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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원자를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몇몇 학자들은 원자를 분리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앙리 베크렐이 방사능을 발견한 이후의 연구는 여러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러더퍼드와 영국의 방사능화학자 프레데릭 소디는 함께 연구를 진행하여 1903년에 방사성 붕괴 이론을 내놓기에 이른다. 이들은 무거운 원소는 불안정하기 때문에 알파 입자(헬륨 원소)가 떨어져 나가거나 중성자 붕괴에 의해 중성자가 양성자와 전자로 분리되며 베타 입자(전자)를 방출한다고 주장했다. 어느 경우이든 원자핵 내부에 있는 양성자의 수는 변하게 되므로 원래의 원소가 다른 원소로 바뀌는 것이다.
이들은 소디가 1903년에 스코틀랜드의 화학자 윌리엄 램지 경과 함께 런던에서 연구한 결과에 근거하여 라듐이 붕괴되면서 헬륨이 만들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소디는 알파 입자를 방출하면 두 개의 양성자를 잃게 되므로 원소번호가 2 줄어들고, 베타 입자를 방출하면 원소 번호가 1 증가할 것으로 생각했다(중성자가 붕괴되면 양성자와 전자가 되고 전자는 방출되는데 양성자는 원자 내부에 남으므로 양성자의 수가 하나 증가할 것이기 때문에). 소디는 원소 번호는 같지만 질량이 다른 원소를 지칭하는 ‘동위원소(同位元素, isotope)’라는 용어도 만들어냈다.
1919년, 러더퍼드는 질소에 알파 입자를 쏘면 양성자 한 개(수소 핵)가 떨어져나가며 산소의 동위원소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은 원소를 다른 원소로 변화시킨 최초의 인공적 핵변환이었다. 연금술사들이 그렇게도 꿈꾸어왔던 것이었지만(연금술사들의 목표는 금속을 금으로 바꾸고자 하는, 보다 원대한 것이긴 했다), 이 발견은 연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대신 핵물리학계에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게 된다.
1920년에서 1924년까지, 러더퍼드와 채드윅은 대부분의 가벼운 원소는 알파 입자와 부딪히면 양성자를 방출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방법을 이용하면 사용된 양성자보다 훨씬 큰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 방법으로 에너지를 얻겠다는 것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다. 효율이 매우 떨어지는 방법이기 때문에, 원자력을 이용해 에너지를 얻겠다는 생각은 터무니없는 망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과학적 관점에서는 원자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의미는 있다고 본다.
- 원자력 에너지에 대한 어네스트 러더퍼드의 강연 중, 1933년 9월 12일자 타임즈
연쇄반응 다스리기
원소는 인공적으로 다른 원소로 변환시킬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엄청난 힘을 발생시킬 수도 있다. 원자폭탄이 폭발할 때 방출되는 에너지와 원자력 발전소에서 적절하게 조절되어 생산되는 에너지는 모두 붕괴되는 원자에서 방출되는, 입자가 다른 원자를 붕괴시키는 핵 연쇄반응에 의해 만들어진다.
졸리오퀴리 부부는 1934년 알파 입자를 특정 원소에 쏘아 불안정한 방사성 동위원소를 만들어내고 이들이 붕괴하면서 방사능을 방출하는 방식으로 인공 방사능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는 이것을 발전시켜 느린 속도의 중성자를 이용해 보다 효과적으로 인공 방사능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우라늄에 중성자를 쏘는 실험에서 페르미는 새로운 원소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헤스페륨(Hesperium)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1938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과학자 네 명은 페르미가 한 것이 실제로는 우라늄 원자핵을 대략 두 개로 쪼갠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는데, 이것이 바로 핵분열이다.
헝가리 출신의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는 핵분열에 의해 튀어나온 중성자가 다른 원자에 부딪히면서 동일한 반응을 일으켜 연속적인 핵분열 상태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실라르드는 런던에 머물 때 타임스 지에 실린 기사에서 러더퍼드가 원자력은 실질적으로 이용되기 어렵다는 주장을 펼친 것을 보았다. 그는 이를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일하고 있던 성 바톨로뮤 병원으로 출근하던 중 실라르드는 신호등이 바뀌는 것에서 핵 연쇄반응의 실마리를 찾았으며 이듬해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특허로 등록했다. 연쇄반응과 원자로의 특허(페르미와 함께)를 갖고 있었지만 1936년 영국 해군에게 특허를 양도했던 실라르드는 원자폭탄 개발에 있어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프레데릭 졸리오퀴리가 1939년 실험을 통해 핵 연쇄반응을 입증한 후, 여러 나라(미국, 영국, 프랑, 독일, 소련)의 과학자들이 핵분열 연구를 위한 연구비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최초로 동작한 원자로는 원자폭탄 제조에 필요한 플루토늄 생산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시카고-파일-1호기로 1942년 12월에 가동을 시작했다.
스위치를 켜자 섬광이 번쩍였다. 잠시 그것을 응시하다 스위치를 끄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세계가 슬픔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 레오 실라르드, 1938년 맨해튼의 콜롬비아 대학 실험실에서 우라늄을 이용한 연쇄반응에 성공한 후
세계는 자유를 얻었을까
레오 실라르드는 영국의 소설가 H. G. 웰스가 1914년에 발표한 소설 《자유로운 세계(The world set free)》에 등장하는 세상을 파괴해버린 ‘원자폭탄’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웰스가 창작한 가상의 폭탄인 원자폭탄은 며칠 동안이나 쉬지 않고 폭발을 계속한다.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실라르드는 핵 연쇄반응을 이용해 원자폭탄을 만들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1938년 미국으로 이주한 실라르드는 1년 뒤 아인슈타인을 설득해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프랭클린 루즈벨트에게 나치 독일보다 앞서서 원자폭탄 개발을 촉구하는데 참여하게 하고, 그 결과 2차 대전 중의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실라르드는 원자폭탄이 웰스의 소설에서처럼 실제로 사용될 것을 기대했던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효과적인 위협수단이 되어 세계를 지켜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원자폭탄 개발의 주도권이 점차 군으로 넘어가게 되자 실라르드는 정신적으로 심한 압박을 받았다. 그는 실제로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말고 실험을 통해 폭탄의 위력을 일본에 보여주어 항복을 얻어내자고 주장했지만 미국 정부는 그의 의견을 무시한다. 결국 원자폭탄은 1945년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되고, 엄청난 파괴와 수많은 사망자가 생겼다. 전쟁이 끝난 후, 실라르드는 핵무기로 인한 공포와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을 정확하게 예측했다. 이후 그는 핵물리학을 떠나 분자생물학자로 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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