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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
鄭汝立출생 | 154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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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589년 |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과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 등 왕권 체제하에서 용납될 수 없는 혁신적인 사상을 품었다.
서인 출신이나 이이 사후 이이를 비롯하여 서인의 영수인 박순, 성혼을 비판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낙향하여 대동계를 조직하고 무력을 길렀다.
1589년(선조 22) 반란 고변으로 관군에 포위되자 자살했고, 그와 가까운 동인들의 세력이 위축되었다.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
조선 시대 사림의 정계 진출은 성종 대부터이지만 4대 사화를 거쳐 선조 대는 정계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러나 동서 분당 이후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구별되는데 그 기점이 되는 사건이 기축옥사이다. 이 한가운데 있는 사람이 정여립이다.
정여립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개혁가로 전북 전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전라북도에 이주한 후 8대째 내려오는 명문 가문으로 토호인 김제 조씨, 전주 최씨나 신흥 명문가인 전의 이씨, 전주 소씨 집안 등과 통혼(通婚)하면서 지역적 기반을 토대로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정여립의 어린 시절 일화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정여립의 아버지 희증(希曾)은 대대로 전주 남문 밖에서 살아왔다. 처음 그를 잉태했을 때 꿈에 고려의 무신정변을 일으킨 정중부가 나타났고, 태어날 때에도 또 같은 꿈을 꾸었다. 친구들이 와서 축하했으나 그는 기뻐할 수가 없었다.
정여립이 여덟 살이 되었을 무렵 아이들과 놀면서 까치새끼를 잡아 주둥이에서부터 발까지 뼈를 부러뜨리고 살을 찢은 일이 있다. 희증이 그것을 보고 놀라 “누가 이렇게 못된 짓을 했느냐?”라고 묻자, 한 여종이 사실대로 대답했다. 희증이 노하여 정여립을 크게 꾸짖었다. 그날 밤 정여립은 여종 아이의 부모가 방아를 찧으러 나가 아이 혼자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가 칼로 배를 갈라 죽였다. 그 부모가 돌아와서 보니 자리에 피가 가득하고 아이는 죽어 있었다. 발을 구르면서 통곡하자 이웃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때 정여립은 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다가 나오면서 “내가 한 짓이니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하고 말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해괴하게 여기고 “악장군(惡將軍)이 났다.”라고 수군거렸다.
이 같은 성격은 성장한 후에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정여립이 열다섯 살 무렵 아버지 희증이 현감이 되었는데 그는 아버지를 따라가서 고을 일을 전부 제 마음대로 처리해 버렸는 일화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
1567년(명종 22)에 그는 진사가 되었고, 1570년(선조 2)에는 문과에 급제할 정도로 두뇌가 명석했다. 통솔력도 뛰어났고 경서에도 밝았다고 한다. 그는 급제 이후 성균관 학유, 사간원 정언, 예조 좌랑을 거쳐 홍문관 수찬에 오르는 등 10여 년간 요직을 거쳤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따르면 “기백이 굉장하고, 말솜씨가 좋아서 입을 열기만 하면 그 말이 옳고 그른 것은 불문하고 좌석에 있는 이들이 칭찬하고 탄복했다.”라고 한다. 그는 처음에는 서인으로서 이이와 성혼의 후원을 받았으나, 이이가 죽은 뒤 이이, 성혼, 박순을 비판했다. 이에 따라 서인의 집중적인 비판의 표적이 되었고 선조의 눈 밖에 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의주 목사 서익(율곡과 성혼의 친구)은 그를 보고 이이가 살아 있을 때에는 성인이라 칭송하더니, 죽은 후 가장 먼저 배반했다며 그를 비판했다.
정여립은 대과에 합격한 후 존경하는 이이를 찾아갔다. 그는 동서 분당이 생기기 전에는 동서인 모두와 친하게 지냈다. 그러나 선조 8년, 심의겸과 김효원 간의 이조 전랑 추천권 문제로 선배 사림과 후배 사림 간의 대립이 표면으로 불거졌고, 사림은 결국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되었다. 그러나 분당 이후에도 얼마간 동인은 김성일, 김효원, 서인은 박순, 윤두수, 윤근수, 정철, 심의겸 정도였다.
이 둘을 조정하는 세력으로는 이이, 노수신, 유성룡, 성혼 등이 있었다. 당시 이이와 성혼은 서인과, 유성룡 등은 동인과 가까웠다. 그러나 이이는 양시양비(兩是兩非)론을 주장하면서 양쪽 다 잘못이라 비판하고, 심의겸을 개성 유수로, 김효원을 경흥 부사로 보냈다. 이후 이이는 이조 판서로 재직하면서 이조 전랑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판서직을 강화하는 정책을 통해 무분별한 언론 활동을 통제하는 정책을 폈다. 이에 이이는 동인들의 비난을 받으며 서인으로 차정되었다. 아마 당시에는 정여립 역시 동서인과 관계없이 활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정여립이 이이 사후에 그를 비판한 것은 분당 차원에서가 아니라 후배 사림으로서 강직하면서 직선적인 성격 탓에 이이가 주장한 서인 중심의 조제보합론(각 붕당의 군자들만 뽑아 쓰면 된다는 이론)을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고향으로 내려온 그는 진안 죽도에 서실(書室)을 짓고 글 읽기에 힘써서 ‘죽도 선생’이라고 불렸다. 그는 사회(射會)를 열어 강론을 펴는 등의 활동을 하면서 인근의 사람들을 모아 대동계를 조직했다. 대동계는 전주, 금구, 태인 등 이웃 고을의 여러 무사들과 공·사(公私)의 노비 등 신분에 제약을 두지 않고 가입을 허가했으며, 보름마다 한 번씩 모두 그의 집에 모여 무술 훈련을 하는 등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 갔다.
1587년에는 전주 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대동계원을 이끌고 손죽도에 침범한 왜구를 물리치기도 했다. 그 뒤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邊崇福), 박연령(朴延齡), 해주의 지함두(池涵斗), 운봉의 승려 의연(義衍) 등과 왕래하면서 대동계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1589년 안악 군수 이축(李軸), 재령 군수 박충간(朴忠侃) 등은 정여립이 한강이 얼 때를 틈타 한양으로 진격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며 고변했다. 동인들이 거듭 나서서 사실이 아닐 것이며, 정여립을 조정에 불러들여 사실을 확인해 보자고 선조에게 고했다. 의금부 도사가 정여립을 압송하기 위해 전주로 내려가는 도중 이 정보가 새어 나가 정여립은 아들 옥남과 함께 진안 죽도로 도주했다. 그러나 포위된 정여립은 결국 몸종과 아들 옥남의 목을 직접 쳐서 그 숨통을 끊고 자결했다. 그의 사망 후 그의 집은 허물어지고 파헤쳐져 연못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가 진짜 반역을 도모했는지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이다. 《선조수정실록》에는 그의 반란에 대한 근거로 다음을 들고 있다. 첫째, 그는 평소에 제자들에게 “사마온공의 《통감》은 위(魏)로 기년을 삼았으니 이것이 직필(直筆)인데 주자가 그것을 그르게 여겼다. 대현의 소견이 각기 이렇게 다르니 나는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즉 주자학을 비판하는 그의 논조는 성리학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반역의 근거로 본 것이다.
둘째, 그가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정해진 임금이 있겠는가. 요, 순, 우임금은 서로 전수하였으니 성인이 아닌가.”라고 말했다는 기록과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은 왕촉이 한때 죽음에 임하여 한 말이지 성현의 통론은 아니다. 유하혜는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 하였고, 맹자는 제나라 선왕과 양나라 혜왕에게 왕도를 행하도록 권했는데, 유하혜와 맹자는 성인이 아닌가.”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내용들은 왕조의 정통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발언이다. 부자세습으로 이어지는 왕조가 옳지 않음을 역설할 뿐만 아니라 천하가 공물이라는 주장은 천자는 하늘이 내린 것이라는 의견을 깨고 민본주의를 지향하며, 나아가 맹자의 역성혁명을 간접적으로 지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은 정여립만이 생각하던 것은 아니었다. 기대승과 이이도 임금인 태감을 물러나게 한 이윤을 거론하면서 선조에게 군주로서의 자세와 왕도 정치를 강조했다.
하지만 정여립이 자살을 하면서 동인과 정여립은 모반죄로 몰렸고 동인 1천여 명이 숙청을 당했다. 이를 기축옥사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동인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으며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인의 지나친 세력 확대는 선조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정철이 후계자 문제를 거론하다가 밀려나면서 다시 동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후 동인들은 기축옥사를 일으킨 송강 정철의 처벌을 두고 다시 분열한다. 정철을 사사하고 서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제시한 이산해 일파와 정철을 유배시키는 것으로 마무리하자는 유성룡 일파 간의 반목은 결국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는 배경이 되었다. 결국 선조는 유성룡이 이끄는 남인의 주장을 받아들여 정철을 유배형에 처함으로써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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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영역의 인물이 두루 다루어지도록 구성했다. 인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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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정여립 –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윤재운,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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