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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5~6세기경 인도의 것이다. 상키아 학파는 빛이 중추적인 원소를 만들어 내는 다섯 가지의 미묘하지만 기본적인 원소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반면, 원자론에 근거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던 바이셰시카 학파는 빛이 빠르게 움직이는 불 원자로 이루어졌다고 믿었는데 사실 이러한 생각은 현대의 광자(光子, photon)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원전 1세기에 작성된 인도의 힌두교 경전 《비슈누 푸라나(Vishnu Purana)》에서는 햇빛을 ‘태양의 일곱 가지 광선’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고대인들은 대상으로서의 빛과 감각으로서의 시각을 구분하지 못해서, 기원전 6세기에 그리스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눈에서 나온 광선이 마치 더듬이처럼 사물에 닿아서 물체를 인지한다는 ‘방출설(emission theory)’을 제시했다. 플라톤도 이와 유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엠페도클레스가 눈에서 나오는 불이라는 개념으로 언급한 기원전 5세기의 기록도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는 명백한 허점이 있었다. 눈이 횃불과 같은 역할을 한다면 어둠 속에서 왜 아무것도 볼 수 없을까라는 당연한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을 제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엠페도클레스는 눈에서 나온 광선이 햇빛이나 램프와 같은 다른 빛과 상호작용을 일으킨다는 다소 궁색한 이론을 내놓기도 했다.
가장 오래된 광학에 관한 문서는 그리스의 사상가인 유클리드가 쓴 것으로, 유클리드 또한 방출(emission) 이론을 받아들였다. 수학자로도 유명했던 유클리드는 광학에 기하학을 접목하기도 하고, 원근법을 수학적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그는 눈에 보이는 물체의 크기와 물체까지 거리의 관계를 토대로 반사의 법칙을 제시했는데, 이 법칙에 따르면 빛이 무엇인가에 부딪혀 반사될 때의 입사각과 반사각은 항상 같으므로 거울에서 물체까지의 거리와 거울에서 거울에 비친 상까지의 거리는 같다.
이로부터 약 300년 뒤에 그리스의 수학자 헤론은 빛이 한 가지 매질을 통과할 때는 항상 최단 거리로 전달된다는 것을 증명했다. 예를 들어 공기 중에서 빛이 방사되고 관측된다면 빛은 굴절되지 않는다. 거울을 이용하여 빛을 반사시킬 때도 이 법칙은 성립하며, 입사각과 반사각은 항상 같다는 것도 입증했다.
태양에서 오는 빛과 열은 미세한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원자는 태양에서 방출되는 순간 공기 중의 공간을 무한대의 속도로 직선으로 이동한다.
- 루크레티우스, 《만물의 본성에 대하여》, 서기 55년
빛을 알아가다
유럽 문화의 중추였던 고대 그리스 문명이 쇠퇴함에 따라, 물리학과 같은 학문적, 지적 탐구의 노력도 함께 위축되었다. 남아있던 소수의 그리스 학자들은 동쪽 지역각주1) 으로 옮겨가게 된다.
빛에 관한 최초의 실험은 그리스의 천문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가 당시 로마제국의 영토였던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에서 근무할 때 행한 실험이다. 이 실험에서, 빛이 공기에서 물로 투과할 때처럼 밀도가 작은 매질에서 큰 매질로 전해질 때 빛의 진행 방향이 두 매질의 경계선에서 수직 방향으로 꺾인다는 것이 밝혀졌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것이 밀도가 큰 매질일수록 빛의 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눈에서 빛이 나와 볼 수 있다는 방출설에 동조하기는 했지만, 빛에 대한 그의 견해는 눈에서 나온 빛과 눈으로 들어오는 빛이 똑같은 성질을 가진다는 것이었고, 이를 기반으로 빛과 시각에 대한 독자적인 이론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눈으로 사물을 본다는 것은 다만 빛이 눈으로 들어와 생기는 현상일 뿐, 눈으로 무엇인가를 내뿜거나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후로도 수백 년이 더 지나고 나서야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 중요한 발견은 1025년경에 (유럽에서는 알하젠(Alhazen)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던) 아랍의 학자 아부 알리 알 하산 이븐 알 하이삼에 의해 정리되었다.
그의 저술 《시야[(De aspectibus(On perspective)]》는 라틴어로 번역되어 중세 유럽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알 하이삼은 ‘만물은 모든 방향으로 빛을 내뿜으며 이것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다’고 주장했던 알 킨디와 같은 초기 아랍 과학자들의 연구를 기초로 광학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에 따르면 눈이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빛과 색깔을 알려주는 광선이 눈에 도달해 눈이 이를 감지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한 눈의 구조와 렌즈의 원리를 설명하고, 포물면 거울(오목 거울 종류)을 만들었고 빛의 굴절의 의미 또한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나아가 빛의 속도가 대단히 빠르기는 하지만 무한히 빠르지는 않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아부 라이한 알 비루니에 의해 빛이 소리보다도 훨씬 빠르다는 것이 처음 밝혀졌다.
알 하이삼의 연구는 쿠틉 알 딘 알 쉬라지와 그의 제자인 카말 알 딘 알 파리시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는데, 이들은 백색의 태양빛이 무지개 빛깔의 여러 가지 색으로 분리되는 현상을 정확히 설명했다. 비슷한 시기에 독일 교수 테오도릭은 물이 채워진 둥근 플라스크를 이용해 무지개의 원리를 밝히는 실험을 한다. 이 실험에서 그는 무지개가 태양광이 물방울에 입사되면서 굴절하고, 물방울 속에서 반사되어 공기 중으로 나오며 다시 한 번 굴절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 실험을 통해 물방울을 중심으로 태양과 관찰자 사이의 각도가 물의 전반사 임계각인 42도일 때 무지개가 나타난다는 것을 정확하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테오도릭은 2차 무지개가 나타나는 원인은 알아내지 못했다. 2차 무지개는 1차 무지개와 색깔의 순서가 반대인데, 그 원인이 물방울 내부에서의 2차 반사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로부터 300년 뒤 데카르트가 밝혀냈다.
이븐 알 하이삼(알하젠, c.965~1040)
페르시아의 바스라에서 태어난 알 하이삼은 신학 교육을 받은 뒤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불화를 해소하려고 애썼다. 이 노력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고, 그는 종교를 떠나 수학과 광학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광학과 관련된 그의 업적 대부분은 정신 이상을 이유로 10년 동안 카이로에 갇혀있던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가 실제로 정신 이상이었던 것은 아니고, 나일 강의 홍수를 대규모 토목공사로 막을 수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다 정치적으로 곤란해지자 일부러 미친 척 했던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는 공기 중에서 빛이 직진한다는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최초의 암상자(camera obscura)를 만들었다. 암상자는 상자의 한 쪽에 작은 구멍을 뚫고 구멍을 통해 들어온 빛에 의해 반대편 면에 상이 맺히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한 장치이다. 알 하이삼은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실험을 중요시했던 물리학자이자, 과학적 접근 방법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진실을 찾으려 한다면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며 과거의 문헌을 헤집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것들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스스로 의문점을 찾아내고 주장과 증거를 제시하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 이븐 알 하이삼
신의 빛
아랍 과학자들의 저술이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으로 퍼져나간 것은 주로 이슬람 문화권의 무어족이 스페인을 지배하던 시대의 일이다. 이때 영국의 로버트 그로스테스테와 영국의 스콜라 철학자 로저 베이컨과 같은 초기 유럽 학자들이 광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로스테스테가 활동한 시기는 유럽이 플라톤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아랍 문명의 덕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아베로에스, 아비첸나와 같은 학자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빛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그로스테스테가 아마 주교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겠지만, 그가 자연스럽게 떠올린 빛의 기원은 창세기 1장3절 ‘빛이 있으라’라는 구절이었다. 그의 생각에 창조라는 것은 빛의 덩어리가 수축과 팽창을 거듭하며 나타나는 물리적인 현상일 뿐이었으므로, 빛은 한 점의 광원에서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둥근 모습으로 스스로 무한히 만들어진다고 주장했다. 사실 그의 연구는 물리학이라기보다는 형이상학에 가깝긴 했어도, 빛에서부터 모든 것이 생성된다는 것을 전제로 연구를 펼쳐나갔다는 점에서는 매우 독창적이었다.
일례로 그로스테스테는 다음과 같은 말로 뛰어난 독창성을 보여주었다. ‘홀수와 짝수 그리고 자연수의 합들은 모두 무한대이다. 모두 무한대이지만 자연수의 합은 분명히 짝수의 합보다 크다. 자연수의 합에는 홀수의 합까지 더해지므로.’ 이로써 그는 최초로 다중 무한의 개념을 제시한 사람이 되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파리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로저 베이컨은 1247년부터 1267년에 걸쳐 그리스와 이슬람권에서 작성된 광학에 관한 거의 모든 자료를 검토한 뒤 《광학(Optics)》을 출간했다. 이후에는 자신의 광학 연구 내용을 기반으로 당시의 과학 교육에 들어가 있지 않은 내용까지 포함한 새로운 실험 과학 과정을 만들었다. 그리고 과학과 언어학 연구가 신학 연구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는데, 이는 로마가톨릭이 지배하던 당시 분위기에서 교회와의 충돌을 피해 보려는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교회는 이후로도 수백 년간 과학을 억압했을 뿐 아니라 교리에 맞지 않거나 성경의 내용에 어긋나는 과학적 진실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을 처형하는 데 서슴지 않았다.
처음부터 받아들여지진 못했던 아리스토텔레스
아랍 지역에 남아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은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에 전해졌다. 그러나 곧바로 교회의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니다. 파리 대학은 1210년, 1215년, 1231년에 걸쳐 아리스토텔레스의 책 《자연과학전집(Libri Naturales)》을 강의 금지 도서 목록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1230년 전후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대부분이 라틴어로 번역되자 파리대학도 더 이상 그의 책을 금기시하기 어려웠고,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은 대학의 필수 도서 목록에 포함되었다. 당시 파리에 머물던 로저 베이컨은 파리 대학의 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모습을 생생히 목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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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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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빛에 대한 최초의 탐구 – 물리학 오디세이, 앤 루니, 돋을새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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