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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이 광학 연구에서 실질적으로 의미 있는 연구결과를 내놓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서이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갈릴레이, 요하네스 케플러, 아이작 뉴턴과 같은 16세기와 17세기의 대표적인 과학자들이 역학과 광학 분야에서 새로운 발견을 거듭하며 2천 년을 버텨오던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을 허물었고, 이들이 확립한 과학적 토대는 이후 수백 년간 굳건하게 유지되었다. 이들 중 광학 분야에 크게 기여한 사람은 케플러와 뉴턴이다.
독일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케플러는 신이 세상을 ‘우아한 계획’에 따라 만들었을 것이므로, 과학적인 관측과 이성적 접근을 통해 이를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케플러는 천문학에서의 업적으로 더 유명하지만, 광학 분야에서도 광선의 시작점과 끝점을 알아내는 방법을 찾는 등 중요한 기여를 했다. 이 방법에 근거해 케플러는 동공으로 들어온 빛이 굴절되어 망막에 상이 맺힌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한 안경의 원리도 설명했는데, 이는 원리도 모르는 채로 300년이 넘게 사용되어 온 렌즈의 비밀을 밝혀낸 것이어서, 이 덕에 망원경이 널리 보급된 1608년에 이르러서는 망원경의 동작 원리를 정확히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케플러가 광학에 관한 연구를 발표한 것은 1603년으로 이때는 뉴턴이 태어나기 거의 40년 전이다. 최초의 천체 관측용 망원경은 영국의 레너드 딕스에 의해 1550년대 초반에 만들어졌지만(망원경의 발명이 가져온 것 항목 참조),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은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일 것이다.
갈릴레오의 망원경
갈릴레오가 베네치아에 머물고 있을 때 네덜란드 상인이 베네치아 공화국의 상원의원에게 망원경을 판매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네덜란드 상인을 제치고 자신의 망원경을 팔고 싶었던 갈릴레오는 필사적으로 망원경 제작에 매달려 단 하루 만에 훨씬 뛰어난 성능을 가진 망원경을 만들어 냈다. 두 개의 오목렌즈를 사용해 상이 거꾸로 보이던 다른 제품들과 달리, 갈릴레오의 망원경은 볼록렌즈와 오목렌즈를 결합하여 위아래가 바뀌지 않는 상을 보여주었다. 시제품을 본 상원의원은 네덜란드 망원경의 구매를 연기했고, 갈릴레오는 더욱 개선된 제품을 만들어 자신의 제품을 판매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파두아 대학의 종신 교수직도 확보할 수 있었다.
유리를 통해 보이는 선명한 모습
렌즈는 빛을 굴절시키는 도구로, 광학에서 가장 기본적인 도구이며 그 원리가 알려지기 오래전부터 사용되어온 물건이다. 남아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렌즈는 3천 년 전 앗시리아의 니므루드 렌즈로 수정을 이용해 만든 것이다. 바빌론이나 이집트, 그리스 등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렌즈가 확대경이나 햇빛을 모아 불을 피우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둥근 유리그릇에 물을 채워 렌즈의 용도로 사용했는데, 실용적인 유리 렌즈를 만드는 가공 기술은 중세에 이르러서야 개발되었다.
렌즈를 통해 사물을 바라본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로마의 작가인 플리니우스가 남긴 것으로, 네로 황제가 콜로세움에서 검투 경기를 볼 때 에메랄드를 통해 보았다는 일화를 언급하고 있다. 한쪽이 볼록한 수정 덩어리를 책을 보기 위한 돋보기로 이용한 것은 11세기 무렵부터이고, 가공된 유리 렌즈로 안경이 만들어진 것은 1280년경이지만, 이때도 안경의 원리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현미경과 망원경이 개발되기 시작하자, 보다 정밀하게 가공된 렌즈가 필요하게 된다. 렌즈 가공기술이 몇 세기에 걸쳐 발전함에 따라, 보다 성능 좋은 렌즈에 대한 수요도 함께 증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갈릴레오와 같은 르네상스와 계몽운동시대의 일부 과학자들이나 현미경의 선구자인 벨기에의 안토니 반 레벤후크, 네덜란드의 물리학자이자 천문학자인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같은 사람들은 직접 렌즈를 만들기도 했다.
에테르에 가해진 압력
시각의 원리를 포함하여 데카르트가 광학 분야에서 이룩한 연구의 성과는 망원경의 발달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데카르트는 반사와 굴절 같은 빛의 특성을 수학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기계론적인 접근 방법을 사용하여 상당히 성공적인 결과를 얻기는 했지만, 한편으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진공’ 개념을 부정한 것 때문에 곤란을 겪었다.
가상디처럼 진공 속에서 움직이는 원자라는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빛이란 그저 허공을 빠르게 움직이는 입자 뭉치일 뿐이므로 그다지 설명하기 어려운 대상이 아니었지만, 데카르트처럼 진공(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라는 개념을 부정하고 나면 빛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무언가 다른 설명이 필요해진다. 데카르트가 생각해낸 것은 가느다란 액체 줄기(결국 에테르와 마찬가지 개념)가 우주를 채우고 있고, 이것이 압력을 받으면 빛이 방출된다는 이론이었다. 태양이 이것을 밀어내면 그 압력이 즉각적으로 빛으로 바뀌어 눈에 전달되고, 시각이 이것을 태양으로 인식하는 것이었다. 그다지 그럴 듯한 이론은 아니었지만(특히 1억 5천만km나 되는 태양까지의 거리를 생각한다면 더더욱), 이 이론이 기여한 것은 오히려 다른 곳에 있다. 하위헌스와 뉴턴이 데카르트의 생각에 자극을 받아 나름의 이론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르네 데카르트(1596~1650)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stes)는 프랑스 투랭 지방의 소도시 라에에서 지방 정치인의 아들로 태어나 불과 한 살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과 과학을 공부하던 데카르트는 법조인의 길 대신 수학, 철학, 과학을 공부하며 자신의 생각을 키워나갔고, 식견을 넓히려 군대에 지원하여 복무하기도 했다. 이러한 삶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물려받은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현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가 생각해낸 직각 좌표계는 영국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에게서 ‘정밀과학 분야에서 이룩한 최고의 업적’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데카르트가 물리학 분야에서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우주를 물리학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기계와 같은 존재로 바라보는 기계론의 주창이었다.
데카르트는 어린 시절부터 예민했고 안락한 삶을 선호했다. 아침에도 늦게 일어났는데, 편안히 침대에 누워 있을 때가 일이 가장 잘 되는 시간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가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의 개인 교사가 되었을 때 여왕은 매일 새벽 5시에 추운 도서관에서 강의해주기를 고집했고, 결국 데카르트는 여왕의 개인 교사가 된 지 다섯 달 만에 폐렴으로 사망하게 된다. 불과 46세의 나이였다.
데카르트는 자신이 결혼생활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남자였던지라, 자신의 취향에 맞는 아름다운 여인을 찾았고, 자식도 낳았다(아마 둘이나 셋일 것이다). 자식의 처지에서 본다면 이런 가정환경을 타고난 것이 안타까운 일이기는 해도 아버지의 뛰어난 두뇌를 물려받은 것은 감사할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데카르트는 워낙 유명한 학자였기 때문에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은 앞을 다퉈 데카르트의 집을 방문했고, 데카르트가 어떤 기기를 사용하는지 보고 싶어 했다(당시에는 수학 연구에 각종 기기가 많이 사용되었고, 헨리 사빌 경이 지적했듯이 속임수도 많았다). 이런 방문객들에게 데카르트는 서랍에서 한쪽 다리가 부러진 컴퍼스를 꺼내서 보여주거나, 자를 대고 종이 접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 존 오브리, 《소전기집(Brief Lives)》 중
파리의 역사적 비행
카르테시안 좌표계라고 불리는 3차원 직각좌표계는 데카르트의 이름을 딴 것이다(‘deCARTES’IAN coordinate각주1) ). 데카르트는 1619년, 침대에 누워 쉬고 있다가 방 안을 날아다니는 파리를 보고 이 좌표계를 생각해냈다고 한다. 파리를 바라보던 데카르트는 특정한 순간의 파리의 위치는 파리와 가까운 두 벽까지의 거리와 바닥 또는 천정까지의 거리를 이용하여 표현할 수 있음(3차원 공간 좌표계를 이용하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순한 발견이었지만, 이를 이용하면 3차원 공간에 존재하는 어떤 형태나 곡선도 숫자를 이용하여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이르게 된다(예를 들어 포물선도 점을 연결하여 그릴 수 있다). 대수학을 이용해 기하학을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날 데카르트의 침실을 날아다니던 파리의 역사적인 비행 덕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빛의 제왕, 아이작 뉴턴
아마도 뉴턴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일 것이다. 과학이라는 분야에서 우리는 400여 년 이상 뉴턴이라는 거인의 어깨에 매달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뉴턴은 힘과 중력에 대한 연구(고전 역학의 탄생 항목 참조)로 유명하지만, 광학에서도 이에 못지않은 업적을 남겼다.
뉴턴은 백색광을 분리하여 여러 가지 색깔의 단색광으로 나누는 데 성공했으며, 다시 이들을 백색광으로 합치는 데도 성공해 백색광이 다양한 단색광의 혼합광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러한 사실은 실제로는 훨씬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구름이 렌즈 역할을 하기 때문에 무지개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알 하이삼도 같은 생각이었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도 그의 저서 《자연 연구서(Naturales quaestiones)》에서 햇빛을 프리즘에 통과하게 하면 무지개 색깔의 빛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뉴턴이 살던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색깔이 있는 빛은 백색광과 그림자가 섞여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데카르트는 빛 입자가 회전하면서 색깔이 나타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학문적으로 뉴턴의 라이벌이었던 로버트 훅은 색이란 빛에 색깔이 입혀진 것이라고(색유리창을 통한 빛처럼) 생각했다. 훅도 프리즘을 이용해 색을 분리하려고 시도했지만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경계선에만 약간 색이 나타날 뿐이었다.
자연과 자연법칙은 암흑 속에 있었다.
신이 ‘뉴턴이 있으라’ 하시자 모든 것이 밝아졌다.
- 알렉산더 포프, 1727
반면, 뉴턴의 시도는 성공적이었는데, 이는 뉴턴이 훅보다 조금 더 좋은 장비를 이용했다는 이유뿐이다. 뉴턴은 연구실 창문을 검게 가리고 바늘구멍을 내고선 이곳을 통해 들어온 빛을 정밀하게 가공된 프리즘으로 통과하도록 한 후 몇 미터 떨어진 스크린에 색깔별로 나뉜 빛이 나타나도록 했다. 다행히 프리즘과 스크린의 거리가 충분해 색깔이 선명하게 분리될 수 있었다.
뉴턴은 광학 실험을 위해 위험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끝이 뭉툭한 뜨개바늘로 자신의 눈알을 이리저리 눌러 안구가 변형되게 하면서 색깔 감각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알아보려 한 실험은 유명하다. 뉴턴은 붉은 옷은 붉은 색만 반사하기 때문에 붉게 보이고, 흰 옷은 모든 색을 반사하기 때문에 희게 보이는 것처럼 물체의 색깔이란 물체가 반사하는 빛의 색깔이라는 것을 밝혀냈을 뿐만 아니라, 빛은 색깔에 따라 각각 굴절되는 정도가 다르다는 것도 알아냈다.
과학에 대한 열정은 매우 뜨거웠지만, 인간적인 면모에서는 대하기도 어려운데다가 거만하고 까다롭기까지 한 사람이 뉴턴이었다. 뉴턴에게서 증오와 독설을 받은 사람은 많았지만, 특히 경쟁자였던 로버트 훅에 대한 적개심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내가 남보다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 뉴턴이 훅에게 보낸 공개서한 중에서(이 편지는 왕립학회가 둘 사이의 불화를 가라앉히려고 뉴턴에게 부탁한 것이다.)
뉴턴은 훅이 죽은 뒤 그의 발견을 도용해 물 위에 기름막이 있을 때 보이는 여러 색깔의 동심원 모양, 이른바 ‘뉴턴의 반지’라고 불리는 현상을 발표했다.
아마 로버트 훅이 뉴턴보다 일찍 죽지만 않았어도 뉴턴보다 더 유명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뉴턴은 자신의 광학 연구 내용을 담은 《광학(Opticks)》을 무려 30년간이나 출간하지 않고 있다가 로버트 훅이 죽자 기다렸다는 듯이 출간했는데, 아마도 그와 원작에 관한 논쟁이 벌어질까 우려한 때문이 아닐까한다.
뭉툭한 뜨개바늘을 눈꺼풀과 눈알 사이로 가능한 한 깊이 밀어 넣었다. 이리저리 눈알을 눌러서 다양한 형태로 눈알이 변형되게 하자 희고 검고, 다양한 색깔의 동그라미와 여러 모습의 형상이 보이는 것이 느껴졌다. 뜨개바늘로 눈알을 문지를 때는 동그라미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눈알을 누르면 동그라미가 약간 커지다가 눈알을 움직이거나 뜨개바늘을 빼면 사라졌다.
밝은 방에서 이 실험을 했을 때는 눈꺼풀이 빛의 일부를 차단해 더 크고 짙푸른 동그라미가 보였고, 안쪽에 같은 색깔의 동그라미가 보였다. 동그라미가 보이지 않는 부분에도 뜨개바늘로 눈알을 더 누르자 푸른 점들이 나타났고 희미하게 빛이 보였다.
- 뉴턴의 노트 중(케임브리지 대학 도서관 도서번호 CUL MS Add. 3995)
로버트 훅의 마이크로그라피아
로버트 훅의 가장 유명한 역작, 《마이크로그라피아(Micrographia)》는 1665년에 출간되었다. 광학의 발전이 빠른 속도로 다른 과학 분야, 특히 생물학과 천문학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이 책에 잘 드러나 있다. 훅이 최초로 현미경을 사용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가 과학 연구에 현미경을 도입함으로써 현미경뿐 아니라 망원경의 발전에까지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이 책에서 훅은 현미경으로 관찰한 사물과 유기물, 생체 조직의 모습을 세밀한 그림으로 보여준다. 그의 친구였던 영국의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이 그린 그림들은 매우 정교하게 그려져 있어 왜 이 책이 과학사적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책으로 꼽히는지 잘 말해준다. 17세기 영국의 해군장관 사무엘 핍스는 이 책에 대해 ‘새벽 2시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내가 읽어본 최고의 책이다’라고 일기에 기록했다.
파동일까 입자일까
과학자들은 백색광은 여러 가지 단색광이 혼합된 결과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렇다면 단색광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한편, 빛이 입자인가 파동인가에 대한 이론은 일찍이 인도의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유럽에서는 엠페도클레스를 시작으로 빛이 파동이라는 주장과 루크레티우스의 입자설이 수백 년 넘게 팽팽히 맞서왔다. 로버트 훅도 데카르트처럼 빛이 파동이라는 견해였던 반면에 뉴턴은 입자설을 지지했다. 안 그래도 사이가 나빴던 훅과 뉴턴은 여기서도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뉴턴은 1660년대에 가상디가 쓴 글을 읽고 난 뒤 입자설을 확신하고 있었고, 영국에서는 뉴턴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터라 최소한 영국에서는 꽤 오랜 기간 파동설이 지지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유럽 대륙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거만한 태도와 까다로운 성격 때문에 뉴턴은 유럽의 과학자들 사이에서 전혀 인기가 없었고, 심지어 뉴턴이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입자설에 흠집을 낼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뉴턴이 파동설에 반대한 것은 빛이 종파(longitudinal wave)라면 편광효과를 설명하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빛이 횡파(transverse wave)일 것이라는 생각은 못했다.
한편 뉴턴은 빛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에테르의 존재를 받아들였는데, 사실 뉴턴이 지지한 입자설에 의하면 입자는 빈 공간을 통과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에테르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뉴턴은 빛 입자가 ‘반사되기 쉬운 상태’와 ‘전송되기 쉬운 상태’의 두 가지 상태 모두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파동의 기본적 속성은 주기성인데, 이런 점에서 뉴턴은 양자역학의 출현을 예견했다고 볼 수 있다. (양자역학의 탄생 항목 참조) 일반적으로 뉴턴은 빛의 입자설을 지지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의 연구를 보면 그가 파동설과 입자설 모두를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회절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뉴턴은 빛 입자가 에테르 속에서 국지적인 파동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빛이 파동이면서 입자이기도 한 이중적 존재라는 현대 물리학의 관점과 매우 유사하다.
로버트 훅은 보통 키에 약간 구부정하고 창백한 얼굴에 머리가 매우 컸다. 회색 눈동자의 눈은 아주 큰데다가 튀어나올 듯한 모습이었고 시력은 좋지 않았다. 머리카락은 멋지고 부드러운 갈색 곱슬머리였다. 항상 차분한 행동에 적당한 식습관을 가졌다.
비범한 두뇌의 소유자일 뿐 아니라 성품까지도 매력적이었다. 창의성이 무척 뛰어났을 뿐 아니라 기억력도 상상을 초월했는데, 보통 어느 한 면이 뛰어나면 다른 부족한 면이 있기 마련인데 그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역학 분야에 있어 누가 뭐래도 당대 최고의 권위자였고, 산술적인 분야보다 기하학적인 분야에서 뛰어났다. 그는 독신인데, 아마도 내 생각에 결혼은 하지 않을 것 같으며 돌아가신 형의 외동딸이 훅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한마디로, 훅은 기품과 모든 미덕을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훅이 발명한 추시계는 다른 어떤 방식의 시계보다 유용한 물건이고, 또한 그는 나눗셈을 빠르게 할 수 있는 방법도 고안했다.
- 존 오브리, 《소전기집(Brief Lives)》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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