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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99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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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6대 성종 치하, 993년 10월 청천강 이북 지역인 봉산 인근의 거란군 진영에서 고려 원정군 총사령관인 소손녕과 고려의 서희가 강화 회담을 벌였다. 이 회담에서 서희는 거란이 고려를 침공함으로써 벌어진 양국 간의 1차 전쟁을 외교적 담판으로 종식시켰다.
배경
945년 정종이 즉위하면서 광군을 조직하고, 후진에게 거란 공격을 요청하다.
956년 광종이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왕권을 신장시키다.
982년 최승로가 〈시무 28조〉를 올려 정치 체제를 정비하게 하다.
설명
중군사(中軍使) 서희(徐熙)가 거란 진영으로 출발할 때, 성종(成宗, 재위 981~997)은 강나루까지 나와서 작별인사를 하며 손을 잡고 위로하였다고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다. 서희로서는 그만큼 비감한 심정으로 회담을 맞고 있었다. 처음 서희가 국서(國書)를 가지고 거란 진영에 도착하자 소손녕(蕭遜寧)은 ‘대조(大朝)의 귀인’을 자칭하며 서희에게 뜰에서 절을 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서희는 ‘두 나라 대신이 보는 자리’라며 이를 거절했다. 소손녕이 세 차례나 서희를 물리치자 서희는 아예 숙소에서 두문불출했다. 그러자 소손녕은 할 수 없이 서희를 받아들여 동서로 마주 보며 회담을 시작했다.
이 회담에서 소손녕이 서희에게 제기한 쟁점은 두 가지였다. 고려가 거란의 영토를 침식하고 있다는 것과 고려가 거란 대신 송나라에 사대(事大)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 차지가 되었는데 너희가 쳐들어와 이를 차지했다. 또 우리와 땅을 접하고 있으면서 바다를 건너 송을 섬기고 있다.”
소손녕의 논리는 옛 고구려가 거란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고, 고구려 유민이 일으킨 발해를 거란이 점령하고 있으니 결국 고구려의 땅은 거란의 영역이며, 때문에 고려가 북쪽으로 밀고 올라오는 것은 거란의 영토를 갉아먹는 행위라는 것이었다. 또 고려가 거란과 관계를 끊고 송나라에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펴고 있으므로, 송나라가 고려와 함께 거란을 협공하려 한다는 얘기였다. 소손녕은 “땅을 떼어 바치고 국교을 연다면 무사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서희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으며, 오히려 소손녕을 공박했다.
“우리나라가 곧 고구려의 옛 땅이다. 만약 땅의 경계를 논한다면 상국(上國)의 동경(東京)도 모두 우리 땅인데, 어찌 침식이라고 하는가.”
이어서 서희는 “우리나라가 고구려를 계승하여,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을 수도로 삼았다. 또 압록강 내외도 우리의 경내인데 지금 여진이 길을 막고 있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다. 거란에 사신이 오가지 않는 것은 여진 때문이다.” 하고 말했다.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국이며, 땅으로 치자면 거란이 동경으로 삼고 있는 요양도 고려의 땅 안에 있는 셈이니 어찌 고려가 거란의 땅을 차지했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당시 동경 유수는 바로 소손녕이었다. 서희는 또한 여진이 고려의 땅인 압록강 내외를 차지하여 굳게 버티며 도로를 막고 있어 거란과의 사이에 조빙(朝聘, 나라끼리 사신을 보내는 일)의 길이 통하지 않는 것이라며 “만약 여진을 축출하고 고려의 고토(古土)를 돌려주면 감히 조빙을 닦지 않겠는가.” 하고 소손녕을 설득했다. 여진 땅을 고려가 지배하면 거란과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겠다는 것이었다.
국제 정세에 식견이 깊고 외교 역량이 탁월한 서희는 거란의 의도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거란의 주목적은 중원의 송나라를 정벌하기에 앞서 배후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고려의 요동 지역 진출 및 송나라와의 연결을 차단하고, 여진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해두자는 것이었다. 결국 소손녕은 서희의 뜻을 받아들였고, 거란 성종(聖宗)도 “고려가 화해를 청하니, 마땅히 군사를 되돌려야 할 것”이라며 대군을 철수시켰다.
양국 간의 합의에 따라 고려는 압록강 이동 지역에 강동 6주를 설치하여 행정 구역에 포함시켰다. 강동 6주는 용주(龍州, 용천), 철주(鐵州, 철산), 통주(通州, 선천), 곽주(郭州, 곽산), 귀주(龜州, 귀성), 흥화진(興化鎭, 의주)으로, 고려가 개국 이래 압록강 이동 지역을 확보한 것은 처음이었다. 현재의 평안북도 일대 영토를 완전히 회복한 것이다.
《고려사》는 ‘(994년에)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 주변의) 여진을 내쫓고 장흥(長興), 귀화(歸化) 두 진과 곽주, 귀주 두 주에 성을 쌓았다’라고 적고 있다. 고려는 또 995~996년에 안의진, 흥화진, 선주, 맹주에 각각 성을 쌓는 등 압록강 이동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히 다졌다. 이와 함께 고려는 거란과의 약속대로 995년부터 정식 사절을 파견하고, 거란의 연호인 통화(統和)를 쓰는 등 사대 관계를 맺었다.
반면 거란이 압록강 하류의 요충지인 보주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가 압록강 너머 서북방을 개척하기는 쉽지 않게 됐다. 거란은 고려 침공을 앞둔 991년 압록강 하류 이남의 보주 지역에 내원성(來遠城)을 축조했다. 1차 침공 때 거란이 압록강을 손쉽게 건널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당시 서희가 소손녕과 담판을 지으러 가기까지 고려 조정은 화친론과 주전론으로 나뉘었다. 거란은 10월 초 압록강을 넘어 군사 요충지인 봉산에서 고려군을 격퇴하고, 고려의 선봉군을 이끈 윤서안(尹庶顔)을 사로잡았다. 그러자 성종은 고려군 총지휘사령부가 있는 안북부를 방문하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서경에 머무르며 서희를 전선에 투입했다.
소손녕은 봉산 전투에서 승리한 뒤 더 이상 남하할 생각을 하지 않고 ‘귀부(歸附)하지 않으면 소탕할 것’이라며 항복을 요구하는 문서를 보냈다. 서희가 이를 조정에 보고하자, 성종은 이몽전(李蒙戩)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그러나 소손녕은 “80만 군사가 이르렀는데 항복하지 않으면 마땅히 죽일 것”이라며 거듭 항복을 요구했다. 그러고는 청천강 하구 남안의 안융진으로 치고 들어왔다. 안북부에서 서쪽으로 2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고려의 중랑장 대도수(大道秀)와 낭장 유방(庾方)이 거란의 기습 공격을 물리치면서 전선은 그대로 유지됐다.
이즈음 성종은 거란의 항복 요구가 잇따르자 중신들을 모아 놓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일부 중신들은 “국왕이 개경으로 돌아가서 중신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항복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전쟁에 따른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자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이는 거란의 속국이 되어 내정 간섭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자초한다.
그러자 또 다른 중신들은 “서경 이북 땅을 떼 주고 황주(黃州, 황해도 북쪽)에서 절령(岊嶺, 황해도 서흥 자비령)에 이르기까지 영토로 삼아야 한다.” 하고 말했다. 현재의 평안도를 거란에게 모두 내주자는 것이었다. 성종은 거란에게 땅을 떼 주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리하여 서경창(西京倉)에 있는 쌀을 백성들이 가져가게 하고, 그래도 남은 쌀은 거란에게 내주지 않기 위해 대동강에 던지게 했다.
이에 서희가 “식량이 넉넉하면 성도 지킬 수 있고 싸움에서도 이길 수 있다.” 하고 말리자, 그제야 성종은 쌀을 버리지 않게 했다. 다시 서희가 “거란이 큰소리를 치는 것은 고려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며, (……) 땅을 떼어 적에게 주는 일은 만세(萬世)의 치욕이니, 한번 싸운 뒤에 다시 의논해도 늦지 않다.” 하자, 성종은 마음을 돌렸다. 이렇게 해서 서희는 자진해서 국서를 들고 소손녕의 진영으로 향했다. 그리고 서희는 싸우지도 않고, 적장과의 담판을 통해 거란의 대군을 물리치고, 압록강 이남의 영토까지 얻어냈다.
고려와 거란 간의 1차 전쟁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거란은 17년 후 또다시 고려 정벌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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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사건들의 기승전결,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와 상호작용을 추적하여 5천 년의 한국사를 복합적으로 이해한다. 고대, 고려, 조선, 근대, 현대로 한국사의 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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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서희의 담판 –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이근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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