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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사를 움
직인 100
대 사건
70여 년에 걸친 중국의 침입을 막아내다

안시성 전투

安市城戰鬪
요약 테이블
시대 645년

고구려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킨 지 3년 뒤인 645년, 당 태종 이세민이 직접 이끄는 대군이 고구려 영토인 요동 지역의 안시성을 공격한다. 하지만 안시성의 고구려 병사 및 백성들은 적의 위세에 전혀 동요하지 않고 완강히 저항했다. 결국 정복 전쟁에서 한 차례도 패하지 않았던 당 태종은 3개월 만에 별다른 소득 없이 물러난다.

배경

665년 연개소문 사망하고 아들 남생이 당나라로 망명하다.
668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 공격으로 보장왕이 항복하고 고구려가 결국 멸망하다.
698년 대조영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진으로 하였으며, 713년에는 국호를 발해로 바꾼다.

설명

당시 고구려는 요하(遼河)의 바로 동쪽 영토에 북에서 남으로 신성(新城), 현토성(玄菟城), 개모성(蓋牟城), 요동성(遼東城), 건안성(建安城), 백암성(白巖城), 안시성, 오골성(烏骨城) 등을 두고 당나라의 침공에 대비해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644년 11월, 당 태종은 고구려와 전면전을 선언하고 수륙 양쪽으로 침공했다.

백암성

고구려는 요하 동쪽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당나라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백암성은 고구려 서부 지방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였다.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의 잦은 침략에 시달리던 신라가 지원을 요청하자, 당 태종이 ‘당나라를 섬기는 신라를 다시는 침범하지 말라’라는 내용의 서신을 연개소문에게 보냈으나, 연개소문은 이를 묵살했다. 연개소문은 이어 당 태종의 사신 장엄(蔣儼)을 아예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러자 당 태종은 “임금과 대신들을 죽인 데 이어 이제 내 명령까지 어기니 토벌해야겠다.” 하며 직접 전장에 나간다. 이세적(李世勣)이 이끈 당나라의 육군 6만 명은 645년 4월 요하를 건너 신성과 현토성 쪽으로, 장량(張亮)이 지휘한 수군 4만 명은 전선 500척을 이용해 요동 반도에 상륙, 비사성 쪽으로 진격했다. 당 태종은 5월쯤 이세적의 육군에 합류했다.

이들은 개모성과 요동성, 백암성, 요동의 고구려 해군 기지인 비사성을 잇따라 점령하며 초반 기세를 올린 뒤 안시성으로 향했다. 당시 당 태종의 목표는 평양성 함락이었다. 하지만 원정길에 오른 당나라로서는 군량을 조달할 수 있는 보급로를 확보하지 않으면 전쟁을 제대로 치를 수 없었다. 또 비사성을 함락시킨 장량의 수군이 보급로를 뚫을 수 있었으나 고구려군의 반격에 밀려 압록강 쪽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바람에 이마저도 기대할 수 없었다.

때문에 요동 지역의 고구려 성을 점령하지 않은 채 평양성으로 직행하는 것은 고구려에게 배후 공격을 허용한다는 점, 군량 보급로가 끊겨 병사들이 굶주릴 수 있다는 점에서 다소 무모한 전략이었다. 특히 연개소문이 이 같은 상황을 간파하고 요동과 요서 지역의 주요 거점 지역을 중심으로 청야전술을 펴는 바람에 당 태종은 오골성을 거쳐 바로 평양성으로 가는 방안 대신 일단 안시성을 치는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당나라군이 안시성을 공격하자 연개소문은 북부의 욕살(褥薩, 군주) 고연수와 남부의 욕살 고혜진이 이끄는 15만 명의 지원군을 현지로 급파한다. 하지만 당 태종의 노련한 전술에 걸려들어 2만여 명이 전사하고, 고연수와 고혜진은 당에 투항한다. 포로만 3만 6,0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다 보니 안시성은 지원군도 없이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당 태종의 대군을 상대해야 했다. 안시성 외곽에 자리 잡은 당나라는 돌을 날리는 포차(砲車)와 성을 부수는 충차(衝車) 등을 총동원해 하루 대여섯 차례씩 파상 공세를 폈지만, 양만춘 장군의 통솔력과 병사들의 투지로 성곽을 뚫지 못했다. 고구려군은 당 태종의 깃발을 보고 북을 치고 야유를 보내는 등 오히려 적군을 조롱하기까지 했다. 이세적이 “안시성을 빼앗으면 남자는 모조리 구덩이에 묻어 버리겠다.” 하고 격분할 정도였다.

이에 당 태종은 고민 끝에 안시성 옆에 높은 흙산을 쌓아 그 위에서 화살 공격을 펴기로 하고, 연인원 50만 명을 동원해 흙산을 완성한다. 그런데 때마침 큰비가 내리는 바람에 흙산 일부가 안시성을 덮쳐 성벽 한쪽이 뚫려 버렸다. 그러자 안시성 안에 있던 고구려 군사들이 재빨리 움직여 흙산 위를 차지했다. 이 일로 흙산을 지키도록 지시받은 부복애(傅伏愛)가 당 태종의 명에 의해 처형됐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밤낮으로 흙산 쌓기를 계속해 안시성 안을 굽어보게 되었다. 부복애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산꼭대기에 머무르며 지키게 했는데 산이 무너져 성을 눌러 무너뜨렸다. 마침 복애가 자리를 비워 고구려군 수백 명이 무너진 곳에서 나와 흙산을 점거하고 주위를 깎아 지켰다. 당주(唐主)는 노하여 복애를 참수했다.

흙산을 빼앗긴 뒤 당나라 군대는 사력을 다해 사흘 밤낮을 공격했지만, 안시성은 무너지지 않았다. 시일이 갈수록 군량이 바닥나기 시작한 당나라는 9월이 다가와 날씨까지 추워지자 고구려 침공을 포기하고 결국 퇴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당나라군에겐 퇴로가 더욱 험난했다. 고구려군의 추격으로 요하 하류로 몰린 당나라군은 할 수 없이 늪지대를 통해 철수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고구려 군에 의해 엄청난 사상자가 나왔으며, 당 태종도 이때 병을 얻었다. 양만춘이 전투 과정에서 화살을 쏘아 당 태종의 눈에 맞혔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이후 당 태종은 647년부터 649년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도 요동 지역과 대동강 유역에 대해 간헐적인 침공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때마다 고구려 군에 밀려 퇴각하면서 안시성 전투에서의 패배를 만회할 기회를 잃었다.

안시성 전투

안시성주 양만춘과 성민들은 결사적으로 방어하여 당 태종의 침공군을 결국 막아냈다. 안시성 전투는 당나라의 공격을 막은 것뿐만 아니라 시간과 물자를 허비하게 함으로써 이후 당나라의 고구려 공격을 좌절시켰다.

ⓒ 전쟁기념관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당 태종은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면서 〈선전조서(宣戰詔書)〉를 통해 반드시 이길 수밖에 없는 다섯 가지의 이유를 밝혔다. 큰 나라로 작은 나라를 치고, 순리로 역리를 치고, 안정된 나라로 어지러운 나라를 치고, 건강한 몸으로 피로한 몸을 치고, 기쁜 백성이 원망하는 백성을 치기 때문에 필승할 수 있다며 군사들의 사기를 드높였다. 하지만 당 태종의 그 같은 의지와 자신감은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다.

이처럼 고구려는 결사항전의 자세로 당나라를 물리친 것은 물론 청야전술로 식량 보급로를 끊고, 안전한 퇴로를 차단해 요하 하류로 적군을 몰아가는 등 전략적 측면에서 당나라를 압도했다. 반면 속전속결로 고구려 수도로 남하하려던 당 태종의 구상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전쟁 초반 한때 방어선이 무너지며 흔들렸던 고구려가 안시성 전투를 통해 승기를 잡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물론 고구려의 피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초기 백암성 전투에서는 남풍에 불화살 공격을 받고 고구려군 1만 명이 사망하고, 5만 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50만 석의 곡식을 빼앗겼다. 10일 만에 함락된 개모성 전투에서는 10만 석의 곡식을 잃었다. 고연수 등이 이끈 안시성 지원군도 대패하여 항복했다. 하지만 고구려는 위기의 순간에 저력을 발휘하며 당 태종을 물리치고, 수·당과의 70여 년간에 걸친 전쟁을 마침내 승리로 이끌며 한반도를 중국 세력으로부터 지켜냈다.

당나라 대군이 잇따라 고구려에게 패배하자, 당나라 중신(重臣) 방현령(房玄齡)이 표문을 올려 고구려 침공의 무모함을 진언했다는 《구당서(舊唐書)》의 기록에서 당시 당나라 내부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당 태종은 649년 4월 숨을 거두기 직전 유언에서 “나의 자식들은 고구려를 공격하지 마라. 이길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고구려를 공격하다가 오히려 당나라가 위태로울 수 있다.” 하는 경고를 남겼다.

안시성 전투에서 고구려가 승기를 잡지 못했다면, 또 연개소문이 당과의 전쟁에서 치밀하고 효과적인 전략을 구사하지 못했다면, 한반도의 상당 부분이 당의 수중에 들어가는 위기를 맞았을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안시성 전투는 단순히 고구려와 당의 영역 다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를 침탈하려는 중국 세력으로부터 우리 민족의 기반을 지켜낸 역사적인 현장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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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집필자 소개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정치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국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박찬구 집필자 소개

부산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991년 서울신문사에 입사하여 사회부, 정치부, 미래전략팀을 거쳤으며 현재 국제부에서 근무 중이다.

출처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 저자이근호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역사적인 사건들의 기승전결,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와 상호작용을 추적하여 5천 년의 한국사를 복합적으로 이해한다. 고대, 고려, 조선, 근대, 현대로 한국사의 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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