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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139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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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고 깨끗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열망으로 등장한 조선은 건국 이후 채 10년도 되지 않아 피비린내 나는 내홍을 두 차례나 겪는다. 1398년과 1400년에 벌어진 왕자의 난은 개국 공신과 왕자들을 하루아침에 적과 동지로 갈라놓았다. 군권과 신권이 국정 주도권을 놓고 충돌하고, 왕자들이 왕위 계승권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골육상쟁의 혈전을 벌였다. 음모와 칼부림, 권력 투쟁으로 조선 왕조는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배경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다.
1394년 한양으로 천도하다.
1395년 정도전 주도로 경복궁 건축이 마무리되다.
설명
태조 이성계는 첫째 부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와의 사이에 여섯 형제를 두었다. 방우(芳雨)와 방과(芳果), 방의(芳毅), 방간(芳幹), 방원(芳遠), 방연(芳衍)의 순이었다. 또 둘째 부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에게서는 방번(芳蕃)과 방석(芳碩) 두 아들을 얻었다.
제1차 왕자의 난은 태조가 1392년 8월 한씨 소생 왕자들 대신 강씨에게서 난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면서부터 그 싹이 텄다. 한씨는 1년 전 이미 세상을 떠났고, 당시에는 강씨가 태조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강씨는 태조의 최측근인 정도전을 비롯해 신진 사대부 출신들과도 가까이 지냈다. 세자로 책봉될 때 방석은 나이가 열한 살에 불과했고, 때문에 정도전이 후견인 역할을 하며 방석을 보호했다.
당초 방원은 아버지 태조에게 맏형인 방우의 세자 책봉을 건의했고, 공신 배극렴(裵克廉)과 조준은 방원이 세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태조가 세자 책봉에 대한 의견을 묻자 배극렴은 “시국이 평탄할 때는 적자(嫡子)가, 어지러울 때는 공(功)이 있는 사람을 내세워야 한다.”라며 개국 과정에서 정몽주를 제거하는 등 공을 세운 방원을 추천했다. 하지만 태조는 이 같은 의견들을 모두 뿌리치고 방원의 이복동생인 방석을 세자로 선택했다.
이처럼 세자 책봉 문제에서 정도전과 방원의 길은 엇갈린다. 그뿐만 아니라 두 사람은 사병 문제와 국정 운영의 주도권을 놓고도 팽팽하게 대립했다.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은 재상이 최고 실권자가 되는, 이른바 신권 중심의 왕정을 이상적인 정치 체제로 여겼다. 이를 위해 왕족들이 거느리고 있는 사병을 혁파하고, 중앙 정부가 병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사병을 거느리고 있는 왕족들을 무력화하겠다는 뜻으로, 방원을 비롯한 왕자들에게 엄청난 위기의식을 안겨 줬다.
정도전은 때마침 불거진 요동 정벌론을 사병 혁파 및 병권 집중의 명분으로 삼았다. 명나라는 1396년 조선에서 보낸 표전(表箋, 공식 외교 문서)과 국서(國書)에 자국을 모욕하는 무례한 구절이 있다며, 그 작성자인 정도전을 명나라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이에 태조와 정도전이 명나라와 정면 대결하기로 하면서 요동 정벌론이 대두됐다. 정도전은 요동 정벌을 준비하기 위해 전시(戰時)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하는 진법 훈련을 실시하겠다며 왕족이 거느린 사병까지 훈련을 받도록 했다. 이참에 사병을 국가의 군 지휘 체계로 끌어들이겠다는 의도였다. 태조도 진법 훈련을 허락했지만, 정도전의 의도를 알아차린 방원과 방간, 방의 등은 자신의 사병을 훈련에 보내지 않았다. 이에 왕자들은 왕명을 어긴 셈이 되었고, 이들의 부하장수들이 태형(笞刑)을 받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세자 책봉에서 밀려난 데다 사병 문제까지 불거지자 방원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사병까지 내놓고 정도전의 실권 장악을 허용하든지 아니면 거사를 도모하든지, 둘 중 하나였다. 사병을 내놓고 백기를 들더라도 정도전 일파에게 언제 제거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즈음에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沈孝生) 등이 병중인 태조가 위독하다고 속여 한씨 소생 왕자들을 한꺼번에 궁중으로 불러 모은 뒤 이들을 모두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말이 돌았다.
마침내 거사를 결심한 방원은 1398년 8월 25일 그의 처남 민무구(閔無咎), 민무질(閔無疾), 이숙번(李叔蕃), 조준, 하륜, 이거이(李居易), 박포(朴苞) 등과 함께 정도전 일파의 음모를 미리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사병을 동원해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 등을 습격해 살해했다. 또 세자 방석을 폐위시켜 귀양 보내는 길에 죽였다. 방석의 형인 방번도 이때 죽었다. 이것이 제1차 왕자의 난이다. 방원의 난, 정도전의 난이라고도 한다. 무인년에 일어났다 해서 무인정사라고도 부른다.
당시 병중이던 태조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방원을 불러 “혈육을 무참히 죽이다니 천륜도 모르느냐.” 하며 진노했다. 1396년 강씨가 병으로 죽은 뒤 태조는 방번과 방석 두 형제를 극진히 아꼈다. 게다가 그의 최측근인 정도전마저 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사실에 태조는 상심하여 왕위를 내놓고 정치에서 물러난다.
방원이 정도전 일파와 방석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자 하륜, 이거이 등은 방원을 세자로 내세우려고 했으나 방원은 스스로 이를 사양했다. 대신 둘째 형인 방과가 세자에 책봉돼 태조의 뒤를 이어 왕에 오르니 그가 2대 정종(定宗, 재위 1398~1400)이다. 정종은 1399년 3월 한양의 터가 좋지 않다며 조정을 다시 개경으로 옮기고, 8월에는 권세가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하급 관리가 상급 관리를 방문하지 못하게 하는 분경금지법(奔競禁止法)을 만들었다.
이즈음 제1차 왕자의 난 당시 “정도전 등이 방원을 제거하려 한다.” 하고 밀고하는 등 방원을 도왔던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박포가 논공행상 과정에서 일등공신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다. 방원은 이를 알고 그를 죽주(竹州, 영동)로 귀양 보냈다가 얼마 후 다시 불러들였다. 박포는 방원에 대한 앙심이 깊어져 방원의 형인 방간을 찾아가 “방원의 눈초리를 살펴보니 조만간 공을 죽일 것 같다. 그러니 선수를 쳐야 한다.”라고 거짓말로 부추겼다.
당시 정종이 적자가 없었기 때문에 방간은 왕위에 욕심이 있었다. 이에 방간이 처조카인 교서관(校書館) 판사(判事) 이래(李來)에게 이를 의논하자, 이래는 방원에게 찾아가 방간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일렀다. 결국 1400년 정월, 방간은 박포와 함께 사병을 동원해 난을 일으켰고, 두 형제가 이끄는 군사들은 개경 한복판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이때 방원은 자신의 군사들에게 “내 형을 해치는 자는 목을 베겠다.”라고 말했다. 방간은 선제공격을 했지만, 군사 숫자가 워낙 많은 방원 쪽을 당해 내지 못했다. 결국 패하고 도망치던 방간과 박포는 방원의 군사들에게 붙잡혔다. 방원은 조정 대신들의 요청에도 방간을 죽이지 않고 토산으로 귀양 보냈다. 박포는 유배지에서 처형당했다.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두 왕자 간의 싸움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이를 제2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박포의 난, 방간의 난으로도 불린다.
제2차 왕자의 난으로 방원의 반대파가 거의 제거되자 방원의 입지는 더욱 굳어졌다. 그리고 심복인 하륜의 주청이 받아들여져 1400년 2월에 방원은 세자로 책봉됐다.
제2차 왕자의 난 이후 정종은 분란의 불씨가 됐던 사병을 혁파하고, 병권을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로 집중시켰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당시 권근(權近)은 “신하가 사병을 소유하면 반드시 군주를 위협하게 된다.” 하며 사병 혁파를 건의했다. 또 도평의사사를 의정부(議政府)로, 중추원(中樞院)을 삼군부(三軍府)로 고치고 양쪽을 겸직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로써 정무는 의정부가, 군정은 삼군부가 담당해 정무와 군정을 분리시켰다. 이 모든 것이 방원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당초 정종은 권력에 대한 욕심이 많지 않았고, 동생인 방원이 조정을 거의 장악한 상태여서 왕위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았다. 왕비인 정안왕후(定安王后) 김씨도 왕위에 계속 머물다간 방원에게 죽임당할 수 있으니, 정종에게 물러날 것을 권했다고 한다. 이에 정종은 1400년 11월 왕위를 세자인 방원에게 물려준다.
이로써 3대 태종(太宗, 재위 1400~1418)의 시대가 열렸다. 두 차례의 난을 직접 치른 태종은 왕위에 오르자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제 확립을 위해 대다수 공신과 외척들을 제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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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사건들의 기승전결,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와 상호작용을 추적하여 5천 년의 한국사를 복합적으로 이해한다. 고대, 고려, 조선, 근대, 현대로 한국사의 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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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제1차 왕자의 난 –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이근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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