이들은 절의를 높이며 의리를 중히 여기는 데 힘썼다. 이러한 연유로 사림 학자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고, ‘사림의 영수’로 추앙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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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운 집필자 소개

고려대 사학과와 동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한국사연구실, BK21한국학 교육연구단 국제화팀에서 연구원을 지냈으며,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연구소에서 고대사에 ..펼쳐보기

장희흥 집필자 소개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현 대구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조선 시대사, 정치사에 관심이 많으며 연구 논문으로 <조선시대 정치권력과 환관>, <소통과 교류의 땅 ..펼쳐보기

출처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 저자윤재운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한국 고대사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영역의 인물이 두루 다루어지도록 구성했다. 인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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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부터 대한민국까지 변방의 무장에서 새 왕조의 주인으로, 이성계 500년 조선왕조의 기반을 다지다, 정도전 태종의 치적 뒤에 자리한 장자방, 하륜 조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세종 청백리의 표상, 황희 신분의 굴레를 뛰어넘은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 왕위 찬탈자인가, 위대한 군주인가, 세조 모사가인가, 지략가인가, 한명회 단종을 향한 일편단심, 성삼문 국력을 신장시킨 외교와 국방의 달인, 신숙주 사림의 영수, 김종직 비운의 폐왕, 연산군 도학 정치를 꿈꾼 급진적 이상주의자, 조광조 조선 최초의 자연철학자, 서경덕 조선 주리철학의 선구자, 이언적 중세의 봉건적 질서에 반기를 들다, 임꺽정 동방의 주자, 이황 조선의 주자학을 일구다, 조식 동서 분당의 시대, 정인홍 어린 천재에서 희대의 정치가로, 이이 전란 속에서 나라를 구한 재상, 유성룡 한국 해전의 역사를 새로 쓰다, 이순신 조선 의학의 집대성 《동의보감》, 허준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 정여립 홍길동의 아버지, 허균 대동법을 실시한 실리적 개혁가, 김육 명분인가 실리인가, 최명길 우리말의 가락을 살려 우리 글자로 쓰다, 윤선도 유림 위에 군림한 정치 사상계의 거장, 송시열 성리학계의 이단아, 윤휴 붓으로 살려낸 만물의 조화, 정선 경세치용의 학문을 열다, 이익 당쟁 속에서 탕평을 실천한 재상, 채제공 못다 한 개혁의 꿈, 정조 정조의 남자, 홍국영 실학의 아버지, 박지원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정약용 한국화의 전통미를 일구어 낸, 김홍도 조선을 뒤흔든 농민봉기의 지도자, 홍경래 한국적 서체를 완성하다, 김정희 자주적 근대화를 주장한 개화 사상가, 박규수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 조선의 마지막 봉건주의자, 이하응 격동의 역사 속 비운의 황제, 고종 풍전등화의 조선에서 치열하게 살다 간 여걸, 명성황후 암살당한 개혁의 불꽃, 김옥균 한국 민중 저항사의 상징, 전봉준 민중 계몽으로 자주독립을 꾀하다, 서재필 청년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운, 안창호 총 한 자루로 제국주의를 처단하다, 안중근 〈님의 침묵〉, 한용운 나라는 망해도 민족은 망하지 않는다, 신채호 항일 무장 투쟁의 영웅, 김좌진 삼천 만 동포에게 고함, 김구 좌익과 우익, 한국 현대사의 갈림길에서, 여운형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 시대를 앞서 간 비운의 여인, 나혜석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받지 않는다, 박정희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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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김종직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윤재운,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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