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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72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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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은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의 아들이며, 즉위 후 급속도로 발해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 주력했다. 당나라와 신라의 견제를 받던 무왕은 급기야 732년 당나라를 선제공격하여 산동 반도의 등주에 쳐들어갔다. 그러자 발해군에 맞선 신라와 당나라는 계속된 압박에 결국 무릎을 꿇었고, 양국은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였다. 이후 발해는 해동성국의 중흥기를 맞았으나, 거란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배경
698년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 집단을 이끌고 동모산에 나라를 세우다.
713년 당나라로부터 책봉을 받고, 나라 이름을 발해로 고치다.
732년 발해 무왕이 등주를 선제공격하다.
설명
726년, 만주의 흑룡강 유역에서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곳에 자리 잡은 흑수말갈(黑水靺鞨)을 중국의 당나라가 포섭하려 하자, 발해(渤海) 2대 무왕(武王, 재위 719~737)이 흑수말갈을 치기 위해 군사를 동원한 것이다. 당나라는 발해의 북동쪽에 있는 흑수말갈을 장악함으로써 발해를 견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발해의 배후에 위치한 흑수말갈을 손에 넣으면, 날로 거세지는 발해의 팽창을 저지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고구려는 멸망했지만, 그 후손들이 중심이 된 발해가 또다시 중국 대륙의 위협적인 강자로 떠올랐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신당서(新唐書)》는 당시 발해의 위상을 이렇게 전한다.
대무예(大武藝, 무왕의 이름)가 즉위하자, 대토우(大土宇)를 개척했고, 동북의 여러 야만족이 두려워서 발해의 신하가 되었다.
당시 흑수말갈은 발해에 점령되지는 않았지만, 다른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을 때 반드시 발해의 사전 양해를 받도록 서로 약속한 사이였다. 하지만 흑수말갈이 이 같은 약속을 깨고 발해와 미리 상의도 하지 않은 채 당나라에 입조(入朝)하고, 이에 당나라가 흑수말갈 지역에 흑수부(黑水府)를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해 이들을 관리하자 무왕이 발끈한 것이다. 흑수말갈이 당나라의 영향권에 들어가면, 주변의 다른 부족들도 동요하고, 결과적으로 발해의 입지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요동과 만주 일대의 세력 판도가 뒤바뀔 수 있는 상황이었다. 《신당서》에 따르면 당시 무왕은 ‘지난번 흑수에 돌궐 관리인 토둔(吐屯)을 둘 때도 우리에게 미리 알려왔는데, 이제 당나라에게 벼슬을 청하면서 우리에게 알리지 않으니, 이는 당과 더불어 앞뒤로 우리를 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왕은 발해를 건국한 고왕(高王, 재위 698~719) 대조영(大祚榮)의 아들로, 왕위를 이어받은 뒤 세력 확장과 국가로서의 기틀 마련에 힘을 쏟아 발해의 영역을 급속히 넓혀 나갔다. 동서로는 두만강에서 길림과 장춘을 넘어섰고, 남북으로는 신라, 흑수말갈과 영토를 맞대고 있었다. 《구당서(舊唐書)》는 그 영역을 ‘사방 2,000리에 이른다’라고 적었다. 이와 함께 무왕은 독자적인 연호로 인안(仁安)을 사용해 나라 안팎에 발해의 위용을 과시했다. 그러다 보니 국경을 맞댄 당나라와 신라가 위협을 느끼고 발해를 본격적으로 견제하기 시작했다. 당나라가 발해의 배후를 노려 흑수말갈에 손을 뻗치고, 신라가 721년 북쪽 국경 지역에 장성(長城)을 축조한 것도 이 같은 발해의 기세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당시 흑수말갈을 치려던 무왕의 계획은 무위에 그쳤다. 무왕이 동생 대문예(大門藝)에게 흑수말갈을 공격하도록 지시했으나 대문예가 이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문예는 “흑수말갈을 치는 것은 당나라를 배반하는 것이며, 이는 곧 스스로 자멸을 초래하는 것”이라며 한사코 흑수말갈의 국경을 넘지 않았다. 이에 무왕이 대문예를 처벌하려 하자, 대문예는 아예 당나라로 망명하였다. 대문예는 어릴 적부터 당나라에서 볼모로 지냈기 때문에 당나라의 세력에 맞서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격분한 무왕은 당나라에 대문예를 죽일 것을 요구했지만, 당은 이를 거부했다.
양국 사이에 긴장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결국 무왕은 732년 당나라를 직접 겨냥해 산동 반도에 있는 등주(登州)를 선제공격했다. 이 싸움에서 장수 장문휴(張文休)가 이끈 발해군이 당나라의 등주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죽여 버린다. 이에 당 현종(玄宗, 재위 712~756)은 군사를 일으켜 발해와의 전쟁에 나섰다.
당 현종은 우선 발해로부터 망명한 대문예를 요동 반도 인근의 유주(幽州)에 보내 발해군의 공격을 저지하도록 했다. 또 신라에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김사란(金思蘭)을 보내 군사를 일으켜 발해의 남쪽 국경을 공격하도록 했다. 하지만 발해 국경으로 진격하던 신라가 폭설과 추위로 군사의 절반을 잃는 등 어려움을 겪다가 733년 회군하는 바람에 당나라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당나라와 발해의 전쟁은 일단락됐다. 전쟁이 끝난 뒤 무왕은 자신을 배신한 동생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자객을 시켜 낙양에서 대문예를 없애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발해와 당나라는 평화 친선 관계로 접어들었다. 발해와 당나라가 전쟁을 치르기에는 서로 부담을 느꼈다는 얘기다. 발해는 당나라와 신라가 국경의 북쪽과 남쪽에서 동시에 협공해 오면 상당한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또 당나라와 대치하던 돌궐의 세력이 크게 약해져 당나라가 발해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게 됐다는 점도 부담이었다. 이 같은 판단에 따라 무왕은 735년 당나라에 조공을 보내는 등 전쟁을 일으킬 의사가 없음을 먼저 전했다. 당나라도 무왕의 뜻을 선뜻 받아들였다. 발해와 한 차례 충돌한 결과, 발해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다고 결론 내렸다. 이리하여 3대 문왕(文王, 재위 737~793) 대흠무(大欽茂) 때부터는 당과 우호적인 관계를 계속 유지한다.
발해는 10대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 재위 818~830)의 재위 기간에 중국에서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로 중흥기를 맞는다. 아울러 선왕의 적극적인 대외 정복사업으로 신라나 옛 고구려보다 더 넓은 영토를 차지한다. 그러다가 927년 당에 이어 중국의 패권을 잡은 거란의 침략으로 발해는 멸망하고, 세자인 대광현(大光顯)을 비롯해 발해의 귀족 세력을 중심으로 5만여 명이 고려로 귀순한다. 당시 거란의 황제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요동을 거쳐 세력을 더욱 넓혀가는 과정에서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를 공격해, 20일 만에 발해를 함락시킨다. 이로써 15대 대인선(大諲譔, 재위 906~926)을 끝으로 발해의 역사는 막을 내린다.
발해의 시작은 요동 지역의 고구려 부흥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 유민이었던 대조영이 698년 당나라에 저항해 동모산(東牟山)에 진국(振國)을 세우면서부터다. 당시 고구려 유민과 거란인, 말갈인 등 이민족이 당나라의 관리를 받으며 모여 살던 영주(營州, 현재의 중국 조양)에서 거란의 이진충(李盡忠)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 틈을 타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乞乞仲象)과 말갈인 걸사비우(乞四比羽)가 영주를 함께 탈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숨지자 대조영이 고구려인과 말갈인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 ‘대씨(大氏) 발해’ 시대를 열었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 만이었다.
동모산은 영주에서 동쪽으로 2,000리 거리이며, 대조영의 진국은 신라의 북쪽 및 거란 등과 경계선을 나누고 있었다. 대조영이 동모산에 성곽을 쌓자 ‘고구려에서 달아나 숨었던 세력들이 점차 귀복했다’라고 《신당서》는 전하고 있다. 《구당서》는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別種, 또 다른 종족)’이라고 기록했다. 무왕 대무예도 727년 일본에 처음 파견한 사신을 통해 전달한 국서(國書)에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풍습을 지니고 있다’라고 천명했다. 발해의 건국과 왕성한 활동의 근간에는 고구려 계승 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던 셈이다. 실제 발해에서 지배층은 왕족인 대씨와 고씨(高氏), 장씨(張氏), 오씨(烏氏) 등이 차지했고, 이들은 고구려 출신들이었다. 피지배층인 부곡민 또는 평민은 주로 말갈인들이었다.
이처럼 발해는 대조영부터 15대 국왕에 걸쳐 옛 고구려 땅을 중심으로 웅거하며 고구려 후손으로서의 기개를 떨쳤다. 피지배층인 말갈인과 서로 다른 혈통과 문화, 언어 등으로 사회 구성이 취약했고, 결국 그것이 멸망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발해는 230년에 가까운 발자취를 남기며 우리 역사에 또 하나의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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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사건들의 기승전결,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와 상호작용을 추적하여 5천 년의 한국사를 복합적으로 이해한다. 고대, 고려, 조선, 근대, 현대로 한국사의 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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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발해 무왕의 요동 공략 –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이근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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