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물리학 오디
세이

천문학의 발전

다른 표기 언어 동의어 바라보기만 하는 것은 이제 그만

중국과 수메르, 바빌론에서는 천문현상을 자세히 기록하는 데 집중했던 반면, 고대 그리스에서는 보다 이론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을 통해 천체의 움직임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일반적이었다.

기원전 500년경, 피타고라스는 지구가 평면이 아니라 둥글다고 생각했다. 기원전 5세기에 아낙사고라스는 태양이 매우 뜨거운 바위이고 달은 지구에서 떨어져 나간 조각이라는 주장을 펼쳤으며, 기원전 270년 아리스타쿠스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주장했다. 이전의 사람들은 지구가 세상의 중심이며 달과 태양, 행성과 별과 같은 모든 천체가 지구 주위를 돈다고 믿었다. 어쨌든 아리스타쿠스는 태양과 달의 크기를 계산하고 지구에서 달과 태양까지의 거리를 최초로 측정하기까지 했는데, 계산 결과 태양의 크기가 지구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리스타쿠스는 월식이 진행되는 시간을 근거로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가 지구 지름의 30배 정도일 것이라고 계산했는데, 이 값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태양은 달보다 지구에서 19배 멀리 있고 지구 지름의 10배 정도의 크기일 것이라고 계산했지만, 이 값은 정확하지는 않다. 아쉽게도 아리스타쿠스의 주장은 당시에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리스타쿠스의 주장에 대한 반론 중에는 만약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면 그 궤도의 크기로 인해 지구와 별의 거리가 변하므로 별의 크기가 달라 보여야 한다는 것도 있었다. 지금은 지구와 별의 거리가 지구와 태양의 거리에 비해서 엄청나게 멀기 때문에 별의 크기가 항상 일정하게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당시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런 반론이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시절엔 지구와 별까지의 거리가 그 정도로 멀 것이라는 생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므로 아리스타쿠스의 이론은 제대로 빛을 볼 수 없었다. 이 이론이 다시 무대에 등장하기까지는 1,80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렇다면 지구의 적도가 1초(대략 보통 걸음으로 한 걸음 내딛는 시간)에 약 0.4km(이것의 60배가 지구 둘레에서 1도가 된다)를 움직이던지, 아니면 제9천(天)(천동설에서 지구를 중심으로 가장 바깥쪽의 우주)의 적도가 1초에 약 8,047km를 움직여야 하는데… 이것은 번개보다 빠르다는 뜻이다. 그런데 천동설이 맞으려면 그래야만 한다.
- 에드워드 라이트, 윌리엄 길버트의 《자기(磁氣)에 대하여(De magnete)》 서문에서 왜 태양이 24시간마다 지구 주위를 도는 것보다 지구가 자전하는 것이 더 타당한지 설명하면서

고대 최고의 천문학자는 히파르쿠스?

그리스의 천문학자 히파르쿠스는 기원전 190년경 니케아에서 태어났지만 대부분의 삶을 로데스에서 보냈다. 그의 저술이 거의 남아있지 않음에도 히파르쿠스는 고대 그리스 최고의 천문학자로 불리고 있다. 히파르쿠스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책 《알마게스트(Almagest)》 덕이라고 해야 한다. 그는 바빌론 천문가들의 지식에 크게 의존해 바빌론과 그리스의 천문학을 연결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바빌론인들이 남겨놓은 관측 기록과 방법을 적절히 활용했다.

히파르쿠스와 그가 발명한 혼천의

ⓒ Science Photo Library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히파르쿠스의 훌륭한 천체 관측 기술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그가 만든 별자리표이다. 기원전 4세기에 작성된 중국의 감석성경(甘石星經)에는 별 121개의 위치가 기록되어 있었던 데 비해, 히파르쿠스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 850개의 위치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밝기에 따라 6가지로 나누어 놓기까지 했다. 이처럼 별의 밝기 등급을 기본적으로 6가지로 나누는 것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방법이다. 또한 이전 800년 동안 있었던 모든 일식과 월식의 목록을 만들었고, 기원전 134년 전갈자리에서 일어났던 신성(新星)의 탄생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삼각법도 그가 만들어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공 모양의 하늘을 평면에 표현한 천문 관측기구인 아스트롤라베(astrolabe)도 그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지구가 중심에 있는 프톨레마이오스적 우주관을 보여주는 1660년의 그림

ⓒ J van Loon (c.1611~1686)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에 따르면 히파르쿠스는 태양과 달이 원궤도 운동을 한다고 분명히 설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관측한 결과를 근거로 행성의 움직임이 천동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행성의 궤도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가장 유명한 그의 업적은 하지/동지와 추분/춘분 때의 태양의 위치가 별을 기준으로 하면 점차 서쪽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와 혼천의

ⓒ Corbis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년의 길이를 365일 5시간 55분이라고 처음으로 정확하게 측정한 것도 히파르쿠스였다. 계절의 길이가 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는 한 달의 길이를 겨우 1초의 오차로 계산해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아리스타쿠스가 주장했던 지동설이 받아들여졌다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서기 140년경에 프톨레마이오스가 제시한 이론인 천동설에 점령당하고 만다. 사실 천동설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작품은 아니었다. 그는 당시 널리 받아들여지던 이론을 정리해 자신의 책 《수학적 집대성(Mathematical Compilation)》(지금은 알마게스트(Almagest)로 더 알려져 있다)에 포함시킨 것뿐이었다. 책에 따르면 지구는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공 모양 우주의 중심에 있다. 또한 달, 태양, 행성, 별들이 순서대로 지구 주위를 돌고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원이 완벽한 형태이고, 하늘은 신의 영역이라고 굳게 믿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천체의 궤도가 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 관측의 결과로부터 이끌어낸 결론이 전혀 아니었다.

이런 구조에 맞추다 보니, 행성의 궤도는 조금씩 변경되어야 했다. 금성과 수성은 태양 주위를 원형으로 돌고 있는 것이 분명했으므로 지구 주위를 도는 태양의 주위에 두었다. 눈에 보이는 나머지 행성인 화성, 목성, 토성도 원 궤도를 가졌지만 태양이 문제였다. 프톨레마이오스는 행성들이 도는 궤도의 중심이 조금씩 어긋나서 빈 공간이 생긴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 점이 지구 주위를 원 궤도로 돈다고 했다. 이처럼 각 행성의 원 궤도를 조금씩 밀어서 만들어진 우주의 모형은 가끔은 거꾸로 움직이는 행성의 궤적을 완벽하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그럴듯하게 설명할 수는 있었다. 별은 지구에서 볼 때 움직이지 않아서 설명하기 쉬운 대상이었으므로 가장 먼 곳에서 지구 주위를 돈다고 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런데 관측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행성의 움직임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자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모형이 정확하지 못하다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졌다. 그때마다 관측결과와 일치하도록 모형에 조금씩 수정을 가했지만, 결국 천동설로 천체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것은 한계에 다다르게 된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무려 천 년이 넘게 걸린 것이다.

거북이 등 위의 우주
힌두교 신화에서는 거북이 등 위에 있는 네 마리의 코끼리가 세계를 떠받치고 있다. 물론 이 이론을 뒷받침할 수 있는 관측자료 같은 것은 전혀 없다. 테리 프래쳇은 그의 소설 《디스크월드(Discworld)》에서 이 힌두 신화를 가져다 쓰기도 했다. 그렇다면 대체 거북이는 무엇 위에 있는 것이냐는 당연한 질문에 대한 힌두교의 답은 ‘거북이는 다른 거북이 위에 있고, 그 거북이는 또 다른 거북이 위에 있고…’이다.

거북이 등 위의 우주

천문학의 쇠퇴와 부활

그리스 문명이 쇠퇴하자 천문학도 암흑기를 맞이하게 된다. 로마제국에는 뛰어난 천문학자가 없었을 뿐더러, 아랍에서 점차 과학이 발전해 813년 알-마뭄이 바그다드 천문학교를 세울 때까지는 천문학 분야에서 별다른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천문학 분야에서 유럽과 북아프리카각주1) 에서는 특기할 만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인도에서는 후일 아랍 천문학계가 유용하게 사용하게 될 관측 결과를 열심히 기록하고 있었다. 별에 관한 인도 최초의 책은 기원전 1200년경의 《베당가 죠티사(Vedanga Jyotisa)》인데 이 책은 천문학책이라기 보다는 사실상 점성술책이고 실제로도 종교적인 용도로 사용되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천문학 서적이라고 할 만한 것은 서기 476~550년경에 쓰인 《아리야바티야(Aryabbatiya)》이다. 이 책은 후일 아랍권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자정을 하루의 시작으로 본 최초의 책이기도 하다. 또한 근거는 알 수 없지만, 지구가 자전하고 이 때문에 별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며, 달은 태양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빛나는 것이라는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아랍의 천문학

행성과 별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데 지속해서 수학을 활용한 것은 아랍의 천문학자들이었다. 이슬람권의 천문학자들은 일출, 정오, 오후, 일몰, 저녁 시간에 규칙적으로 어느 곳에서든 정확하게 메카 방향으로 기도하는 신도들 때문에 정확한 달력 제작을 요구받고 있었다. 그들은 ‘알라가 별들로 하여금 너희를 위해 땅과 바다의 암흑 속에서 너희를 이끌어주도록 하셨다’라는 쿠란의 말씀에 의지하여 별에서 해답을 찾고자 했다. 게다가 그리스의 학자들이 이성에 의존했던 반면 쿠란은 관찰에 의한 경험적 자료에 확신을 가질 것을 권장하는 경향이 짙었다. 관찰하고, 생각하고, 이성에 의존하라는 쿠란의 지시는 과학적 접근법이라는 형태로 요약되었다.

아랍에서 만들어진 북반구의 천체도, 1275년

ⓒ Topfoto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이슬람교에서는 천문학을 이용해 미래를 예견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일례로, 모하메드의 아들이 죽었을 때 일식이 일어나자 모하메드는 ‘일식은 자연 현상일 뿐이고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아랍의 천문학은 점성술에 적극적으로 이용된 중국이나 인도의 천문학과는 분명하게 구분된다.

아랍의 달력과 천문학이 발전한 것은 규칙적인 기도를 위해 정확한 시간을 알아야 했던 이유도 있다.

ⓒ Shutterstock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서기 700~825년 사이에 대부분의 아랍 천문학자들의 관심은 그리스, 인도, 이슬람 이전의 사산 왕조 시대 페르시아의 천문학을 이해하는 데 집중되었다. 이때는 알-마뭄이 통치하던 시기의 바그다드에 ‘지식의 전당(House of Wisdom)’이 설립된 때이기도 하다. 유럽보다 훨씬 앞선 8세기 중반에 중국에서 이라크로 종이가 전해지자 지식을 축적하고 전파하기가 훨씬 쉬워졌으며, 서기 825~1258년 몽골군이 바그다드를 약탈할 때까지 지식의 전당은 명백히 세계 지성의 중심지였다.

천문학 분야에서 이슬람 독자적인 최초의 저술은 무하메드 이븐 무사 알 콰리즈미가 830년에 쓴 《지즈 알-신드(Zij al-Sindh)》이다. 이 책에는 태양과 달, 다섯 개 행성의 움직임이 표로 정리되어 있다. 알 콰리즈미는 천문학자보다는 수학자로서 더 이름이 알려져 있으며(유럽에서는 그를 알고리트미(Algoritmi)라고 불렀다. ‘알고리즘(algorithm)’이란 용어는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아랍에서 수학의 발전은 천문학의 발전에 힘입은 바가 크다. 또한 그는 해시계를 개량하고, 앙각(仰角, elevation) 측정기를 만들어 각도 측정에 이용했다. 또한 서기 825~835년경에 하바쉬 알-하십 알-마라지가 펴낸 《천체와 거리(The Book of Bodies and Distances)》에는 천체까지의 거리를 계산하는 방법이 담겨있는데, 이 계산에 따르면 달의 지름은 3,037km(실제로는 3,470km),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는 346,344km(실제로는 384,402km)였다.

서기 964년 페르시아의 압드 알-라만 알-수피는 별의 위치와 밝기, 색깔을 관측하고 이를 그림과 함께 기록했다. 이 책은 안드로메다 은하가 그려진 최초의 책이기도 하다. 1006년에는 이집트의 알리 이븐 리드완이 역사상 가장 밝은 초신성의 기록을 남겼는데, 그에 따르면 초신성의 크기는 금성의 두 배 혹은 세 배에 가까웠으며 밝기가 달의 4분의 1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이 초신성은 중국과 이라크, 일본, 스위스에서도 관측된 기록이 있으며 북아메리카 원주민들도 이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성운(Crab nebula)은 1054년에 관측된 초신성의 폭발로 만들어졌다.

ⓒ NASA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아랍 천문학의 발전이 벽에 부딪힌 것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무한(無限, infinity)은 불가능한 개념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러나 9세기에 자파 무하마드 이븐 무사 이븐 샤키르는 천체는 지구와 똑같은 물리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라고 주장했으며(고대인들의 믿음과는 배치된다), 11세기에는 이븐 알 하이삼이 처음으로 천문학에 실험적 접근방법을 적용한다. 이븐 알 하이삼은 달이 태양빛을 반사하는 것을 측정하기 위한 장치를 고안해 다양한 방법으로 그 결과들을 기록했다. 그는 우주 공간은 공기가 희박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은하수가 공기층 높은 곳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에 반박했다. 은하수를 관측할 때의 시차(視差, parallax)가 매우 적다는 것을 근거로 은하수까지의 거리가 매우 멀다는 것도 알아냈고, 한편 같은 시기에 살았던 알 비루니는 은하수가 별들의 집단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알 비루니는 중력을 ‘모든 것을 지구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힘’이라고 설명하며 중력은 모든 천체에 동일하게 작용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때도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중심설은 확고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알 하이삼은 이미 인도의 브라마굽타가 주장했던 것처럼 지구가 자전한다고 했으며, 알 비루니는 1030년 브라마굽타의 저술을 살펴보면 수학적으로 아무런 문제를 찾을 수 없다는 의견을 남겼다.

이슬람 과학에서 전반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인 엄격한 검증은 천문학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지만, 신의 의도를 알아내려는 시도는 철저하게 억압되었다. 8세기에서 12세기에 이르는 동안 아랍 과학이 이루어낸 가장 중요한 기여는 천문 관측 장비의 개량과 수학의 발전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르네상스 시대 유럽의 과학자들은 천문학을 새롭게 다듬을 수 있었다.

브라마굽타(598~668)
인도의 수학자 브라마굽타(Brahmagupta)는 인도 서북부 라자스탄 지방의 빈말 시에서 태어났다. 우자인에 있는 천문대의 책임자였고, 수학과 천문학에 관한 네 권의 책을 썼는데 그 중 하나에 영(零, zero)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 있다. 그는 지구가 자전하고 달이 태양보다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증명했으며, 지구가 평평하지 않고 둥글다고 주장했다. 지구가 둥글다면 모든 것이 떨어져 내릴 것이라는 반론에 대해서는, 중력과 유사한 개념을 제시했다. 천체의 위치와 일식, 월식을 계산하는 방법도 고안했다. 아랍의 천문학자들이 인도의 천문학을 접한 것도 브라마굽타의 책을 통해서였는데, 칼리프 알-만수르의 초청으로 우자인에서 온 칸카는 천문학 교재로 브라마굽타의 책 《브라마스푸타싯단타(Brāhmasphuṭasiddhānta)》를 사용했다.

무거운 물체는 모두 지구의 중심 방향으로 끌린다… 지구의 모든 곳은 똑같다. 지구에 서 있는 사람은 모두 똑바로 위를 향해 서 있고, 무거운 물체는 자연법칙에 따라 지표로 떨어진다. 지구가 물체를 끌어당기는 것은 물이 흐르고 바람이 불고 불이 타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법칙인 것이다… 지구는 가장 아래에 있으며 모든 것은 어디로 던지든 땅으로 떨어지고 지구에서 위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 브라마굽타, 《브라마스푸타싯단타》 중
고대의 천문 장비

알려진 것 중 가장 오래된 천문 관측 장비는 바빌론의 점토판에 그려진 것으로 12등분된 원 세 개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이용해 만들어지는 36개의 조합은 별자리의 이름과 숫자를 보여주는데, 아마 숫자는 바빌론 달력에서의 달을 가리키는 것 같다.

고대의 천문 장비인 아스트롤라베

ⓒ Shutterstock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아스트롤라베(astrolabe)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행성과 별의 위치를 표시하는 장치였다. 남아있는 것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아랍에서 서기 927~928년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최초로 만들어진 것은 서기 1세기 이전일 것으로 짐작된다. 이슬람 전설에는 당나귀 등에 앉아 천구의(天球儀, celestial globe)를 보던 프톨레마이오스가 천구의를 떨어뜨렸을 때 당나귀가 이것을 밟아서 납작하게 만든 것이 아스트롤라베의 기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혼천의(渾天儀, armillary sphere)는 아스트롤라베를 입체적으로 만든 것이고, 행성과 별의 위치가 지구를 중심으로 동심원 위에 표시된다.

고대의 천문 장비인 혼천의

ⓒ Shutterstock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천체를 관측할 때 올려다보는 각도인 앙각(仰角, elevation)을 측정할 때는 사분의(四分儀, quadrant)가 사용되었다.

고대의 천문 장비인 사분의

ⓒ Shutterstock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최초의 사분의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언급한 서기 150년의 것이다. 이슬람 천문학자들은 훨씬 크고 정밀한 사분의를 만들었지만, 가장 유명한 사분의는 티코 브라헤가 덴마크의 흐벤 섬에 있던 자신의 연구소에 설치한 것이다.

ⓒ Dresden Codex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드레스덴 고문서

ⓒ Dresden Codex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마야인의 뛰어난 관찰력
11세기에서 12세기에 걸쳐 마야인들이 작성한 문서인 드레스덴 고문서에는 300~400년 이전의 달과 금성에 대한 관측 자료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마야인에게 금성은 태양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천체였다. 또한 마야인들은 오리온 자리 중심부의 성운도 관측했던 것 같다. 여러 전설에서 이 성운을 연기를 피우는 것에 비유했는데, 망원경 없이 오리온자리에서 성운을 관측한 것은 오직 마야인들 뿐이었다.

하늘을 밝힌 초신성의 출현

1054년 7월의 어느 날부터 23일 동안 낮에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밝은 별이 빛났다. 황소자리에서 빛나던 이 별을 중국에서는 ‘손님 별’이라고 했으며 금성보다 네 배나 밝게 노란 빛으로 빛났다는 기록이 있다. 이 별은 무려 653일 동안이나 볼 수 있었고, 일본의 시인 후지와라 사다이에와 아나사지 족이나 밈버스 족 같은 아메리카 원주민들 역시 이것을 소재로 시를 남기기도 했다. 이 별은 게자리 성운을 탄생시킨 초신성이었는데, 밤하늘에서 이 별이 사라진 후 700년 동안 초신성은 한 번도 관측되지 않았다. 이후에 발견된 최초의 초신성은 1731년 영국의 의사이자 천문학자였던 존 베비스가 망원경을 이용해 찾아낸 것이었다.

신이 세상을 만들었을 때 모든 천체는 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였고, 신은 천체들이 알아서 움직이도록 능력을 부여했다… 천체에게 주어진 힘은 다른 목적으로 쓰이지 않기 때문에 약해지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 힘에 대항하거나 저항하는 힘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 장 뷔리당, 14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앤 루니 집필자 소개

1967년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대학에서 중세 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케임브리지 대학과 뉴욕 대학에서 중세 영어와 프랑스 문학을 가르쳤으며, 지금은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과학과..펼쳐보기

출처

물리학 오디세이
물리학 오디세이 | 저자앤 루니 | cp명돋을새김 도서 소개

원자론의 개념을 처음 제안했던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그 후 아랍의 과학을 거쳐 르네상스, 계몽주의 시대 그리고 마침내 우주 물질의 기원을 밝힌 현대의 과학에 이르기까지 ..펼쳐보기

전체목차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Daum백과] 천문학의 발전물리학 오디세이, 앤 루니, 돋을새김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