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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물, 공기 그리고 불 이외에 어떤 원소가 더 있을 것이라는 로버트 보일의 생각은 옳았다. 그러나 화학 원소가 표로 작성되어 그의 생각이 옳다는 인정을 받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라부아지에는 1789년에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는 33개 원소의 목록을 만들었고 이것이 화학에서 근대적 작업의 시초였다. 물론 라부아지에의 생각이 모두 옳았던 것은 아니다. 그가 선정한 33개의 원소에는 당시 열현상의 원인으로 생각되던 열소(熱素, caloric)가 포함되어 있었다(열역학 항목 참조). 라부아지에는 자신의 원소 목록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추가적인 연구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러시아 화학자 드미트리 멘델레프가 원소 주기율표를 발표한 것은 라부아지에가 33개의 원소 목록을 발표한 것보다 한참 뒤인 1865년이었다. 멘델레프의 원소 주기율표는 원소들이 각각의 특성에 따라 정리되어 있어 원소들이 결합하는 방법을 찾고자 할 때 매우 유용해 물리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경험주의자였던 라부아지에는 ‘나는 사실에 근거하여 진실을 찾아내고자 했고, 가급적 (상상력이 가미된) 추론에 의지하지 않으려 했다. 또한, 추론이 신뢰할 만한 과학적 도구가 아니고 나 자신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항상 추론보다는 관측과 실험을 주요한 연구 방법으로 삼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그가 발견한 질량 보존의 법칙(화학 반응에서 질량이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는)은 후대에 이르러 원자 수준에서의 화학 반응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원리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원자론자가 아니었는데, 이는 원자론이 철학적 관점에서 불가능한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만물의 씨앗이 되어라!
혼돈의 세계를 헤매던 원소들이
그대의 손길로 조화를 찾았고,
그대가 정해준 아름다운 비율로
완벽한 조화의 세상을 이루나니.
- 니콜라스 브래디, 〈성 세실리아 찬가〉
비율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원자론은 꽤 설득력 있는 이론이었다. 하지만 원자가 모여 물체가 된다는 것과 라부아지에가 찾아낸 원소들보다 더 많은 원소가 존재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원자들이 서로 결합하는 이유를 밝힐 필요가 있었다.
초기의 원자론자들에게 원자들의 결합은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와 같았다. 심지어 뉴턴은 답답했던 나머지 ‘자연의 대리인’이 원자들을 붙들어 맨다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원자의 결합에 대한 연구의 첫걸음은 화합물의 각 원소 구성 비율에 대한 조사였다. 프랑스의 화학자 조제프 프루스트는 스페인 마드리드의 왕립 연구소장으로 1798년에서 1804년까지 재직했다. 그 기간에 행해진 실험 결과를 토대로 ‘일정 성분비의 법칙’을 이끌어냈는데, 이 법칙에 의하면 화합물을 구성하는 각 성분 원소의 질량 비율은 항상 일정하다.
라부아지에가 처형되고 몇 년 뒤, 영국의 화학자 존 돌턴이 프루스트의 이론을 발전시켜 현대적인 의미에서 원자론의 기초를 세웠다. 1803년에 시작하여 1808년에 발표한 연구에서 돌턴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결론을 제시했다.
• 모든 원소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 한 원자의 원소는 모두 동일하다.
• 원자는 원소에 따라 다르며, 다른 종류의 원자는 질량이 다르다.
• 원자는 화학적 방법으로 생성되지도, 파괴되지도, 나누어지지도 않는다.
• 한 가지 원소의 원자는 다른 종류의 원소의 원자와 결합하여 화합물을 이룰 수 있다. 특정 화합물을 구성하는 원소의 비율은 일정하다.
‘배수 비례의 법칙’도 돌턴이 발견(또는 제안)한 것이다. 화합물을 구성하는 원소가 무엇인가에만 주목하지 않고 두 가지 이상의 원소가 결합할 수 있는 방법이 어떤 것인가에도 주목했던 돌턴은 어떤 화합물이든 이를 구성하는 원소들의 비율에 간단한 정수비가 성립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탄소와 산소가 결합하면 일산화탄소(CO)가 되기도 하고 이산화탄소(CO2)가 되기도 한다. 이때, 일산화탄소에 들어있는 탄소와 산소의 질량비는 12:16이고, 이산화탄소에서는 12:32이므로, 일산화탄소와 이산화탄소에 들어있는 산소의 질량비는 1:2가 된다.
이처럼 화합물을 구성하는 원소의 질량비로부터 원자들 사이의 질량비를 계산할 수 있었다. 돌턴은 수소의 질량을 1로 놓았을 때의 상대적인 비율로 원자의 질량을 계산해냈는데, 물과 같이 단순한 화합물의 경우 원소들의 구성비가 1:1일 것이라고 가정하는 바람에(물이 H2O가 아니라 HO라고 생각했음) 그가 계산한 원자들의 질량비는 정확한 것이 못되었다. 몇 년 뒤인 1811년에 이탈리아의 화학자 아메데오 아보가드로가 아보가드로의 법칙을 발견한 뒤에야 돌턴의 오류는 수정될 수 있었다. 아보가드로의 법칙은 온도와 압력이 같을 때 같은 부피의 기체 안에 들어있는 분자의 개수(아보가드로의 상수(常數) 6.0221415×1023개/mol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같다는 것이다. 이 법칙에 따라 아보가드로는 2리터의 수소와 1리터의 산소가 반응하면 두 원소가 2:1의 비율로 결합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메데오 아보가드로는 원자-분자 이론의 선구자로 일컬어진다.
앙투안-로랑 드 라부아지에(1743~1794)
앙투안 라부아지에(Antoine-Laurent de Lavoisier, 프랑스 혁명 뒤에는 ‘앙투안-로랑 드 라부아지에’와 같이 고급스럽고 귀족적인 이름을 갖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어서 이름을 바꾸었다)는 부유한 변호사의 아들로 처음에는 법학을 공부했다. 이후 지질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과학 분야의 연구를 시작했는데, 점차 화학에 빠져들었다. 그의 저택에 있던 연구실은 곧바로 자유사상가들과 과학자들을 끌어모았다.
근대 화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라부아지에는 다방면에 걸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원소 목록을 만든 것 이외에도 연소와 호흡에서 산소의 역할과 연소와 호흡, 둘 사이의 유사성을 밝혀내기도 했다. 또한 이를 계기로 오래전부터 연소 현상을 설명하는 데 쓰이던 플로지스톤(phlogiston, 물질이 연소할 때 발생한다는 가상의 성분. 에너지는 보존된다 항목 참조)설이 폐기되었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였고 프랑스 혁명의 이상을 지지했다. 혁명 뒤에는 고위 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경제 개혁을 제안하고 파리의 병원과 감옥의 비참한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혁명 뒤의 공포정치 상황에서 이것만으로는 자신의 목숨을 지킬 수 없었다.각주1)
결국 그는 공포정치가 행해지던 1794년,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재판장에게 중요한 실험을 위해 이 주일만 처형을 늦춰달라고 탄원했지만, ‘공화국은 과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답변과 함께 일정대로 처형되었다고 알려진다. 하인에게 자신이 처형된 후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는지 세어봐 달라고 했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아마 꾸며진 이야기일 것이다.
그의 목을 치는 데는 한순간이면 충분했지만, 그와 같은 두뇌를 다시 얻는 데는 100년도 부족할 것이다.
- 라조제프루이 라그랑지(프랑스 수학자, 천문학자) 라부아지에의 처형에 관해, 1794
원자는 실제로 존재하는가?
지금의 시각에서 본다면 돌턴의 연구결과는 상당히 사실에 가깝다. 하지만 당시의 과학자들은 돌턴의 이론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고, 돌턴의 이론을 받아들이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으로 나누어졌다. 다행히 당시는 증기 기관의 개발로 열역학과 원자의 특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기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질 사회적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원자의 특성은 고온에서의 기체의 특성이나, 19세기 중반에 정립된 열역학 법칙과 관련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물질이 작은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시각적 증거가 최초로 발견된 것은 1827년에 스코틀랜드의 식물학자인 로버트 브라운에 의해서였다. 하지만 당시 그 이유까지 함께 밝혀지진 않았다. 작은 꽃가루 알갱이가 물속에서 움직이는 모습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던 브라운은 마치 무언가 보이지 않는 것에 부딪치는 것처럼 알갱이들이 불규칙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눈치챘다. 심지어 100년이 된 꽃가루도 똑같은 움직임을 보였으므로 꽃가루의 움직임이 꽃가루가 살아있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브라운은 이런 현상의 원인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고, 지금은 ‘브라운 운동’이라고 불리는 이 현상은 결국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한참 뒤인 1877년에 J. 드소가 ‘내가 보기에 이 현상은 액체 속에서 분자들이 열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다’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어서 1889년에는 프랑스의 물리학자 루이 조르주 구이가 알갱이가 작을수록 움직임이 더 뚜렷하다는 것을 발견했고, 이는 드소의 가설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지구물리학자 펠릭스 마리아 엑스너는 1900년에 측정을 통해서 입자의 운동과 입자의 크기, 온도 사이의 관계를 분석했다. 이 결과를 토대로 아인슈타인은 1905년에 브라운 운동을 설명하는 방정식을 세울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입자 운동의 원인이 분자에 있다고 확신했고, 분자의 크기를 수학적으로 추산했다. 1908년에 프랑스의 물리학자 장 페랭이 이 방법을 이용하여 물 분자의 크기를 측정함으로써 아인슈타인 이론의 타당성을 입증했다. 분자의 존재를 입증하는 최초의 실험이었던 이 업적으로 페랭은 1926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드디어 원자와 분자의 존재를 아무도 부인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삶과 죽음의 문제가 된 원자
19세기의 과학계는 원자가 실제로 존재하느냐 아니냐의 논쟁이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일부 물리학자들은 원자가 가상의 개념일 뿐이며 수학적인 측면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 논쟁은 정신 분열 증세를 보이던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1844~1906)이 양쪽의 관점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철학적 해답을 찾고 나서야 해결이 되었다.
볼츠만은 독일의 물리학자인 하인리히 헤르츠가 제안했던, 원자는 ‘형상(bild)’ 또는 그림이라는 개념을 이용했다. 원자론자는 원자를 실재하는 존재로 받아들이고, 원자론에 반대하는 측은 원자를 개념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면 된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주장은 당연히 양쪽 모두에게서 외면당했지만, 원자론자인 볼츠만은 이에 굽히지 않고 반(反)원자론을 제압할 방법을 찾으려 노력했다.
1904년에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물리학회에 참석한 볼츠만은 대부분의 물리학자가 반(反)원자론자라는 것을 알았고, 물리학 분과에 초청조차 받지 못하는 수모를 당했다. 과학에서 철학이 배제되어야 한다는 신념(2010년에 스티븐 호킹이 다시 유사한 주장을 펼쳤다)을 바탕으로 1905년부터 독일의 철학자 프란츠 브렌타노와 의견을 교환했으나 여기에서도 긍정적인 결과에는 이르지 못했다. 어쨌든 원자론을 부정하던 대부분의 물리학자에게서 느꼈던 환멸이 그의 자살에 일부 영향을 준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원자를 나눌 수 있을까?
데모크리토스가 주장했던 것처럼 원자를 더 이상 나누어질 수 없는 작은 입자라고 정의한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지금 우리가 원자라고 부르는 것은 원자라고 할 수 없다. 실제로 아인슈타인과 페랭이 원자의 존재를 증명하던 시대에도 이미 원자보다 작은 입자의 존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
영국의 물리학자 조셉 존 톰슨이 1897년에 전자(電子, electron)를 발견했는데 이는 원자가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입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결국 원자가 물질을 구성하는 궁극적인 입자로 받아들여진 기간은 불과 수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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