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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타쿠스가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돈다고 주장한 지 거의 2천 년이 지난 후, 이 이론은 다시 주목을 받게 된다. 우주가 완벽하고 불변의 존재이며, 신의 계획에 있어 인간이 가장 중요한 핵심적 존재라고 믿는 기독교가 지배하던 세계에서 이런 주장은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도는 존재에 불과하다니, 대체 말이 되는 소리인가? 당연히, 이 이론은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단으로 취급받게 된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구조에서는 달 궤도의 중심이 지구와 크게 어긋나야 했는데, 그렇다면 달이 주기적으로 지구에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가를 반복해야 하므로 지구에서 볼 때 달의 크기도 이에 따라 변해야만 했다. 이외에도 천동설의 여러 가지 문제점이 1496년 독일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요하네스 뮐러(라틴어로 레기오만투스(Regiomantus)라고도 불림)에 의해 지적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에 가장 강하게 대항한 사람은 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이 이름은 라틴어 식으로 부른 것이고, 그의 실제 이름은 미콜라이 코페르니크(Mikolaj Kopernik)이다)로, 그는 관측 결과를 천동설에 억지로 끼워 맞추기보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가정하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특히 지구가 중심에 있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구조에 맞춰 행성의 움직임을 설명할 때 반드시 필요했던 작은 원 궤도(equant)를 특히 싫어했으며, 우주의 중심이 한 점에 모이는 것을 선호했다고 한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을 중심으로 한 우주의 구조에 대한 이론을 완성한 것은 1510년경이었지만, 교회를 의식해 매우 조심스러웠던 그는 곧바로 출판하지 않고 몇몇 동료들에게만 보여주었다. 그래서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는 1543년이 되어서야 출판되었다.
책의 출판을 맡았던 레티쿠스는 코페르니쿠스가 뉘른베르크를 떠날 때까지 출판 준비를 반 정도 진행했었고, 작업을 넘겨받은 안드레아스 오지안더(신교도였다)는 코페르니쿠스가 진짜로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관측 결과를 설명할 수 있는 수학적 방법을 제시하려는 의도일 뿐이라는 내용의 서문을 추가했다. 서문의 의도는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교회의 반발을 조금이나마 무마해보려는 것이었지만 의외로 가톨릭교회는 이 책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신교도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책이 출판된 해에 사망했으며, 정작 자신의 책은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책은 전반적으로 별 관심을 받지 못해서 인쇄된 400부가 다 팔리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현대 천문학의 시작과 과학 혁명을 촉발시킨 업적으로 간주된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계 모형이 프톨레마이오스의 모형보다 훨씬 더 관측 결과에 부합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몇 가지 문제는 남아있었다. 항성은 행성보다 엄청나게 먼 곳에 있는 구(球)에 자리 잡고 있다고 가정되었는데, 이 가정에 의하면 항성은 움직이지 말아야 했다. 지금은 이런 개념이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16세기의 시각으로 볼 때 이 가정은 매우 부자연스러웠다. 대체 신이 무엇 때문에 행성과 항성 사이에 그렇게 커다란 빈 공간을 만들어 수많은 별을 그 먼 곳에 붙박이로 박아놓았단 말인가?
또 하나의 의문점은 매우 실질적인 것이었다. 지구가 돈다면 왜 바닷물이 쏠려서 넘치지 않고 건물들이 무너지지 않는 것인가? 어쨌든 코페르니쿠스처럼 우주를 설명하면 프톨레마이오스처럼 구차하게 이런저런 조건을 갖다 붙일 필요가 없는 것만은 확실했다.
코페르니쿠스는 행성을 지구보다 태양에 가까운 수성과 금성, 지구보다 태양에서 먼 화성, 목성, 토성의 두 종류로 나누었다(그때까지 발견된 행성은 이것이 전부였다). 그는 각 행성의 공전 주기와 태양으로부터의 거리를 계산하였는데, 계산 결과는 이론과 매우 잘 들어맞았으므로 태양을 중심으로 한 모형의 타당성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거대해지는 우주, 하찮아지는 지구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지구가 태양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이 초래한 충격은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지만 천문학자들은 여전히 우주에서 태양계가 중요한 존재라고 믿었다. 한참이 지나서 은하수가 우리 은하라는 것을 알게 되자 이번에는 태양계가 우리 은하의 중심 근처에 있으며, 우리 은하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하긴, 그전까지는 우리 은하를 곧 우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 은하가 수십억 개의 별들이 모인 것이고 우주에는 우리 은하와 같은 은하가 수십억 개가 있으며, 태양계가 우리 은하의 중심이 아니고 우리 은하가 우주의 중심도 아니라는 사실은 인류의 세계관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우리는 그저 평범한 은하의 가장자리에 있는 흔하디흔한 태양계 중의 하나에 딸린 행성에 사는 존재일 뿐이다. 전혀 특별할 것이 없다.
모든 것은 변한다
티코 브라헤는 활발한 사람이었다. 귀족 신분이었는데, 어린 시절에 유괴당한 적이 있었고 결투에서 코를 잃은 것을 가리려고 평생 금과 은으로 된 보형물을 얼굴에 달고 다녔다. 어렸을 때부터 별에 빠져들었고, 정확한 예측을 하려면 정밀하고 지속적인 관측이 필수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던 그는 1569년에 반지름이 6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사분의(quadrant)를 만들었다. 이 장비는 가장자리에 분(分, 1/60도) 단위로 눈금이 매겨져 있어 매우 정밀한 측정이 가능했으며, 1574년 폭풍으로 장비가 손상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1572년, 티코 브라헤는 카시오페이아 자리에서 매우 밝게 빛나는 새로운 별을 보게 된다. 별들이 있는 우주는 영원히 불변이라고 믿던 시대에 이것은 매우 놀라운 현상이었고, 그는 이 별의 위치를 그 후 오랜 시간에 걸쳐 기록했다. 혹시 움직이는 혜성이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8개월의 관측기간 동안 이 별은 때로 금성보다 밝게 빛나기도, 보통의 별처럼 어두워지기도 했지만 위치는 늘 그대로였다. 그는 이 내용을 《새로운 별에 대하여(De Nova Stella)》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는데, 이 때문에 사용되기 시작한 새로운 용어가 바로 신성(新星, nova)이다.
티코는 자신의 관측 자료를 이용하여, 별을 볼 때 시차(視差, parallax)를 확인하여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증거로 제시하려 했다. 시차 때문에 지구의 공전 궤도에서 지구의 위치에 따라 멀리 떨어진 별은 고정된 듯 보이지만 가까운 별은 위치가 바뀐 것처럼 보여야 한다. 하지만 그런 사례를 발견하지 못했던 티코 브라헤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이 틀렸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는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을 미리 암시한다고 생각했으며 천문 현상이 당시 한창 진행 중이던 종교 분쟁과 관련이 있다고 믿었다.
티코 브라헤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생각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지구가 우주 공간에서 움직인다면 탑 위에서 떨어뜨린 돌은 지구의 움직임 때문에 탑 바로 아래가 아니라 조금 더 먼 곳에 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론은 1640년이 되어서야 가상디에 의해서 오류가 밝혀진다. (고전 역학의 탄생 항목 참조)
그 후 1577년에 티코 브라헤는 또 하나의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다. 이번에는 혜성이었다. 그가 관측한 바로는 혜성은 달보다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행성들 사이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이는 프톨레마이오스가 혜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별과 혜성은 우주 가장 바깥쪽에 있는 수정구(crystal sphere)에 있다고 한 가설이 틀렸다는 의미였다. 이것은 신성의 발견 못지않게 충격적이고 혁명적인 발견이었다.
1577년~1588년 사이에 출판한 책에서 티코 브라헤가 제시한 우주의 모형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에서처럼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면서,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처럼 행성들이 태양의 주위를 도는, 일종의 융합이론이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에서 꼭 필요했던, 행성이 공전 궤도 상에서 작은 원 궤도를 돌며 지구 주위를 돈다는 개념인 주전원(周轉圓, epicycle)과 같은 어색한 가정이 필요 없었다. 무엇보다 수정구가 없다는 주장과 행성이 우주 공간에 떠 있다는 개념을 최초로 제시한 것에 의미를 둘 수 있다.
요하네스 케플러
티코 브라헤보다 조금 어렸던 케플러는 브라헤 못지않게 대단한 인물이었지만 그의 접근 방법은 브라헤와는 조금 달랐다. 케플러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올라간 산 위에서 1577년의 대 혜성(티코 브라헤를 자극했던 바로 그 혜성)을 본 후 천문학에 빠져든다. 하지만 천연두를 앓아 시력이 약했던 케플러는 맨눈으로 별을 보는 것이 힘들었으므로 수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케플러는 수도사가 되려고 했는데 마침 수도원에서는 수학과 천문학을 가르쳤고, 당연히 케플러는 이들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교사였던 미하엘 매스틀린은 공식적으로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중심 이론을 가르쳤지만, 케플러를 포함해 자신이 아끼던 몇몇 학생들에게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도 가르쳐주었다.
부자가 아니었던 케플러는 점성술로 약간의 돈을 벌곤 했는데, 천문 현상과 인간 세계의 일이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믿었던 티코 브라헤와는 달리 케플러는 점성술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쓰레기이며, 자신의 고객들은 멍청이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성술이 케플러에게 돈을 벌게 해준 것만은 분명했다.
자신만의 독자적인 우주 모형(코페르니쿠스의 모형에 약간 신비주의적인 그리스 물리학을 접목한 것)을 만들어낸 케플러는 이것을 1597년에 발표한다. 지구를 포함한 6개의 행성의 궤도가 다섯 개의 기하학적 도형에 따라 차례대로 정해진 것이었다. 이 자체는 그다지 의미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여기에 더해서 그는 ‘행성은 태양에서 발생하는 힘에 의해 움직이며, 이 힘은 태양에서 멀어짐에 따라 줄어든다’는 매우 중요한 주장을 제기했다. 이는 행성의 움직임에서 물리적인 힘이 언급된 최초의 사례로, 그가 아니었다면 행성은 항상 일정한 각도로 움직인다고 여기던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지도 모른다.
프라하의 두 천문학자
1597년 티코 브라헤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보헤미아의 왕인 루돌프 2세의 궁정 천문가가 되어 프라하로 이주한다. 1600년, 드디어 케플러와 티코 브라헤가 만나게 되었다. 티코 브라헤가 엄청난 양의 관측 자료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를 효과적으로 다룰 수학적 능력이 없었던 반면에 케플러는 뛰어난 수학 실력이 있었지만 이를 적용할 관측 자료가 없었다. 완벽한 조합이었지만 둘 사이의 관계가 그다지 순탄치는 않았다.
티코 브라헤를 만난 후 케플러는 지금의 오스트리아에 있는 그라츠의 고향집으로 돌아갔고, 티코 브라헤는 케플러에게 루돌프 2세로부터 연구를 위한 자금을 얻어주기로 했다. 그런데 일이 진행되던 중 케플러가 몇몇 신교도와 함께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를 거부했던 사건 때문에 그라츠에서 추방되는 일이 일어나 케플러는 루돌프 2세에게 망명을 신청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황제는 케플러에게 연구비를 지원해주기로 하지만, 티코 브라헤를 도와 행성 운동을 추가적으로 관측하라고 주문했다. 황제는 이 관측 결과를 이용하여 《루돌프 표》각주1) 를 만들 계획이었다.
자신의 관측 자료를 한꺼번에 케플러에게 넘겨주기 싫었던 티코 브라헤는 자료를 조금씩 나누어 전달했다. 그러나 1601년 병석에 누우며 상태가 급속히 악화된 브라헤는 임종하면서 자신의 모든 관측 자료와 장비, 루돌프 표와 관련된 과제를 모두 케플러에게 넘겨주도록 했다. 몇 주 후, 케플러는 신성로마제국의 궁정 수학자의 지위에 오르며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천문 관측 장비들을 마음껏 다루게 된다. 고향에서 무일푼으로 추방되어 프라하에 온 지 불과 1년 만의 일이었다.
궁정 수학자의 임무 중에는 황제를 위해 점을 쳐주는 일도 있었으므로 케플러는 점성술이 완전히 사기라고 생각하면서도 이 일에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플러는 나머지 시간을 본연의 업무에 집중했다. 덕분에 그는 ‘행성은 태양 주위를 타원 궤도로 돌며, 태양은 타원의 두 초점 중의 한 곳에 위치해 있고 행성은 태양에 가까이 있을 때 더 빨리 움직인다’는 정말 중요한 발견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발견으로 곧바로 유명해지지도 않았고, 천문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도 못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우주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기 때문이었다. 오직 아이작 뉴턴만이 케플러의 연구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중력 개념을 적용해 행성이 타원 궤도를 돈다는 것을 설명한 뒤에야 케플러의 발견이 가진 중요성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엄청난 혼란과 비극적인 사건들 때문에 케플러는 연구를 중단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그의 부인이 사망한데 이어 어머니가 마녀로 몰려 몇 달이나 감옥에 갇혀 있다가 풀려났던 것이다.
1618년에 발견한 케플러의 제3법칙과 제4법칙에 따르면 행성이 태양 주위를 돈 시간의 제곱이 태양까지 거리의 세제곱에 비례한다. 예를 들어 화성은 지구보다 태양에서 1.52배 멀리 떨어져 있고 공전주기는 1.88년이므로 1.522 = 3.53 = 1.883의 관계가 성립한다. 1627년에 출간된 《루돌프 표(Rudolphie tables)》는 현대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천문학 자료집이라 할 수 있으며, 스코틀랜드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존 네이피어가 발견한 새로운 기법인 로그(logarithm)를 사용해 행성의 과거와 미래의 위치를 계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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