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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사건 군사 정권을 반대한 시민들의 민주화 투쟁
5 · 18 광주 민주화 운동
광주민중항쟁시대 | 198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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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저격 사건으로 18년간의 군사 정권이 무너졌다. 그러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그해 12월 12일 전두환의 군사 쿠데타로 좌절되었다. 1980년 5월 전국적으로 대규모 민주화 운동이 전개되었고, 신군부는 이에 비상계엄 확대 조치로 대응했다. 특히 전라남도 광주에서 벌어진 군부의 유혈 진압은 1980년대 민주화 항쟁의 기폭제가 되면서 한국의 인권 신장과 민주주의 발전에 결정적인 전기로 작용하게 된다.
배경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고 12·12 사태가 발발하다.
1980년 신군부, 비상계엄을 확대하고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다.
1981년 제5공화국이 출범하다.
설명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는 대학생을 중심으로 10만여 명의 인파가 운집해 계엄 해제와 유신 세력의 퇴진을 요구했다. 4·19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였다. 앞서 4월 24일 서울 지역 대학교수들이 학원 민주화 성명을 발표했고, 5월 16일에는 군사 정권의 재등장에 반대하는 지식인 134명이 민주화 선언을 발표했다. 오랜 독재에 짓눌린 시민들의 민주화 욕구가 거세게 분출되자 신군부는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이에 따라 신군부는 주요 대학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학생운동 지휘부와 정치권의 주요 인사 검거에 나섰다. 학생들이 잇따라 체포되고, 김대중, 김종필 등이 권력형 부정 축재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런 가운데 5월 18일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대학생과 계엄군 사이에 충돌이 빚어지면서 이는 광주 민주화 운동이 불씨가 지펴졌다. 신군부의 계엄 확대 조치로 휴교령이 내려진 가운데 학생 200여 명이 학교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주둔하고 있던 계엄군들이 학생들을 무차별로 구타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광주 시내 금남로에서 민주화 시위로 이어졌고, 계엄군의 과잉 진압에 격분한 시민들까지 가세하면서 시위대는 갈수록 불어났다. 이들은 계엄 철폐와 김대중 석방,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며 곳곳에서 계엄군과 대치했다. 오후 3시 무렵부터 계엄군은 골목까지 쫓아다니며 학생과 시민들을 곤봉으로 마구 때리고 차에 태워 강제로 끌고 갔다.
19일에는 대학생과 시민은 물론 고등학생까지 가세해 시위대가 5,000여 명으로 늘었다. 이들은 금남로와 계림동, 충정로 등지에서 계엄군과 대치했다. 계엄군은 소총에 칼을 부착하고 장갑차를 앞세워 시위대를 위협했으며, 가톨릭센터와 공용터미널 주변 등 곳곳에서 무자비한 탄압을 자행했다. 20일 오후 광주 시내 중심가에는 10만여 명이 사람들이 연좌 농성을 벌였다. 택시 200여 대가 일제히 경적을 울리며 시위에 가세했다. 노동자와 도시 빈민, 회사원, 점원, 주점 종업원 등 다양한 시민들이 참여하여 초기의 학생 시위는 이미 민중 항쟁으로 진전되어 있었다. 이날 밤 20만 명 규모로 불어난 시위대는 노동청과 신역, 전남도청 앞 등지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계엄군의 총칼에 쇠파이프와 각목으로 맞섰다. 자정을 전후해 계엄군은 건물 옥상에서 장갑차에 올라탄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21일이 되면서 시위대는 본격적인 무장 항쟁을 벌였다. 이들은 나주, 영산포, 화순 등지의 경찰관서에서 카빈총과 M1 소총 800여 정과 탄환 5만여 발을 탈취해 시위 현장에 반입했다. 또한 시위대는 화순 탄광 광부들의 협조로 화약과 뇌관을 확보했고, 방위산업체인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80여 대의 대형 버스와 장갑차 등을 몰고 왔다. 그리고 일부 시위대는 광주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주변 지역으로 빠져나갔다. 신군부의 탄압으로 국내 언론들이 침묵과 왜곡 보도로 일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총과 실탄으로 무장한 시민군이 등장한 것은 이날 오후부터였다. 시민군의 구성은 학생부터 노동자, 공사장 인부, 접객업소 종업원, 날품팔이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시민군이 계엄군 임시본부가 있는 도청을 공격하자, 계엄군은 작전상 일단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했다. 계엄군은 광주에서 외곽으로 통하는 모든 교통과 통신을 차단한 채 광주를 고립시키고 봉쇄했다. 이로써 항쟁 나흘 만에 계엄군이 광주 시내를 포위하고, 교도소를 제외한 시내 전역을 시민군이 점령하였다.
이날 계엄사령부는 처음으로 담화문을 내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그 내용은 광주 시민들을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진실을 왜곡한 것이었다.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이희성(李熺性)의 이름으로 된 담화문은 이 사건에 대해 밝혔다.
광주시 일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금의 비극적인 사태 (……) 타 지역 불순인물 및 고정 간첩들이 (……) 악성 유언비어의 유포와 공공시설 파괴, 방화 등을 통하여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 행위를 선도한 데 기인된 것이다.
22일에는 공무원, 변호사, 목사, 신부, 기업가 등 15명으로 이루어진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사태 수습 이전 군대 투입 반대, 연행자 전원 석방, 군대의 과잉 진압 시인, 사후 보복 금지, 부상자와 사망자의 치료, 보상, 요구 관철 시 무장 해제 등을 결의하고 계엄군과 교섭을 벌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요구 사항에 군사 정권 퇴진이나 계엄 철폐 등이 포함되지 않아 시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한 데다 계엄군도 이를 거부해 무기만 절반 정도 반납한 채 교섭은 흐지부지되었다.
이에 23일에는 천주교 광주교구 대주교 윤공희(尹恭熙)를 위원장으로 하는 새로운 수습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여기에는 시민수습대책위원회 측에서 10명, 학생대표 20명이 각각 참여했다. 일부 수습위원은 무기 200점을 계엄군에 반납하고 연행된 시민 33명을 넘겨받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신임 국무총리 박충훈(朴忠勳)이 광주를 시찰하고 질서 회복을 호소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24일 주남 마을에서 버스를 타고 가던 양민 18명이 공수부대에게 학살되는 등 계엄군과 공수부대의 살상이 계속되었다. 항쟁 엿새째인 24일을 전후해 시민들은 무장 해제 문제를 놓고 투항파와 투쟁파로 나뉘었다. 투항파는 무장을 해제하고 지역 명망가들을 중심으로 계엄군과 협상을 추진하자고 주장했지만, 투쟁파는 이를 반대했다. 격론 끝에 투쟁파가 주도권을 잡았고, 25일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에서 김종배(金鐘培)를 위원장으로 한 새로운 집행부가 꾸려졌다. 시민군은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일인까지 반민주 세력과 싸울 것’을 결의했다.
당시 집행부는 계엄군의 진압에 대비하는 한편, 미국의 압력이나 범국민적 저항으로 신군부의 집권 기도가 좌절되기를 바라며 시간을 벌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이미 22일에 광주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신군부가 요청한 4개 대대의 한국군을 미국의 통제에서 풀어달라는 안에 동의한 상태였다. 미군은 앞서 5월 초 질서 유지에 필요하다면 시위자들에 대한 무력 사용을 반대하지 않겠다는 뜻을 한국 정부에 전달한 바 있었다.
26일 오후 6시, 계엄군은 시민군에게 무조건 투항할 것을 최후 통첩했다. 27일 새벽에 계엄군은 전투사단과 공수여단 병력 2만 5,000명을 동원해 시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한 이른바 ‘충정 작전’에 돌입했다. 계엄군의 일방적인 공세로 도청에 있던 시민군들은 대부분 사살되거나 부상을 입었고, 일부 생존자는 군부대로 이송되었다. 전일빌딩에 있던 시민군 20여 명은 총격전 끝에 전원 사살되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계엄사령부는 6월 5일 민간인 148명이 사망했고, 이 가운데 118명이 총상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발표했다. 사망한 군인은 15명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1990년 제정된 광주 민주화 운동 보상법에 따라 피해자로 인정된 민간인은 사망 154명, 행방불명 70명, 상이 3,193명, 기타 1,589명으로 모두 5,000명이나 되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신군부의 집권 계획에 따른 과잉 진압, 유신독재를 관통하며 이어져 온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목적에 따른 영호남 지역감정 조장 등을 원인으로 들 수 있다.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1980년대 학생운동에서는 서울과 광주, 부산 등지의 미국 문화원에 대한 점거 및 방화가 특징적인 현상으로 나타났다. 미국이 신군부의 진압군 동원을 승인한 것과 관련해 반미 운동이 확산된 데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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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사건들의 기승전결,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와 상호작용을 추적하여 5천 년의 한국사를 복합적으로 이해한다. 고대, 고려, 조선, 근대, 현대로 한국사의 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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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5 · 18 광주 민주화 운동 –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이근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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