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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사를 움
직인 100
대 사건

이자겸의

부와 권력을 독점한 외척의 말로

요약 테이블
시대 1126년

개경의 궁성 동쪽 문인 동화문에 불을 지른 후 척준경을 비롯한 이자겸 일파는 궁궐에 난입해 자신들을 제거하려는 관료와 무장들을 보이는 대로 죽여 버렸다. 척준경은 각 성문에 부하들을 보내 “안에서 나오는 사람은 즉시 죽여라.” 하고 지시했다. 《고려사절요》는 ‘죽은 군사들이 이루 다 셀 수 없었다’라고 기록하였다.

배경

1108년 윤관이 여진을 격파하고 동북 9성을 개척하다.
1122년 예종의 뒤를 이어 인종이 즉위하나 이자겸의 외척 세력에 시달리다.
1124년 이자겸이 자신의 친인척을 정부 요직에 앉히다.

설명

인주 이씨인 이자겸은 인종의 외조부이자 장인이다. 인주 이씨는 개경 최고의 문벌귀족으로, 11대 문종(文宗, 재위 1046~1083)에서 17대 인종에 이르기까지 80여 년 동안 다섯 명의 왕에게 아홉 명의 왕비를 들였다. 이들은 외척으로서 정치에 개입해 왕권과 대립하며 부와 권력을 독점했다. 그 정점에 이른 것이 이자겸이었다.

《고려사》는 이자겸이 매관매직을 일삼아 뇌물로 받은 고기 수만근이 집에서 썩고 있었으며, 백성들의 토지까지 강탈했다고 전한다. 예종(睿宗, 재위 1105~1122)이 죽음 직전에 이자겸의 주장을 받아들여 14세인 태자(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그때부터 이자겸은 절대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그는 인종 즉위 직후, 외척의 발호를 막기 위해 예종의 동생에게 선위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한안인(韓安仁) 등 지방 출신 신진 세력과 예종의 동생 대방공(帶方公) 왕보(王俌) 등 정적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인종과 결혼시켰다.

이자겸의 위세가 날로 커지자 인종과 그 측근들은 이자겸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이자겸을 제거하라는 인종(仁宗, 재위 1122~1146)의 명령을 받은 내시지후(內侍祗侯) 김찬(金粲)과 내시녹사(內侍錄事) 안보린(安甫麟),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지녹연(智祿延) 등은 상장군 최탁(崔卓), 오탁(吳卓), 대장군 권수(權秀), 장군 고석(高碩) 등과 모의해 이자겸 일당을 잡아들여 먼 곳으로 유배시키기로 했다. 평장사(平章事) 이수(李壽)와 전임 평장사 김인존(金仁存)이 “이자겸 무리가 조정에 가득하니 때를 기다리는 게 좋다.” 하고 충고했지만, 인종은 이를 듣지 않았다.

고려 인종 4년인 1126년 2월, 이들은 초저녁에 군사를 거느리고 궁중에 들어가 척준경의 동생인 병부상서 척준신(拓俊臣)과 척준경의 아들 내시 척순(拓純), 지후 김정분(金鼎芬), 녹사 전기상(田其上) 등을 죽여 시체를 궁성 밖으로 던져 버렸다. 이를 알게 된 이자겸과 척준경 등은 두려워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그 일당들을 이자겸의 집으로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척준경은 “일이 급박하다.” 하고는 수십 명을 거느리고 궁성을 넘어가 신봉문(神鳳門) 밖에 이르러 소리를 지르며 기세를 올렸다. 이에 지녹연과 최탁 등은 이자겸 일당이 집결한 것이라고 여기고, 두려워서 바깥으로 나오지 못했다.

이때 인종이 신봉문 위에 나와 척준경의 군사들에게 “왜 무기를 지니고 왔는가.”라고 묻자 이들은 “적이 궁중에 들어왔다기에 사직을 호위하려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인종은 “아무 탈이 없으니 갑옷을 벗고 해산하라.”라고 명령하며, 왕실 창고에 있던 은폐(銀幣)를 줄에 달아내려 이들에게 하사하였다. 그러자 척준경이 화를 내며 칼을 빼어 들고 화살로 공격하라고 명령하였고, 빗나간 화살이 인종의 앞까지 이르게 된다. 이즈음 이자겸은 그 일당을 시켜 “난을 일으킨 자를 내주지 않으면 궁중이 위험해 질 것”이라며 인종을 협박했다. 인종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이자겸은 궁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얼마 후 개경의 궁성 동쪽 문인 동화문(東華門)에서 갑자기 불길이 치솟았다. 불은 바람을 타고 삽시간에 번져 궁궐을 모두 태웠다. 산호정, 상춘정, 상화정의 정자 세 곳과 사찰인 내제석원(內帝釋院)의 행랑 수십 간만이 겨우 남았다. 척신 이자겸(李資謙)의 사돈으로, 여진 정벌 당시 윤관과 함께 공을 세웠던 척준경이 궁궐로 들어가기 위해 동화문 행랑에 불을 지른 것이다.

척준경의 화공(火攻)으로 기세가 오른 이자겸 일당은 궁성 안으로 들어가 최탁, 오탁, 권수, 고석, 안보린 등을 살해했다. 인종을 호위하고 서화문(西華門)으로 빠져나가 연덕궁(延德宮)에 이른 오탁은 척준경의 지시를 받은 낭장 장성(張成)의 칼에 맞아 죽었다. 이자겸은 또 지녹연을 고문한 뒤 지방으로 귀양 보냈는데, 충주에 이르러 지녹연이 더 움직이지 못하자 팔다리를 잘라 길가에 묻어 버렸다. 김찬도 먼 지방으로 유배됐다. 당시 인종은 자신도 해를 당할까 두려워 이자겸에게 왕위를 넘겨주겠다는 조서를 내렸다. 이자겸이 조정 대신들의 비난이 있을까 염려하여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가, 재종형인 이수가 “왕의 조서가 있으나 어찌 감히 그럴 수 있으랴.” 하고 꾸짖자 조서를 인종에게 돌려주었다.

같은 해 3월, 이자겸은 인종을 아예 자신의 집인 중흥택(重興宅) 서원(西院)에 연금하고, 모든 정사를 스스로 주관했다. 이자겸과 척준경의 위엄과 세도가 날로 거세지자, 인종은 다시 이자겸을 제거할 방안을 궁리하였다. 인종은 내의(內醫) 군기소감(軍器小監) 최사전(崔思全)과 상의한 끝에 척준경을 꾀어 이자겸과 이간질시키기로 했다. 이에 인종은 척준경에게 ‘모두가 과인의 죄이다. 지난 일은 생각하지 말고 마음을 다해 보필해 후환이 없도록 하라’라는 내용의 교서를 내린다.

척준경의 마음이 움직이려 할 때 이자겸의 아들 이지언(李之彦)의 종이 척준경의 종과 시비를 벌이다 “네 주인이 왕이 있는 자리에 활을 쏘고 궁중에 불을 놓았으니 마땅히 죽을죄를 지었고, 너 역시 관노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를 전해 듣고 척준경은 격노하였다. 이자겸이 사람을 보내 화해를 청했지만, “너희가 난을 일으키고, 어찌 나만 죽어야 된다 하느냐.” 하며 고향에 돌아가 여생을 보내겠다고 공언했다.

같은 해 5월 인종은 복구된 왕궁으로 돌아갔다. 하루는 이자겸이 인종을 독살하기 위해 떡에 독약을 넣어 넷째 딸인 왕비에게 전했다. 왕비로부터 이 사실을 귀띔받은 인종이 떡을 까마귀에게 주었더니 까마귀가 먹고 죽어 버렸다. 이자겸은 다시 왕비에게 독약을 주며 인종에게 먹이라고 했으나, 왕비가 그릇을 들고 가다 일부러 넘어져 독약을 엎질렀다.

당시 귀족층의 부패에 분노하던 백성들 사이에서는 ‘왕씨(王氏)가 망하고 ‘십팔자(十八子)’가 새 임금이 된다’는 도참설이 유행했다. ‘十八子’란 곧 ‘이씨(李氏)’를 일컫는다. 이에 이자겸은 자신이 임금이 될 것으로 믿고, 왕위를 찬탈하려 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척준경은 마침내 인종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글을 올린다. 그러자 인종은 ‘짐이 해를 당해 왕조가 다른 성씨로 바뀐다면 짐의 죄만이 아니라 보필하는 대신도 수치스런 일이니 대책을 잘 강구하라’라는 내용의 쪽지를 척준경에게 보냈다.

척준경은 장교 일곱 명과 서리, 관노 20여 명을 이끌고 궁궐로 향했다. 급히 서두른 일이라 이들은 각자 목책나무로 몽둥이를 만들어 들고 갔다. 환관 조의(趙毅)가 이들을 궁궐 안으로 인도했고, 순검도령(巡檢都領) 정유황(鄭惟晃)도 100여 명을 거느리고 군기감에 들어가 무기와 갑옷을 나눠 주고 궁궐로 달려갔다. 척준경이 궁궐 전각인 천복전(天福殿)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인종을 호위하고 나왔다. 이때 이자겸의 무리가 활로 척준경을 쏘았으나, 척준경이 칼을 빼어 들고 호통을 치니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이어 인종이 엄중한 호위 속에 군기감으로 이동하자, 척준경은 승선(承宣) 강후현(康侯顯)을 시켜 이자겸을 체포했으며, 그의 처자들과 함께 팔관보(八關寶)에 가뒀다. 또 이자겸을 호위하던 장군 강호(康好)와 고진수(高珍守) 등을 죽이고, 나머지 무리들도 모두 붙잡았다.

이렇게 하여 이자겸의 난은 평정됐다. 이자겸은 영광으로 유배된 지 몇 달 만에 죽었고, 인종의 왕비였던 이자겸의 두 딸은 궁궐에서 쫓겨났다. 이자겸의 측근 30여 명과 사노비 90여 명도 유배됐다. 이자겸을 체포했던 척준경은 얼마 후 ‘궁궐을 침범하고 불사른 것은 만세(萬世)의 죄’라는 좌정언(左正言) 정지상(鄭知常)의 탄핵으로 암타도(巖墮島)로 유배된다.

이자겸의 난을 필두로 고려는 150여 년 동안 반란의 시대를 겪는다. 12세기 들어 문치(文治)의 극성기를 거치면서 권력 독점이 심해지고 지배층이 분열됐으며, 이로써 관료 사회가 흔들리고 민심 이반이 뚜렷해졌다. 이자겸의 난에 이어 이 같은 내부 분열상을 드러낸 것이 바로 묘청의 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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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집필자 소개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정치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국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박찬구 집필자 소개

부산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991년 서울신문사에 입사하여 사회부, 정치부, 미래전략팀을 거쳤으며 현재 국제부에서 근무 중이다.

출처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 저자이근호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역사적인 사건들의 기승전결,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와 상호작용을 추적하여 5천 년의 한국사를 복합적으로 이해한다. 고대, 고려, 조선, 근대, 현대로 한국사의 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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