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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다산, 丁若鏞출생 | 176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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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36년 |
한국의 역사, 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서학을 통해 합리주의적 과학 정신과 서양의 과학 지식을 도입했다.
주요 저서로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이 있다.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정약용은 윤휴, 유형원, 허목, 이익, 권철신, 이벽 등에게 영향을 받은 남인 학자로 무너져 가는 조선왕조의 난맥상을 지적하고 이를 개혁하고자 한 인물이다. 그의 개혁 사상은 ‘낡은 나라를 새롭게 하자.’라는 문구로 집약할 수 있다. 그는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을 개선하고 독선적인 주자학 사상을 개혁해 나라를 구제하고 민생을 구하고자 했다. 이를 위한 이론적 바탕으로 천주교 교리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는 주자학을 공격하면 사문난적으로 몰리던 때였다. 그는 공자 시대의 수사학(洙泗學)으로 돌아가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논리를 개발해 그것으로 주자학과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비판하고 새로운 국가 체제를 구상했다. 그러나 당쟁의 희생양이 되어 18년간 유배 생활을 했다.
정약용은 경기도 광주군 마현리에서 정재원(丁載遠)과 윤두서의 손녀인 해남 윤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정재원은 첫 번째 부인인 의령 남씨에게서 맏아들 약현(若鉉)을 얻었고, 두 번째 부인인 해남 윤씨에게서 약전(若銓), 약종(若鍾), 약용(若鏞) 3형제와 딸 하나를 얻었다. 그리고 후취였던 잠성 김씨에게서는 아들 약황과 세 딸을 두었다. 그의 집안은 조선 초기에 8대조가 홍문관 관원까지 오른 명문가였으나 5대조부터는 이렇다 할 관직을 얻지 못하다가 그의 아버지 대에 이르러 진주 목사를 지냈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학문의 기초를 배웠다. 네 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웠고 일곱 살에는 처음 시를 지었다. 그는 열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이미 《삼미자집(三眉子集)》이라는 시집을 낼 정도로 한시를 잘 지었다. 글짓기를 즐겨 1년이면 그가 지은 글이 키 높이만큼 쌓였다고 한다. 열여섯 살 때부터 이가환, 이승훈 등으로부터 이익의 학문을 접했고, 한편으로는 형 정약종과 이벽을 통해 서학을 접했다. 이벽은 한국 천주교의 성조로 일컬어지는 인물로 정약용의 큰형수의 동생이다.
정조가 즉위하면서 아버지가 호조 좌랑으로 복귀하자 정약용은 서울로 옮겨와 살면서 외증조부인 윤두서의 서가에 있는 많은 책들을 읽기 위해 외가에 자주 드나들었다. 또 매부 이승훈의 일가인 이가환의 집에도 출입하면서 이가환의 증조부인 성호 이익의 책들을 읽고 새로운 학문을 접했다.
스물세 살에는 형 약현, 약전과 함께 생원 초시에 합격한 후 성균관에 입학했다. 이후 문과에 급제하여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되었다. 초계문신이란 신진 관료 중 우수한 자를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에서 재교육시키는 제도로 당색이나 문벌이 서로 다른 초임 관리들을 서로 교류하게 해 동료 의식을 갖게 하고, 탕평 정치를 보좌할 관료 집단으로 양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해 가을, 정조는 그에게 배다리(浮橋)를 만드는 설계를 맡겼다. 정조는 평소 정약용이 서학서를 통해 서양 과학 지식을 익힌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경학뿐 아니라 기술 분야에도 재능이 있었다. 이러한 그를 반대파인 노론 벽파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주시했고, 결국 정약용은 서학을 신봉했다는 이유로 충청도 서산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조정에 나오기 오래전에 이승훈에게 《천주실의》를 빌려 읽으면서 천주교를 처음 접했다. 그는 특히 《천주실의》에 소개된 평등 사상에 큰 흥미를 느꼈다. 또 조선에서 구경도 할 수 없는 과학 기술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매형인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가져온 많은 천주교 서적과 십자가, 성화, 과학기기도 살펴보았다. 이것이 벽파에게 빌미가 되었다. 하지만 다행히 인재를 아끼는 정조가 개입해 첫 유배는 열흘 만에 끝났다.
1792년(정조 16) 그는 《홍문록》에 올랐다. 홍문관은 고위직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홍문관 관원이 되면 사헌부와 사간원 관원인 대간이 될 수 있었다. 대간은 지위는 높지 않았으나 백관에 대한 탄핵권이 있어 그 권한이 컸다. 그래서 정조는 대간에 남인을 기용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정약용은 아버지의 3년상을 치르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가야만 했다.
그는 고향에서 시묘살이를 하던 중 화성을 축조할 방안을 연구해 보라는 정조의 어명을 받고 윤경(尹耕)의 《보약(保約)》과 유성룡의 《전수기의(戰守機宜)》 등 축성 제도를 참고하여 《성설(城說)》을 집필했다. 수원 화성은 1794년 1월에 착공되어 1796년 9월에 완공되었다. 10년이 걸려도 어렵다는 성을 2년 6개월 만에 완성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거중기, 녹로 등 여러 기구들과 벽돌 등의 새로운 건축자재를 사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가 사간원 사간을 거쳐 동부승지에 임명되자 조정에서는 일대 소란이 일었다. 파격적인 승진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남인인 정약용을 그대로 조정에 둘 경우 사도세자 문제가 다시 불거질지도 모른다는 벽파의 우려는 계속되었고 위기감은 점점 커졌다. 정조가 그를 동부승지에 임명하자 그는 자신과 천주교에 대해 벽파뿐 아니라 만천하에 진실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작성한 것이 바로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상소문(辨謗辭同副承旨疏)〉이다. 정약용은 여기에서 자신이 천주교를 믿게 된 경위와 배교하게 된 경위를 소상히 밝혔다.
그러나 홍낙안과 이기경 등이 오히려 이 상소를 그가 천주교 신자라는 증거라며 호도하자 정조는 그를 곡산 부사로 좌천시켰다. 비난을 잠재우고자 지방으로 보낸 것이다. 한두 해 기다리면 다시 불러올리겠다는 약속도 했다. 정약용은 이곳에서 백성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살펴보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이곳에서의 경험은 그가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짓는 기초가 되었다. 그해 겨울에는 《마과회통(麻科會通)》 12권을 지었다.
그 후 병조 참지로 중앙 관직에 복귀해 형조 참의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벽파는 계속해서 정약용을 물고 늘어졌다. 치졸한 흠잡기에 분노한 정약용은 정계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고향에서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에게 어느 날, 규장각의 아전이 찾아와 정조의 전갈을 전했다. “오래도록 너를 보지 못했다. 책을 편찬하고 싶어 주자소의 벽을 새로 발랐다. 아직 마르지 않아 깨끗하진 않으나 그믐께면 들어와 경연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본 정약용은 정조에 대한 그리움으로 목이 메어 서울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정조가 승하한 뒤였다.
열한 살의 어린 순조가 보위에 오르자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권력을 잡은 벽파는 천주교 신자들을 철저히 탄압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남인 계열 중에 천주교 신자가 많았던 탓이 컸다. 그러던 중 책롱 사건이 터졌다. 정약용의 셋째 형 약종이 은밀하게 감추어 오던 천주교 관련 물건들이 발각된 것이다. 1800년(순조 1) 2월 8일, 정약전, 약용 형제와 함께 이가환, 이승훈, 홍락민, 권철신, 이기양, 오석충, 김건순, 김백순 등이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반대파들은 기회를 잡은 듯 정약용의 형제들을 몰아붙였다. 세 형제 가운데 약종은 처형되고 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약용은 경상도 장기(지금의 영일군)로 귀양을 갔다.
그해 10월에는 황사영 백서 사건이 터졌다. 약현의 사위 황사영이 조선 교회에 대한 박해 사실을 적은 밀서를 베이징의 주교에게 전하려다 발각된 사건이다. 벽파 강경론자들은 이를 기회로 남인 세력을 완전히 뿌리 뽑으려고 했다. 유배 중인 정약용 형제도 다시 압송되었으나 혐의가 드러나지 않아 다시 약전은 흑산도로, 그는 강진으로 귀양을 갔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그와 가까웠던 이가환, 권신일, 이승훈 등 천주교 신자들은 처형되었다. 이것이 신유박해이다.
강진에 도착한 그는 성수봉이라는 하급 관리의 집에 거처를 정하고 이곳에서 6년을 살았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의 명성이 알려지자 인근의 학도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비록 귀양살이를 하며 많은 고생을 했지만 그 시기를 연구의 기회로 삼아 정진해 대실학자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1818년(순조 18), 사간원의 이태순이 이미 4년 전에 석방이 결정된 정약용을 풀어 주지 않는 것은 불법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제야 그는 18년 만에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1836년(헌종 2) 2월에 75세를 일기로 고향집에서 세상을 떴다. 그가 생전 쓴 책은 필사본인 《열수전서》에 경집 88책 250권, 문집 30책 87권, 잡찬 64책 166권 등 총 182책 503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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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영역의 인물이 두루 다루어지도록 구성했다. 인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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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정약용 –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윤재운,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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