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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4년 케플러가 관측했던 초신성을 보고 나서 천문학의 길로 들어선 갈릴레오는 두말할 나위 없이 초기의 망원경을 효과적으로 이용한 사람이었다. 그는 초신성의 위치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근거로 초신성이 다른 별들과 마찬가지로 먼 거리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당시로써는 매우 뛰어난 성능의 망원경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광학의 발전 항목 참조)
1610년에는 30배의 배율을 가진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 4개를 발견하는데, 지금도 이 위성들은 ‘갈릴레오 위성’으로 불린다(목성의 가장 큰 위성 가니메데(Ganymede)는 중국의 간더(甘德)가 기원전 364년에 맨눈으로 발견했다). 갈릴레오는 처음에는 이 위성들이 목성 근처에 있는 항성이라고 생각했는데 관측을 계속할 때마다 위치가 바뀌었고, 이들 중 하나가 사라지자 이들이 목성의 주위를 도는 위성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것은 태양이나 지구 이외의 천체 주위를 도는 위성을 발견한 최초의 사례였고, 인류의 우주관에 미친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다. 목성의 위성이 추가로 발견된 것은 1892년이 되어서였고, 지금까지 63개의 위성이 발견되었지만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작은 위성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같은 해인 1610년, 갈릴레오는 화성도 달과 같이 지구에서 볼 때 모양이 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은 행성이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으며 태양빛을 받는 방향에 따라 보이는 부분의 모양이 달라진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이를 계기로 17세기 초반에 대부분의 천문학자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중심설을 포기하고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을 지지하게 된다.
갈릴레오의 업적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토성의 고리(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도 발견했다. 또한 은하수는 별들이 무리를 지은 것이며, 달의 크레이터와 산 그리고 태양의 흑점을 발견했고, 행성과 항성을 분명하게 구분했다. 항성은 멀리 떨어진 태양이라고 주장했으며 밝기를 근거로 지구에서 항성까지의 거리를 계산했다.
그의 계산에 따르면 가장 가까운 항성은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보다 불과 수백 배 멀리 떨어져 있었고 관측 가능한 항성들까지의 거리는 지구와 태양 사이 거리의 수천 배 정도였지만(물론 실제 거리에 비하면 턱없이 가깝게 계산된 것이다), 이 결과만으로도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에 반대하는 사람들로부터 그렇게 먼 곳에 별이 있을 수 없다는 조롱을 듣기에는 충분했다.
갈릴레오는 별들이 똑같은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 공간에 퍼져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확신을 했다. 1610년에 출판된 《시데레우스 눈치우스》각주1) 에서 망원경으로 관측하면 행성은 동그란 모습을 확인할 수 있지만 별은 여전히 점으로 보인다고도 언급했다.
해왕성도 관측하긴 했지만 해왕성이 행성이라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또한 독일의 천문학자 요한 파브리시우스, 영국의 토마스 해리엇과 비슷한 시기에 태양의 흑점을 발견하고 태양이 25일에 한 번 자전한다고 계산했는데, 흑점은 갈릴레오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목성 탐사선 갈릴레오
미국항공우주국이 1989년에 발사한 탐사선 갈릴레오는 1995년 목성 궤도 근처에 다다랐다. 목성까지 가는 중, 갈릴레오는 소행성 지역을 지나며 소행성 이다(Ida)의 위성 닥틸(Dactyl)을 발견했으며, 1994년에는 목성에 충돌한 슈메이커-레비9 혜성의 조각을 촬영하는데 성공했다. 목성에 충돌하기 전에는 목성의 대기권에서 시속 720km의 바람이 분다는 사실도 측정했다. 임무 수행 중 갈릴레오는 11개의 궤도에 진입했으며, 행성과 위성을 관측한 자료를 지구로 송신했다. 또한 목성의 위성 이오Io에서 화산이 폭발하는 장면과 얼음으로 뒤덮인 위성 가니메데(Ganymede)도 촬영했다. 갈릴레오 탐사선은 계획된 대로 2003년 목성의 대기권을 지나면서 소각되며 임무를 마쳤다.
신에게 맞서다
갈릴레오의 관측 결과는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지만 지오다노 브루노의 운명을 똑똑히 지켜보았던 갈릴레오는 연구결과의 공개를 두려워했다. 교회도 처음에는 갈릴레오의 연구에 관심을 가졌고 심지어 지원도 하려고 했다.
갈릴레오는 1611년 교황 바오로 5세를 만났고, 이어서 예수회(Jesuit)에 소속된 위원회의 수도사들을 만났다. 예수회는 갈릴레오의 여러 가지 발견 ― 은하수는 수많은 별들의 모임, 토성의 이상한 접시모양(그때까지는 고리라는 것을 몰랐다), 달 표면이 울퉁불퉁한 것, 목성의 네 개의 위성, 금성이 달처럼 모양이 변하는 것 등 ― 을 지지하고 있었지만, 그러한 발견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교황을 만나기 위해 로마를 방문하던 중, 갈릴레오는 세계 최초의 과학단체인 린체이 아카데미에 가입하고 자신을 위해 마련된 연회에서 새로 만든 장비에 ‘망원경(telescop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610년의 베스트셀러
갈릴레오는 《시데레우스 눈치우스(Sidereus Nuncius)》가 정식 출간되기 전의 인쇄본을 1610년 3월 13일 피렌체 법정에 보냈다.
그런데 3월 19일에 초판 550부가 모두 팔려나가고 곧바로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심지어 5년도 지나지 않아 중국어판까지 나올 정도였다.
교회와 갈릴레오 사이의 우호적 관계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갈릴레오는 흑점에 대한 설명을 담은 짧은 안내서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지지하는 그의 문서로서는 유일하게 출판된 것이었다. 1615년 로마를 방문했을 때, 교황청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검토한 후 ‘어이없고 멍청한 주장이며… 명백하게 교리에 어긋난다’라고 입장을 정리한 상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갈릴레오는 지동설을 주장하지도, 가르치지도 말아야 하며, 이에 응하지 않으면 종교재판에 회부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는다. 당연히 갈릴레오는 여기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몸을 사렸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랬다.
1629년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가상의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자기 이론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두 세계의 대화(Dialogue of the Two Chief World Systems)》를 출판했다. 이 책은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우호적으로 다루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서 교회의 허락을 받은 뒤에 나온 것이었다. 검열관은 서문과 결론 부분에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은 하나의 가설일 뿐이라는 내용이 명시되어야 한다고 요구했으나 구체적인 문장은 내용만 유지된다면 고쳐도 좋다고 허락했다.
갈릴레오는 수정한 서문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을 지지하는 심플리치오각주2) 라는 가공의 인물을 멍청이라고 놀렸는데, 이 때문에 교황 우르반 8세는 갈릴레오가 교회의 이름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퍼뜨리며 교회를 조롱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갈릴레오는 이단이라는 혐의(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잘못된 내용을 진실인 것처럼 가르친 죄)로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로마로 소환되었다. 재판 결과에 따라 화형에 처해질 수도 있다는 위협 앞에서 갈릴레오는 자신이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너무 확대해석했다고 인정했다.
재판 결과 갈릴레오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실제로는 1634년부터 1642년 죽을 때까지 가택에 연금되어 있었다. 말년에는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인 《새로운 두 과학에 대한 논의와 수학적 논증(Discourses and Mathematical Demonstrations Concerning Two New Sciences)》을 완성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현대적 개념의 과학서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에서 그는 과학적 접근법과 더불어 그동안 철학의 보조도구로 간주하여 왔던 수학과 실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현상을 분석하려는 태도를 촉구했다. 책의 원고는 이탈리아에서 비밀리에 반출되어 1638년 독일의 라이덴에서 출판되었다. 그 책은 이탈리아를 제외한 유럽의 전역에서 엄청난 인기와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갈릴레오가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돈다는 주장을 철회한 뒤 ‘(그래도) 지구는 돈다(Eppur si muove)’라고 혼자 중얼거렸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처음 나온 것은 그가 죽고 나서 100년이나 지난 뒤였고, 자신의 목숨이 달려 있는 종교재판정에서 이처럼 도발적인 언사를 내뱉었다는 것은 있기 어려운 일이다.
시대에 뒤떨어진 교회
갈릴레오의 책 《두 세계의 대화(Dialog of the Two Chief World Systems)》와 코페르니쿠스의 《회전에 대하여(De Revolutionibus)》는 1758년 지동설을 가르치는 것이 허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톨릭교회의 금서 목록에 남아 있었다. 1820년까지도 교회의 검열 당국은 지동설을 확고한 사실로 주장하는 책의 출판을 허가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항소가 받아들여져 1835년의 금서 목록에서는 갈릴레오와 코페르니쿠스의 책이 제외되었다. 이후 교회는 결국 갈릴레오에게 했던 일에 대해 사과하지만 그것은 놀랍게도 2000년의 일이었다. 201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갈릴레오의 종교재판이 교회가 저지른 지난 과오 중의 하나이며 늦었지만 사과한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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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위대한 천문학자 갈릴레오 – 물리학 오디세이, 앤 루니, 돋을새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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