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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사를 움
직인 100
대 사건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다

을사늑약

을사조약, 乙巳勒約
요약 테이블
시대 1905년

광무 9년인 1905년 11월 17일 일본의 강압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내정 장악을 위해 통감부를 설치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명목은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삼는 것이었지만, 실질은 한국의 주권을 빼앗고 식민지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을사늑약의 체결로 일본은 한국에 대해 식민지에 준하는 통치와 수탈을 자행하였다.

배경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창립되다.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고 한일의정서가 체결되다.
1906년 을사늑약 후 일본이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다.

설명

1905년 9월 27일, 일본 각의는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한 구체적인 절차와 계획을 수립했다. 11월 초를 목표로 보호조약 체결을 추진하되, 한국이 동의하지 않으면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강제 성사시킨다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다. 이를 위한 실무 작업은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맡고, 군 지휘는 한국주차군사령관(韓國駐箚軍司令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담당하도록 했다. 주차군은 1904년 한일의정서에 근거하여 한국에 주둔하던 일본군을 말한다. 총괄적인 정치 교섭은 중추원 의장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맡았다.

이에 따라 이토 히로부미는 11월 9일 서울에 도착하였고, 이를 전후해 송병준(宋秉畯), 이용구(李容九) 등이 이끄는 친일 단체인 일진회(一進會)를 조종해 보호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선전하게 했다. 이어 이토 히로부미는 11월 17일 하야시 곤스케, 하세가와 요시미치와 함께 일본 군대를 이끌고 경운궁 중명당에 들어가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며 을사늑약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 고종은 끝까지 서명을 거부했으나, 일본은 외부대신 박제순의 직인을 가져와 날인토록 했다. 대신들의 조약 체결 회의에서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은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그러나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외부대신 박제순,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다섯 명은 조약 체결에 동의했다. 이들을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고 부른다.

모두 5개 조항으로 된 이른바 을사늑약(乙巳勒約, 제2차 한일협약, 을사보호조약)은 제1조에서 일본 정부가 동경에 있는 외무성을 통해 한국의 외국과의 관계 및 사무를 감리(監理), 지휘한다고 규정했다. 제2조에서는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제3조는 일본이 통감 한 명을 한국 경성에 두되,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도록 했다. 또 일본 정부는 한국의 각 개항장과 기타 일본 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곳에 이사관(理事官)을 두는 권리를 갖는다는 점을 명시했다.

제4조는 일본과 한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에 저촉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효력이 계속되는 것으로 했으며, 제5조는 일본 정부가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함을 보증한다고 규정했다. 조약의 서문에는 그 유효기간을 ‘한국이 실지로 부강해졌다고 인정할 때까지’로 막연하게 명기했다. 이는 유효기간을 두자는 한국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 당초 일본이 제시한 원안과 다른 대목은 이 부분과 제5조 두 곳에 불과했다.

따라서 을사늑약은 불법으로 강요된 늑약(勒約)이었다. 대한국(大韓國) 국제(國制)는 황제가 외국과의 조약권을 가진 것으로 적시했지만, 고종 황제는 을사늑약을 재가하지 않았다. 때문에 이는 당연히 무효인 조약이었다. 한국의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과 일본의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의 이름으로 체결된 조약에는 고종의 위임장이 첨부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약의 명칭도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 조약을 을사늑약이라고도 한다. 고종은 이 같은 점을 들어 조약의 불법성과 무효를 국제 사회에 강력하게 호소했다.

고종은 조약 체결 이후 “짐을 협박하여 조약을 조인했다.”라며 무효를 선언하고, 해외에 친서를 보내 이를 호소했다. 국제 공법학계에서도 조약이 무효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프랑스의 국제법학자 프란시스 레이(Francis Rey)는 조약 체결 직후 〈대한제국의 국제법적 지위〉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극동의 소식통에 따르면 11월 조약은 일본과 같은 문명국이 도덕적으로 비열한 방법과 물리적인 강박에 의해 한국 정부에 강요하여 체결됐다. (……) 조약의 서명은 이토 후작과 하야시 공사가 일본 군대의 호위를 받는 압력 아래서 대한제국 황제와 대신들로부터 얻었을 뿐이다. 대신 회의는 체념하고 조약에 서명했지만, 황제는 즉시 강대국, 특히 워싱턴에 대표를 보내서 맹렬히 이의를 제기했다. 서명이 행해진 특수한 상황을 이유로 우리는 1905년의 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다.

고종의 무효화 선언 움직임이 계속되자 결국 일본은 1907년 7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純宗)을 즉위토록 했다. 연호도 융희(隆熙)로 바꿨다.

을사늑약 체결은 전 국민의 의열 투쟁과 항일 운동을 불러왔다. 전·현직 관료와 유생들이 조약 폐기와 을사오적 처단, 국권 회복 등을 주장하며 상소하고 자결 투쟁을 벌였으며, 수천 명의 군중이 경운궁 앞에 집결해 조약 체결에 항의하는 등 각지에서 집단 시위가 이어졌다. 종로 상인들은 항의의 뜻으로 철시하기도 했다. 고종의 시종무관장인 민영환(閔泳煥)은 좌의정 조병세(趙秉世)와 함께 조약 무효 등을 주장하다 11월 30일 국민에게 유서를 남기고 할복 자결했다. 조병세와 전 참판 홍만식(洪萬植), 전 대사헌 송병선(宋秉璿), 학부 주사 이상철(李相哲) 등은 음독 자결했다. 민영환의 유서는 〈대한매일신보〉 1905년 12월 1일자에 실려 항일 운동을 격화시키는 동력이 되기도 했다. 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치민욕(國恥民辱)이 이에 이르니 우리 인민은 장차 경쟁에서 진멸될 것이로다. (……) 구천에서도 여러분을 기필코 조력하겠으니 (……) 힘을 합하여 우리의 자주독립을 다시 찾으면 죽은 자는 황천에서도 기꺼워하리라.

〈황성신문〉은 11월 20일자에 이토 히로부미를 비난하고 조약의 무효를 알리는 장지연(張志淵)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실었다가 무기 정간을 당했다. 의병들도 각지에서 일어나 일본 군대와 군사 시설을 공격하고 친일파 인사들을 응징했다.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은 충남 내포 지역에서 1,000여 명을 규합해 일본군 100여 명을 사살했으며,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은 74세의 고령으로 전 군수 임병찬(林炳瓚) 등과 함께 900여 명을 모아 전북 태인, 정읍, 순창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대마도로 유배된 뒤 음식물을 거부하고 옥사했다.

평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申乭石)은 농민 300여 명과 함께 경북 영해에서 봉기해 강원, 경상도 일대 해안 지역에서 일본군에게 타격을 입히며 세력을 3,000명으로 키웠다. 정환직(鄭煥直), 정용기(鄭鏞基) 부자는 경북 영천에서 포수와 농민들로 산남창의진(山南倡義陣)을 편성해 청하와 청송 지역에서 활약했다.

시일야방성대곡

〈황성신문〉 1905년 11월 20일자에 실린 장지연의 논설. 장지연은 이 논설에서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리고 이토 히로부미를 비난하였다. 이 때문에 신문은 무기 정간 당했고, 장지연은 체포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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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운데 일본은 당초 의도대로 한국에 대한 준식민지적 침탈 행위를 속속 진행시켜 나갔다. 1905년 12월에는 ‘통감부 및 이사청(理事廳) 관제’를 공포해 서울에 통감부를 두고, 지방기관으로 개항장과 주요 도시 13곳에 이사청, 기타 11곳의 도시에 이사청 지청을 설치했다. 또 같은 시기에 각국 주재 한국 공사를 철수시키고, 한국에 주재하는 각국 공사도 이듬해 철수하도록 했다.

최익현

단발령, 서원 철폐 등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상소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을사늑약 체결 후에는 항일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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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3월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해 통감 정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는 한국 내 일본인 경찰을 1,400명 규모로 늘리며 경찰기구를 강화했고, 통신과 철도, 도로 등 기간 산업을 장악해 나갔다. 광업법을 공포해 일본인을 중심으로 신규 허가를 내주는가 하면, 각급 학교에 일본인 교사를 배치해 식민지 교육 정책을 펴나갔다.

또한 조약 체결 이전에 일본은 이미 영국과 미국, 러시아와 각각 교섭하여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일본은 불법으로 박탈한 외교권을 일방적으로 행사해 1909년 청나라와 간도협약(間島協約)을 체결, 남만주철도 부설권과 무순 탄광 채굴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를 청나라에 넘겼다. 이후 통감부를 통해 정치와 경제, 군사, 교육 등 국정의 전 부문에 걸친 침탈을 강화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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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집필자 소개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정치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국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박찬구 집필자 소개

부산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991년 서울신문사에 입사하여 사회부, 정치부, 미래전략팀을 거쳤으며 현재 국제부에서 근무 중이다.

출처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 저자이근호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역사적인 사건들의 기승전결,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와 상호작용을 추적하여 5천 년의 한국사를 복합적으로 이해한다. 고대, 고려, 조선, 근대, 현대로 한국사의 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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