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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사건

한성 함락과 개로왕 전사

한반도 주도권이 백제에서 고구려로 넘어가다

요약 테이블
시대 475년

5세기 들어 고구려와 백제는 잇따라 수백 년 된 수도를 옮겼다. 먼저 고구려가 427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이어 백제가 475년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한다. 고구려와 백제의 수도 이전은 그 성격이 확연히 달랐다. 고구려의 경우는 본격적인 남진 정책 등을 감안한 장수왕의 전략적 선택이었다. 반면 백제는 고구려의 패권주의에 밀려 한강 지역을 어쩔 수 없이 내주고 남쪽으로 물러나야 했다. 이에 따라 한반도의 세력 판도는 다시 한 번 요동쳤다.

배경

427년 고구려가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천도하다.
433년 백제와 신라가 나제 동맹을 맺다.
472년 백제 개로왕이 중국 북위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하고, 이로 인해 고구려의 분노를 사다.

설명

건국 이래 줄곧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이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으로 함락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장수왕 63년 9월에 왕이 군사 3만을 이끌고 백제에 침입하여, 백제의 도읍 한성을 함락시키고 백제 왕 부여경(扶餘慶)을 죽인 뒤 남녀 8,000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라고 기록하였다. 부여경은 백제의 21대 왕인 개로왕(蓋鹵王, 재위 455~475)을 말한다.

당시 개로왕의 아들 여도(餘都)가 신라로부터 구원병 1만 명을 얻어 한성으로 달려갔으나, 이미 개로왕이 고구려군의 위세를 견디지 못하고 급히 피신하다 성문 바깥에서 적군에게 붙잡혀 참살당한 뒤였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는 ‘고구려 왕 거련(巨連, 장수왕)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치니 백제 왕 경(慶, 개로왕)이 아들 문주(文周, 여도)를 보내 도움을 구하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도왔는데, 미처 그곳에 이르지 못하여 백제는 이미 함락되고 경도 또한 해를 입었다’라고 나와 있다.

고구려의 한성 침공 3년 전인 472년 8월 개로왕은 중국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장수왕의 정복 사업에 위기감을 호소하며 군사적인 지원을 요청했지만, 고구려와 친선 관계를 맺고 있던 북위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백제가 고구려와 북위 사이에 이간책을 쓰려 한다는 사실이 고구려에 알려져 장수왕의 격분을 사게 되고, 개로왕은 끝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장수왕이 백제를 침공할 당시 개로왕은 이미 민심으로부터 멀어져 있었다. 개로왕은 장수왕이 백제에 거짓으로 망명하게 한 승려 도림(道琳)과 함께 바둑으로 소일하며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은데다, 성곽과 궁궐을 높이 쌓는 등 대규모 토목 공사를 벌여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즉 장수왕과 도림이 계략을 써서 개로왕의 실정을 부추기고, 백제를 내부로부터 와해시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개로왕은 끊임없는 귀족들의 정권 다툼을 의식해 재위 기간 동안 왕권을 강화하고 왕실의 힘을 키우기 위해 애를 썼다. 때문에 일반 귀족 세력의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한성 함락 때 개로왕을 참살한 고구려 장군들은 백제 출신으로 고구려에 망명한 사람들이라는 기록도 있다.

개로왕이 전투에서 사망하자, 아들 여도가 왕위를 이어받아 문주왕(文周王, 재위 475~477)이 되고 수도를 웅진으로 옮겼다. 이로써 500년간의 한성백제 시대가 마감되고 새로이 웅진백제 시대가 열렸다. 이와 맞물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 대에 이르러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뒤에도 계속 남쪽으로 밀고 내려갔다. 서쪽으로는 천안과 청주, 중부 지역에서는 소백산맥을 거쳐 영주, 예천까지 진격했다. 이와 같은 고구려의 거침없는 남진 정책으로 5세기 후반 백제와 신라는 각각 금강 이남과 소백산 이남까지 밀려났다.

이 과정에서 백제는 주변국들과 손을 잡으며 고구려의 남진 정책을 저지하려 했다. 433년에 백제는 적대국이었던 신라와 왕실 간 혼인을 통해 나제 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해 공동 방어전선을 구축했다. 동맹의 기본 취지는 어느 쪽이든 고구려의 침략을 받으면 상대가 구원병을 보낸다는 것이었다. 한성 함락 당시 개로왕의 구원 요청으로 신라가 군사를 파견한 것도 이 같은 양국의 위기의식과 약속에 따른 것이다.

기마인물도 벽화

쌍영총에 남아 있던 벽화로 고구려 복식을 갖춘 사람이 말 탄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은 활을 잘 쏘고 말을 잘 탔다고 하며, 이러한 고구려인의 기상이 벽화에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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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말에는 가야와 왜도 정치, 군사적 동맹에 가세해 고구려를 견제하면서 서서히 한반도 내에서 힘의 균형이 이뤄진다. 앞서 신라 실성왕(實聖王)은 402년 내물왕의 아들을 왜에 인질로 보내 고구려의 침략을 경계하고 양국 간 관계 개선을 도모한 흔적이 있다. 백제는 또 북위와 송(宋)나라, 제(齊)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의 영토 확장 사업을 견제했다. 왜를 상대로 외교 관계도 강화해 나갔다. 이런 가운데 왜는 한반도 내 패권 다툼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서서히 자신의 국제적 위상을 높여 나갔다. 중국 남조의 왕조들과 직접 교역을 시도하기도 했다.

장수왕이 400년이나 같은 곳에 있던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것은 무엇보다 본격적인 남진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였고, 그 같은 의도는 이후 한반도 정세 변화에 그대로 적중했다. 장수왕은 또 안정적인 국가 운영과 경제 기반 구축을 위해 농업 기술과 생산성을 높이는 방안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지리적으로나 기후로나 국내성보다는 여건이 좋은 남쪽의 비옥한 땅으로 천도를 결심한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고구려가 한성을 치고 동북아시아 지역 내 해상 교역로의 관문인 한강 유역을 차지한 것은 엄청난 소득이었다. 곡창 지대인 한강과 대동강 유역을 확보한 데 이어 바다로 진출해 황해의 해상권을 장악할 수 있는 중요한 교두보를 마련한 것이다.

이와 함께 장수왕의 평양 천도에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지가 담겼다는 점도 확인된다. 중국 《위서》 〈백제전〉에는 장수왕이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귀족과 대신들을 숙청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기득권 세력을 제압하고, 새로운 수도에서 자기 세력을 기르기 위한 시도로 볼 수 있다.

장수왕의 수도 이전과 남진 정책을 토대로 그 뒤를 이은 문자왕(文咨王, 재위 491~519)은 494년 북쪽의 부여까지 완전 흡수함으로써 고구려는 사상 최대의 영토를 확보한다. 5세기 말~6세기 초 고구려의 영토가 삼국 전체의 90퍼센트에 이를 정도였다.

충북 충주에서 발견된 중원고구려비 등에 따르면 당시 고구려는 국왕을 대왕(大王)이나 조왕(祖王)으로 부르고, ‘천하 사방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이라고 자찬했다. 뿐만 아니라 신라를 종주국으로 간주해 동이(東夷)라고 칭하고, 신라 왕과 신료들에게 의복을 하사하기도 했다. 고구려가 스스로 자신을 중국과 대등한 반열에 올린 셈이다. 당시 고구려의 거침없는 패권주의와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확보했다는 자부심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반면 백제는 한강 유역을 잃고 왕권이 미약해지면서 내부적으로 엄청난 홍역을 겪는다. 문주왕 3년인 477년, 개로왕의 동생으로 요직에 있던 곤지(昆支)가 죽자 왕비족인 병관좌평(兵官佐平) 해구(解仇)가 권력을 휘둘렀다. 문주왕은 해구를 제거하고 싶었으나, 왕권이 취약해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오히려 477년 9월, 해구가 자객을 보내 사냥 중인 문주왕을 암살하고 만다. 이어 문주왕의 열세 살 난 아들 삼근왕(三斤王, 재위 477~479)이 즉위했고, 해구는 478년에 옛 왕비족인 진씨(眞氏) 세력에 의해 죽임당할 때까지 국정을 장악하였다.

한마디로 고구려와 백제의 수도 이전은 한반도 내에서의 주도권이 백제에서 고구려로 넘어갔음을 의미하는 중대 사건이었다. 백제의 한성이 함락된 직후 고구려와 백제의 국운은 정반대의 길로 치달았다. 흥미로운 점은 4세기 이후 한반도 내 패권은 삼국 가운데 누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느냐에 따라 그 주체가 뒤바뀌었다는 점이다. 4세기 중엽에는 백제, 5세기 후반에는 고구려가 차지했던 이 지역이 6세기에는 신라로 넘어가면서 삼국의 각축전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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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집필자 소개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정치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국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박찬구 집필자 소개

부산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991년 서울신문사에 입사하여 사회부, 정치부, 미래전략팀을 거쳤으며 현재 국제부에서 근무 중이다.

출처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 저자이근호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역사적인 사건들의 기승전결,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와 상호작용을 추적하여 5천 년의 한국사를 복합적으로 이해한다. 고대, 고려, 조선, 근대, 현대로 한국사의 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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