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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파동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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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파의 존재를 예견한 것은 맥스웰이었지만, 전파를 실제로 확인한 사람은 독일의 물리학자 하인리히 루돌프 헤르츠였다. 헤르츠는 1888년 자신의 연구실에서 4m의 파장을 갖는 전자기파를 만들어냈으나 자신의 발견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업적이 미칠 영향이 어느 정도일 것 같냐는 질문을 받자, ‘아무런 영향도 없을 거라고 본다’라고 답할 정도였다. 그는 전파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전파가 특정한 매질을 통해 전달 혹은 반사된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전파의 발견은 맥스웰의 이론이 옳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것이었고, 뒤이어 X-선, 적외선, 자외선, 감마선과 같은 다양한 전자기파가 발견되었다.

X-선은 새로운 형태의 에너지였다. 독일의 물리학자 빌헬름 콘라드 뢴트겐이 1895년에 이를 발견하고 X-선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X-선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뢴트겐이 아니라 1875년의 요한 빌헬름 히토르프였다. 그는 크룩스관(Crookes tube)의 발명자이기도 하다. 크룩스관은 진공 상태의 관에서 방전으로 전자가 양극과 음극 사이에서 이동하는 초기 형태의 음극선관(陰極線管, cathod ray tube)이다. 음극선관은 발명자인 독일의 물리학자 칼 페르디난트 브라운의 이름을 따서 ‘브라운관’이라고도 하며 PDP나 LCD 같은 평면 디스플레이가 보편화되기 전까지 영상 표시장치는 모두 브라운관이었다.

히토르프는 사진판을 크룩스관 근처에 두면 일부 사진판에 그림자가 나타나는 것을 보았지만 원인을 찾지는 않았다. 이 밖에도 뢴트겐이 부인의 손을 찍은 유명한 X-선 사진으로 X-선의 원리를 밝히기 전에 사실 X-선을 접해 볼 기회가 있었던 과학자는 여럿이었다. 뢴트겐이 죽은 후 그의 연구 노트가 모두 불태워졌기 때문에 그가 정확히 무엇을 연구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형광물질인 바륨 플라티노시아나이드(barium platinocyanide)를 칠한 화면과 검은색 외피로 둘러싸인 크룩스관을 활용해 음극선관을 만들어내려 했던 것 같다. 뢴트겐은 화면에 푸른색 점이 표시되도록 하는데 성공했는데, 일부의 전파는 화면을 뚫고 나오면서 화면이 빛을 내도록 만든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후 두어 달 동안 이 현상을 연구한 후 그 결과를 발표했던 것이다.

전혀 쓸모는 없다··· 이건 단지 맥스웰이 옳았고, 대단하다는 걸 보여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신비스런 존재인 전자기파가 있다는 것은 확인했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 하인리히 헤르츠, 1888년에 전파를 발견하고 난 뒤

최초의 전등
전기가 최초로 대중에게 공급된 사례는 1881년 영국 서레이의 고달밍에 가로등이 설치된 것이다. 웨이 강에 설치된 수차(水車)로 독일 지멘스사의 발전기를 돌려 시내의 아크등을 밝혔고 몇몇 상점과 건물에도 전기를 공급했다.

방사능의 발견

프랑스의 물리학자 앙리 베크렐은 1896년 X-선이 크룩스관의 밝은 부분에서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형광물질이 X-선을 방출할 수도 있다고 짐작했다. 자연사 박물관의 교수로 있던 베크렐은 연구를 위해 다양한 형광물질을 이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연구 결과 형광 물질들은 태양광을 어느 정도 흡수한 후에는 어둠 속에서 빛을 방출한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검은 종이로 사진 건판을 감싸서 빛이 들어가지 못하게 한 뒤 형광 소금이 담긴 접시 위에 놓아두면 형광물질에서 나온 빛이 건판에 기록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진 건판과 접시 사이에 금속 물체를 놓으면 이 물체의 그림자가 촬영되었고 이는 마치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한 것과 마찬가지의 현상이었다. 이어진 실험에서는 실험 장치를 햇빛이 드는 곳에 두었다.

뢴트겐 부인의 손을 찍은 최초의 X-선 사진. 결혼반지가 뚜렷하게 보인다.

ⓒ 돋을새김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프랑스 파리의 날씨는 며칠씩 지속해서 햇빛이 나지 않음에도, 베크렐은 실험을 계속했다. 사실 그는 실험 결과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실험에는 우라늄 가루를 이용했는데 여기서 X-선이 나온 것 같았고, 이것은 마치 없던 에너지가 만들어진 것과 마찬가지여서 처음엔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어긋나는 현상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연구를 계속한 베크렐은 방출된 선이 X-선과는 다르며 자기장에 의해 굴절될 수 있다는 것과 대전된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베크렐의 연구는 여기까지였고, 폴란드의 실험물리학자인 마리 퀴리가 그의 연구를 이어받아 발전시켰다.

마리 퀴리는 우라늄에서 방출되는 방사선을 주제로 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우라늄을 추출하는 원광석인 역청 우라늄광이 순수한 우라늄보다 방사성(放射性)이 높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무엇인가 우라늄보다 방사성이 높은 물질이 원광석에 들어있다는 의미가 분명했다.

그녀는 남편인 피에르 퀴리와 함께 이 물질(폴로늄과 라듐)을 분리해내는 데 성공한다. 발견은 1898년이었지만, 엄청난 양의 원광석에서 0.1g의 라듐을 분리해내기까지는 4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피에르 퀴리는 1g의 라듐을 이용해 1과1/3g의 물의 온도를 섭씨 0도에서 100도로 올리는 데 한 시간이 걸리지 않으며, 이것을 끊임없이 반복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마치 무한한 에너지를 찾아낸 것과 같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그러나 퀴리 부부는 방사능 에너지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방사능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 결과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캐번디쉬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뉴질랜드계 영국인인 과학자 어네스트 러더퍼드에 의해 이루어졌다.

어네스트 러더퍼드

ⓒ George Grantham Bain Collection (Library of Congress)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러더퍼드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최초로 ‘학생 연구자’로 임명된 사람이었다(보통은 학위를 받아야 연구자의 지위를 얻는다). 러더퍼드가 뉴질랜드에서 영국으로 온 것은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하고 두 달 뒤였는데, 그가 장학금을 받은 것은 실력도 받쳐줬지만 운도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최종 장학금 수상 후보 두 명 중의 한 명이었지만 장학생으로 선발되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후보가 장학금 신청을 철회하는 바람에 운 좋게 장학금을 탈 수 있었다. 전파 연구에 몰두했던 러더퍼드는 마르코니보다 앞서 장거리 전파 전송을 실현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돈벌이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연구를 상업적으로 발전시킬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방사능과 관련된 연구를 시작한 러더퍼드는, 베크렐이 발견한 방사선이 두 가지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알파선은 종이나 몇cm의 공기층만 있어도 차단되는 반면에 베타선은 훨씬 더 침투력이 강했다.

1908년, 러더퍼드는 알파선이 (헬륨 원자에서 전자가 떨어져 나간) 알파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성공한다. 베타선은 빠르게 움직이는 전자에 의한 것으로, 음극선관과 유사하지만 훨씬 더 큰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1900년에 러더퍼드는 세 번째 유형의 방사선을 발견하고 감마선이라고 이름 붙였다. X-선과 마찬가지로 감마선도 전자기파의 일종이며, X-선보다 파장이 짧고, 매우 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이제 러더퍼드의 연구는 원자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단계에 이르렀다.

감마선에서 장파(長波)에 이르는 전자기파의 주파수대역

ⓒ 돋을새김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원자를 찾아서

19세기를 거치며 열역학 분야에서 열 입자론이 폐기되자, 오스트리아의 루드비히 에두아르트 볼츠만이나 영국의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같은 물리학자들은 열이란 입자(비록 입자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고 있었지만)의 속도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열이나 전기의 전달은 원자론적인 접근을 하지 않으면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봐야 한다. 도체를 통해 전기가 전달되려면 전자가 원자 사이로 움직여야 하고, 전도나 대류에 의해 열이 전달되려면 입자가 이동해야 한다. 20세기에 들어서며 원자론이 받아들여진 것은 원자의 내부를 들여다볼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였고, 에너지란 무엇이며 어떤 방법으로 전달되는지를 이해하는 첫 단추였다.

베크렐 집안이 독식한 자리
프랑스 자연사 박물관의 물리학 교수 자리는 사실상 세습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직책은 1838년에 앙트완 베크렐각주1) 을 위해 만들어졌는데 1948년 베크렐 집안에서 이 자리를 물려받을 남자가 없을 때까지 계속해서 베크렐 집안의 남자가 맡았기 때문이다.

마리 퀴리(마냐 스클로도프스카, 1867~1934)
폴란드가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마냐 스클로도프스카는 고국에서 대학 교육을 받을 기회를 찾기 어려웠다. 공부를 위해 파리 소르본 대학으로 간 그녀는 자성체(磁性體)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던 피에르 퀴리를 만나서 결혼한다. 그녀는 ‘우라늄 선(線)’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 중이었지만, 임신으로 논문은 잠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연구에 복귀한 뒤에도, 연구실에 여자가 있는 것을 극도로 꺼렸던 당시의 분위기 때문에 허름한 헛간에서 연구해야만 했다. 1898년 우라늄 광석에서 알 수 없는 방사성 물질을 분리하는 연구를 시작했는데, 남편인 피에르 퀴리는 부인의 연구를 돕기 위해 자신의 연구를 포기했다.

퀴리 부부는 두 가지의 방사성 물질을 발견했고 각각 폴로늄(폴란드의 이름을 딴 것)과 라듐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업적으로 1903년에 퀴리 부부는 노벨상을 수상했는데, 이때의 공동 수상자가 앙리 베크렐이다. 불과 3년 뒤, 파리에서 피에르 퀴리는 길에서 넘어지며 마차에 머리를 치어 사망하는데, 아마도 방사능 피폭으로 인한 현기증 증세를 보였던 것 같다. 1934년엔 마리 퀴리도 방사능으로 인한 백혈병으로 사망한다. 그녀의 연구노트는 방사능에 심하게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도 납으로 만들어진 금고에 보관되어 있다. 그녀는 노벨상을 두 번 받은 유일한 여성이기도 하다(두 번째 수상은 1911년에 받은 노벨 화학상으로 역시 방사능에 대한 것이다).

마리 퀴리(마냐 스클로도프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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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루니 집필자 소개

1967년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대학에서 중세 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케임브리지 대학과 뉴욕 대학에서 중세 영어와 프랑스 문학을 가르쳤으며, 지금은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과학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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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 오디세이
물리학 오디세이 | 저자앤 루니 | cp명돋을새김 도서 소개

원자론의 개념을 처음 제안했던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그 후 아랍의 과학을 거쳐 르네상스, 계몽주의 시대 그리고 마침내 우주 물질의 기원을 밝힌 현대의 과학에 이르기까지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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