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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물리학 오디
세이

물리학의 역사

다른 표기 언어 동의어 우주라는 책
우주라는 책은 우선 그것을 작성한 언어를 이해하는 법을 배우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다. 이 거대한 책은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여 있으며 수학을 표현하는 문자는 삼각형이나 원을 비롯한 그 밖의 기하학적 도형들이다. 이것들 없이 인간은 우주의 언어를 단 하나도 이해할 수 없다. 깊이 탐구하려 해도 영원히 어두운 미로를 헤매게 될 것이다.
- 갈릴레오 갈릴레이, 《분석자(The Assayer)》, 1623

물리학은 모든 과학의 토대가 되는 기초 과학이다. 이 도구를 이용해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탐구한다. 좁게는 원자보다 작은 미립자에서 넓게는 은하의 움직임까지 아우르는 우주의 움직임이 물리학을 통해 그 실체를 드러낸다. 지금까지 인류가 이룩한 여러 가지 업적 중 우주에 대해 알아낸 것들이야말로 가장 빛나는 성취라고 할 만하다. 우주라는 책을 읽기 위해 인류가 시도했던 것들과, 앞서 르네상스 과학자인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설파했듯 수학이라는 언어를 기초로 ‘우주’를 이해해보려 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우주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가도 함께 깨닫게 될 것이다. 현재의 물리학은 겨우 우주의 4%만을 다루고 있을 뿐이며, 나머지 96%는 여전히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다.

물리학의 탄생

과학자를 ‘자연 철학자’라고 부르던 시대에는 자연 현상을 설명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누가 어떤 이론을 제시해도 이를 증명할 만한 적절한 실험 방법을 찾기 어려웠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천체의 움직임을 보고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모든 천체는 지구 주위를 돈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오로지 이성에 의한 사고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소수는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이들은 당시 사람들이 당연시하는 보편적인 상식에 대해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도록 충분히 설득력을 갖춘 이론을 제시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 2천여 년을 보내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온갖 조롱과 박해까지 감수해야 했다.

우리 은하에서 가장 가까운 안드로메다 은하의 모습

물리학은 시간의 기원에서 우주의 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탐구한다.

ⓒ Shutterstock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사실 미신과 종교적 믿음이라는 것은 대부분 논리적 근거는 결여된 채 눈에 보이는 현상을 그럴듯하게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면,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은 태양을 싣고 달리는 신의 마차가 매일 동쪽에서 서쪽으로 달리기 때문이라는 식이다. 하지만 과학은 다르다. 과학은 현상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원인을 밝혀내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처음으로 미신이나 전설 대신 스스로 관측한 결과를 바탕으로 자연현상의 원인을 찾으려고 했던 사람들이다.

물리학의 주제는 자연을 구성하는 형상, 형태, 수와 같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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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믿음을 배제하고 자연 현상을 설명하려 했던 최초의 사람은 아마 탈레스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경험적으로 확인하고자 했던,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과학자로 불릴 만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로, 정교한 관측을 통해 자연의 법칙을 알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연역적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던 스승과는 달리 현상을 관찰함으로써 법칙을 이끌어 내는 귀납적 사고를 선호했던 그는 이성적 사고를 통해 우주의 신비를 풀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과학적 접근법의 효시로 간주할 만하다.

중세에 그려진 탈레스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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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든 이론은 실험으로 입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관찰과 측정 결과에 근거한 이성적 사고를 통해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분명하다. 그런 면에서 그가 남긴 문헌들은 주의 깊게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최초로 과학을 별도의 분야로 독립시킨 이들도 그리스인들이었다. 당시 그리스 문화권이었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소장도서 목록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했던 문헌 검증에 필요한 자료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밀레투스의 탈레스(c.624~546BC)
2천5백 년 전 지금의 터키 영토인 밀레투스(Miletus)에 살았던 탈레스(Thales)는 최초의 과학자 혹은 철학자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다. 탈레스는 이집트에서 공부했고, 수학과 천문학을 처음으로 그리스에 들여왔다. 고대 그리스의 일곱 현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히며, 매우 현명한 사람으로 존경받았다. 또한 피타고라스와 아낙시만더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탈레스는 세상이 초자연적인 힘이 아니라 물리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고 주장했고 그 원리를 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그의 저술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실제로 그가 찾아낸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경험에서 실험으로

당시 문명의 정점에 있던 고대 그리스의 헬레니즘 시대가 저물자, 자연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이해하려던 접근 방식은 아랍의 과학이 부흥하는 7세기 전까지 찾아보기 어려웠다. 아랍의 위대한 학자인 이븐 알 하이삼은 현대의 과학적 접근 방법과 유사한 체계를 고안해냈다.

그가 제시한 방법은 우선 풀고자 하는 문제를 서술하고 실험을 실행한 뒤, 실험에서 얻어진 자료를 바탕으로 결론을 얻는 것이었다. 그는 문제를 다룰 때 결코 섣불리 결과를 예측하지 않았고, 측정과 분석의 정확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고 있었다. 아랍 세계가 과학에 공헌한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아부 라이한 알 비루니는 측정 방법이나 측정자의 잘못으로 측정값에 특정한 오차가 포함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따라서 측정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여러 번 측정을 반복해 결과를 얻어야 한다는 점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또한, 과학적 동기에서가 아니라 의료 사고 시의 책임 회피를 위한 의도이긴 했지만, 의사였던 알 라위는 치료법과 절차를 문서화하고 다른 의사들도 그 문서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한편, 아부 자비르(유럽에서는 지베르(Geber)라고 불림)는 화학 분야에 대조 실험(對照實驗)을 처음으로 도입했고, 이븐 시나는 귀납적 사고와 실험이 연역적 접근 방식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아랍의 과학자들은 의견을 모아서 결론에 이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지지를 받지 못한 비주류의 생각은 배제하려는 태도를 취했다.

귀납적 추론과 연역적 추론
연역적 추론은 플라톤이 즐겨 사용한 방법으로, 위에서 아래로 논리를 전개해 나가는 방식이다. 과학적, 철학적 이론을 세우고 그 이론을 논증하기 위한 가설을 만든 다음 이를 검증하여 이론이 옳거나 옳지 않음을 확인하는 식이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귀납적 추론은 관찰 결과를 설명할 수 있는 체계적 가설을 세우고 최종적인 이론을 구축해 나가는 방법이다. 아이작 뉴턴은 과학적 사고를 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방법이 모두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챈 최초의 사람이다.

하지만 이슬람교가 아랍 세계를 뒤덮자 아랍의 과학자들은 어려움에 직면했다. 자연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 것은 신에게로 다가가는 길을 파헤치거나 신성함에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불경스러운 행동으로 여겨졌으므로 신앙심이 깊고 사려 깊은 아랍의 과학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과학적 탐구는 이슬람 과학자들의 손을 떠나 기독교 문명의 중세 유럽 학자들에게 넘어오게 된다.

나는 페르시아의 왕이 되기보다 어떤 한 가지 사실의 진정한 원인을 찾아내고 싶다.
- 데모크리토스(그리스 철학자)

아랍의 과학적 업적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저작물들은 라틴어로 번역되어 중세시대 초기부터 유럽에 전해지기 시작했다. 12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학자들은 아랍에서 전해진 초기 단계의 과학적 접근법을 기반으로 새로운 탐구를 시작했고, 처음부터 기존의 이론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해내려 온 문헌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의혹을 품었던 사람들은 여럿 있었다. 특히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사였던 로저 베이컨은 기존의 이론들을 다시 검토하고 필요하다면 수정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특히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검증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연구 결과를 스스로 재검토해야 했다면 틀림없이 경험적 방법을 사용했을 테지만, 베이컨은 관찰에 의해 얻어진 결과를 토대로 가설을 세우고 이를 입증하기 위한 실험을 수행하는 방법을 택했다. 반복된 실험을 통해 자신의 방법에 확신을 갖게 된 베이컨은 이 과정을 상세하게 기술하여 다른 과학자들에게 검토를 요청했다. 그는 실험이란 ‘자연을 성가시게 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무엇인가를 알고 싶다면 실험처럼 자연을 우아하게 괴롭히는 방법보다는 끈기 있는 관찰이 훨씬 효과적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과학적 접근이란 측면에서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 또 다른 베이컨도 있다. 변호사이자 철학자였던 프랜시스 베이컨은 1621년에 출간한 《새로운 과학 연구방법(Novum Organum Scientiarum)》에서 과학 연구의 새로운 접근방법을 제시했다. 베이컨은 실험을 통해 서로 부딪치는 다양한 이론들을 정리하고 자연의 진실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과학적 사고는 귀납적인 추론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가 주창한 관찰, 실험, 분석 그리고 귀납적 추론과 같은 방법들은 현대적인 과학적 접근방법의 시초로 여겨진다. 그의 접근법은 일반적인 관념이나 관습적 선입견을 무시하는 지극히 객관적인 관점에서 출발해 탐구와 실증을 거치는 귀납적 논리를 추구하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과학적 방법
오늘날의 보편적인 과학적 방법의 절차는 다음과 같다.

1. 풀고자 하는 문제를 정의한다. 가능하면 실험을 통해 입증할 수 있도록 한다.
2. 가설을 세운다.
3. 가설을 검증하기 위한 실험방법을 고안한다. 실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수는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4. 실험을 수행한다. 관측 및 측정 결과를 기록한다.
5. 결과를 분석한다.
6. 결과를 제시한다. 실험에 참여하지 않은 동료 전문가가 상호 검토한다.

과학 혁명

과학적 탐구 방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인물은 프랜시스 베이컨이지만, 그보다 앞서 갈릴레오가 이미 비슷한 방법을 사용했다. 갈릴레오는 귀납적 사고를 매우 선호했는데, 그는 복잡한 현실 세계에서 실험과 같은 경험적 시도를 통해 얻어지는 결과가 자연 현상을 단순화시킨 이론으로는 결코 완벽하게 설명되기 어렵다는 것을 간파했다. 예를 들어 자유 낙하 실험에서 공기 저항이나 마찰과 같은 변수들을 모두 고려한 실험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험 방법이나 측정 방법을 표준화한다면, 특정한 한 사람에 의해 실험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실험을 동일하게 반복해 얻은 결과로 신뢰할 만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가 피사(Pisa) 대학에 있을 때인 1611년, 라이벌이었던 교수와 논쟁이 붙은 적이 있었다. 재질이 같은 물체라도 형태가 다르면 부력(浮力)이 다를 것인가에 관한 논쟁이었는데, 결국 공개 실험을 통해 결론을 내기로 했다. 이 실험으로 갈릴레오의 주장이 틀린 것으로 확인된다면 그의 명성에 큰 흠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이 실험을 통해 오랜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 공개 실험 장소에 라이벌 교수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1626년, 최초의 냉동 닭 제조 실험 때문에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 경은 내과의사인 위더본 박사와 함께 차가운 겨울 공기를 뚫고 런던의 하이게이트로 가는 중이었다. 길에 쌓인 눈을 보던 그는 소금처럼 눈으로도 고기를 저장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즉시 실험을 하기로 결정했고, 마차에서 뛰어내려 힐게이트 언덕 아래에 있는 가난한 여인의 집으로 향했다. 그들은 암탉 한 마리를 사서 그 여인에게 내장을 다 빼달라고 한 후 그 속을 눈으로 채웠다. 작업을 직접 도왔던 베이컨 경은 눈 때문에 심한 한기를 느꼈고 곧바로 심하게 앓게 되었다. 그 후 2~3일간 심한 감기를 앓았으며, 홉스 씨의 말에 따르면 호흡 곤란으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 존 오브리, 《소전기집(Brief Lives)》 중

과학 학회

과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유럽에서는 17세기경부터 과학 토론이나 실험, 실험 방법의 개발과 같은 것에 관심을 가진 과학자들의 모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최초의 과학 단체는 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피렌체의 부호 페데리코 체시의 후원으로 창립된 린체이 아카데미(Academia dei Lincei)였다. 체시는 불과 18세 때 ‘과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에 의지하지 않고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인물이다. 초기의 회원들은 당연히 체시가 살던 피렌체 주변의 과학자들이었는데, 체시는 이들에게 연구에 필요한 서적과 훌륭한 연구실을 지원해주었다. 네덜란드의 의사인 요하네스 엑크, 이탈리아 학자 지암 바티스타 델라 포르타 등이 주요 회원이었고, 갈릴레오도 이 모임의 회원이었다.

이 모임의 전성기에는 전 유럽에 걸쳐 32명의 회원이 있었다. 1605년에는 모임의 목적을 ‘사물에 대한 지식을 평화적으로 얻고 이를 공개하며 (중략) 다른 의도를 갖지 않는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체는 가톨릭의 교리에 반하는 흑마술을 추종한다는 이유로 많은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각주1)

린체이 아카데미는 체시 개인의 후원에 의존했기 때문에 1630년에 체시가 죽자 더는 지속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린체이 아카데미는 갈릴레오의 제자였던 에반젤리스타 토리첼리와 빈첸조 비비아니가 1657년에 피렌체에 세운 ‘실험 아카데미’라는 새로운 단체에 의해 계승된다. 하지만 실험 아카데미 역시 오래가지 못하고 겨우 10년 뒤인 1667년에 문을 닫는다. 이때 이미 과학 연구의 중심은 이탈리아에서 영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와 같은 유럽 중북부로 옮겨지고 있었다.

가장 영향력이 컸던 과학 단체는 아마 런던에 설립된 ‘왕립 학회(Royal Society)’였을 것이다. 이 단체는 공식적으로는 1660년에 발족했지만, 실질적 시작은 과학자들이 이미 지속적인 모임과 토론을 가졌던 1640년대였다. 12명의 창립 회원 중에는 영국의 건축가인 크리스토퍼 렌 경과 아일랜드의 화학자인 로버트 보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젊은 시절의 로버트 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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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총회에서 렌 경은 학회의 설립 목적을 ‘물리학과 수학 실험을 통한 탐구’라고 선언했고, 로버트 훅이 매주 진행되는 실험과 토론을 주관하기로 했다. 왕립 학회라는 이름이 처음부터 사용되었던 것은 아니고, 문서로는 1661년부터 왕립 학회라는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후 1663년에 당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자연에 관한 지식 증진을 위한 런던 왕립 학회’라는 명칭을 인가받았고, ‘왕립 학회’라는 명칭을 부여받은 최초의 단체가 되었다. 1661년부터 도서관을 시작으로 과학 표본 박물관을 산하에 두었다. 로버트 훅이 현미경으로 관찰했던 슬라이드는 지금도 왕립 학회의 소유이다. 1662년에는 도서 출판권도 얻었는데, 최초로 발간한 두 권의 책 중 한 권이 훅이 쓴 유명한 《마이크로그래피아(Micrographia)》이다. 1665년에는 지금까지도 계속 출간되고 있는 가장 오래된 과학 학회지 《철학회보(Philosophical Transactions)》를 펴내기 시작했다.

로버트 훅의 당시 초상화는 남아있지 않다. 1710년에 그려진 초상화가 왕립 학회에 있었으나 훅이 죽자 그와 앙숙이었던 뉴턴이 없애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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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훅은 그의 저서 《마이크로그라피아(Microgra-phia)》에서 최초로 생명을 미시적으로 들여다보았다.

ⓒ Rita Greer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런던에 왕립 학회가 세워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리에 ‘과학 아카데미(Academie des Sciences)’가 설립되었다. 왕립 학회와는 달리 파리의 과학 아카데미는 과학자가 아니어도 회원이 될 수 있었고, 한때는 나폴레옹이 회장을 맡기도 했다. 당시 국가 간의 치열한 경쟁에서 과학적 성취가 중요한 요소로 떠올랐고, 이는 혁명 후 공화국으로 거듭난 프랑스와 나폴레옹에게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파리의 판테온에 있는 푸코의 진자는 지구가 자전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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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는 그 누구보다도 현대 과학의 탄생에 기여한 사람이다.
- 스티븐 호킹(영국의 우주론자), 2009

과학을 위한 최고의 도구 - 두뇌

특별한 장비를 사용하거나 실험을 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잘 알려진 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이루는 물질의 구성과 물체의 운동에 대한 탁월한 이론을 세웠다. 또한 20세기 초엽에는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종이와 연필만 가지고 물리학과 우주에 대한 인식에 혁신을 일으켰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던 것처럼 아인슈타인도 우주를 관측한 결과를 바탕으로 이론을 세웠고, 당시의 기술로는 실험으로 입증 또는 측정조차 할 수 없던 현상들을 다뤘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뉴턴이 1687년에 그랬던 것처럼 오로지 수학만을 이용해 자신의 이론이 타당하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그리고 그의 이론은 이후의 관측과 실험을 통해 입증되었다. 현대의 물리학 연구는 최신 이론을 검증하기 위해 수학에 크게 의존하는데, 사실 이 덕택에 지금의 물리학자들은 과거의 물리학자들에 비해 굉장히 유리하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만 해도 평생이 걸렸을 계산을 지금은 고성능 컴퓨터가 순식간에 해결해주니 말이다.

로버트 훅의 현미경

ⓒ A Pictorial History by Joseph G Gall (1996)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과학의 발전에 컴퓨터와 같은 장비가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지속적인 진보의 원동력인 인간의 창의력과 호기심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지금의 대학과 연구실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연구와 야외에서 이루어지던 고대 그리스의 아카데미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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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루니 집필자 소개

1967년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대학에서 중세 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케임브리지 대학과 뉴욕 대학에서 중세 영어와 프랑스 문학을 가르쳤으며, 지금은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과학과..펼쳐보기

출처

물리학 오디세이
물리학 오디세이 | 저자앤 루니 | cp명돋을새김 도서 소개

원자론의 개념을 처음 제안했던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그 후 아랍의 과학을 거쳐 르네상스, 계몽주의 시대 그리고 마침내 우주 물질의 기원을 밝힌 현대의 과학에 이르기까지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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