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시대 | 1274년 |
---|
1274년 10월, 원나라 쿠빌라이는 고려와 연합군을 조직해 일본 정벌을 시작한다. 마침내 여원 연합군은 일본 영토에 도착하여 대규모로 전투를 벌였으며, 일본군은 연합군에게 거듭 패배당하였다. 하지만 지휘부 내에서 몽골과 고려의 의견이 대립하는 가운데, 연합군 함대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귀환해야 했다. 이로써 여원 연합군은 일본 정벌에 실패하였다.
배경
1270년 배중손을 위시로 삼별초가 원나라에 항거하다.
1271년 삼별초군이 탐라로 이동하다.
1273년 원나라가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제주도를 장악하다.
설명
여원 연합군의 일본 정벌은 쿠빌라이, 즉 원 세조(世祖, 재위 1260~1294)의 영토 확장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재위 기간에 중국 대륙을 장악한 쿠빌라이는 동북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조공을 거부하는 일본을 정복하겠다는 야욕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고려를 일본 정벌의 디딤돌로 삼아 군사와 군량, 전함 등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이에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염려한 고려는 일본 정벌을 막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40여 년에 걸쳐 전란이 계속된 터라 나라와 민생은 거의 도탄에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이미 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한 처지였으므로 쿠빌라이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당초 쿠빌라이는 군사를 일으키기보다 회유 전략으로 일본을 복속시키기 위해 1266년 이후 일본을 여러 차례 설득했으나, 일본은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1266년에는 추밀원부사 송군비(宋君斐)의 안내로 일본에 가던 원나라 사신이 풍랑을 맞아 되돌아왔다. 그러자 몽골에 투항한 고려인 조이(趙彝)가 “고려와 일본이 선린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원나라에 공동으로 대적할 뜻을 갖고 있고, 때문에 송군비가 고의로 일본의 사신 행렬을 방해했다.”라고 쿠빌라이에게 보고한다. 송군비가 원나라로 가서 해명했지만, 쿠빌라이는 고려를 불신하며 계속 압박했다.
이듬해에는 기거사인(起居舍人) 반부(潘阜)를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 쿠빌라이의 친서를 전달하도록 했으나 일본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쿠빌라이는 당시 고려 원종에게 조서를 보내 “이제 다시 사신을 보내 반드시 일본에 도달시키려 하니 당신은 마땅히 중신으로 하여금 인도하게 하고 전과 같이 지체시키고 방해하지 말라.”라고 경고한다.
1268년에는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신사전(申思佺)과 반부 등의 안내로 일본으로 향하던 원나라 사신 흑적(黑的), 은홍(殷弘)이 대마도에서 일본인 두 명을 사로잡아 원나라로 돌아갔다. 이에 쿠빌라이는 크게 기뻐하며 이들을 일본으로 보내 원나라의 뜻을 전하도록 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답이 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1272년 7월, 금주(金州, 김해)에 일본 배가 정박했다. 당시 경상도 안무사(按撫使) 조자일(曹子一)은 고려가 일본과 왕래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원나라에게 문책을 당할 것이 우려되어 일본 배를 은밀하게 돌려보냈다. 이 일을 알게 된 홍다구는 쿠빌라이에게 이를 알리고 조자일을 문초하고 죽여 버린다.
마침내 쿠빌라이는 무력으로 일본을 정벌하기로 결심하고 1274년에 본격적으로 전쟁을 준비한다. 고려에게는 전함을 건조하고 군사와 쌀을 지원하도록 했다. 전함 건조를 위해 고려인 3만여 명이 징집되기도 했다. 《고려사절요》는 ‘여러 가지 일이 매우 번거롭고 바쁘며, 기한이 급박하여 몰아치기를 바람과 번개 같이 하니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했다’ 하고 적고 있다. 같은 해 2월에는 ‘공사 재물이 모두 고갈되었고 또 배를 건조하는 일로 농사지을 때를 잃게 됐으니 비단으로도 양곡을 사기 어렵지 않을까 두렵다’라는 내용의 표문을 원나라에 보냈다. 하지만 고려의 간곡한 호소도 쿠빌라이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은 드디어 일본 정벌을 감행한다. 몽골군과 한(漢)군 2만 5,000명, 고려 육군 8,000명과 수군 6,700명으로 모두 4만 명 규모였다. 고려군은 동남도도독사(東南道都督使) 김방경이 통솔했고, 몽골군은 도원수 홀돈(忽敦)이 이끌었다. 이들은 전함 900여 척에 나눠 타고 합포(마산)를 출발해 대마도(大馬島, 쓰시마 섬)를 장악한 뒤 일기도(壹岐島, 이키 섬)로 나아가 언덕 위에 진을 치고 있던 일본군과 싸워 승리를 거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1,000여 명이 몽골이군 우부원수(右副元帥) 홍다구와 고려군 지병마사(知兵馬事) 박지량(朴之亮) 등에 의해 전사했다.
이어서 여원 연합군은 규슈, 하카다 만, 사와라 등지에 상륙해 일본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이곳에서도 일본군은 연합군을 당해 내지 못하고 내륙 쪽으로 계속 밀렸다. 특히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군에 의해 일본군은 참패를 당했다. 《고려사》는 일본군의 쓰러진 시체가 삼대(삼의 줄기)와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지켜본 홀돈은 “몽골인이 잘 싸운다고 하지만, 이 이상 더 잘할 수는 없다.” 하고 감탄할 정도였다.
날이 저물고 전투가 그치자 연합군 지휘부는 이후 전략을 논의했는데, 여기에서 의견이 서로 엇갈린다. 김방경은 홀돈과 홍다구에게 “적의 땅에 들어와 스스로 힘을 다하여 싸우니, 배수진을 치고 계속 공격해야 한다.”라며 육지에 교두보를 확보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홀돈은 “군사의 수가 적고 피로하니, 많은 적군과 싸우는 것은 완전한 계책이 아니다.” 하며 삼랑포에 정박한 전함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반박했다. 때마침 몽골군 좌부원수(左副元帥) 유복형(劉復亨)이 일본군의 화살에 맞아 전함으로 향하니, 홀돈의 주장대로 연합군은 삼랑포로 물러났다.
하지만 전함으로 돌아간 연합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밤새 바람이 심하게 불고 비가 내려 삼랑포에 있던 전함 900여 척 가운데 200여 척이 바위와 벼랑에 부딪혀 침몰했기 때문이다. 고려군 좌군사 김신(金侁)을 비롯해 수많은 군사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 특히 몽골이 일본 정벌을 서두르기 위해 고려에게 전함 건조를 재촉한 나머지 4개월 만에 급조된 전함이어서 피해가 더 컸다. 연합군으로서는 더 이상 작전이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셈이다. 이로 인해 연합군은 황급히 귀환하였다.
연합군이 11월 합포로 되돌아왔을 당시 생환하지 못한 군사는 1만 3,500여 명에 이르렀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1308)이 즉위한 지 4개월, 원나라의 거듭된 독촉에 따라 감행된 여원 연합군의 1차 일본 정벌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1차 원정에 실패한 원나라는 1280년 2차 일본 정벌을 준비하기 위한 기구로 개경에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정동행성)을 설치한다. 1281년 5월, 여원 연합군은 마침내 다시 일본으로 향한다. 김방경의 고려군과 흔도와 홍다구의 몽골이군 및 한군을 합해 동로군(東路軍) 5만 명이 전함 900척에 나눠 타고 먼저 출동했고, 남만(南蠻)의 범문호(范文虎)가 이끄는 강남군(江南軍) 10만 명이 전함 3,500척과 함께 후발대로 합세했다.
연합군은 먼저 대마도의 일본 수비대를 격퇴한 뒤 일기도를 점령했다. 이어 하카다 만에서 육지로 진격하려던 연합군은 일본이 해안선 20킬로미터를 따라 설치한 높이 2미터 안팎의 방루에 막혀 상륙 작전을 포기했다. 연합군의 1차 정벌 이후 일본은 방어 진지를 구축하며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연합군은 방루를 피해 인근 섬에서 여러 차례 전투를 벌이며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그러던 중 홍다구의 몽골군이 6월 초 지하도(志賀島, 시카노 섬)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크게 패한다. 김방경의 고려군은 일본군 300여 명을 죽였지만, 홍다구는 일본군에게 돌파되어 패주하다가, 몽골이군 사령관 왕만호(王萬戶)의 지원으로 겨우 목숨을 건졌다. 연합군은 이튿날 전투에서도 패배한 데다 때마침 군중에 전염병이 돌아 3,000여 명이 죽는 바람에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이에 흔도와 홍다구는 회군을 논의했으나 김방경은 “강남군이 도착하면 힘을 합쳐 다시 공격하자.”라며 반대했다.
얼마 뒤 강남군이 전장에 도착하자, 연합군은 다시 전열을 갖춰 하카다 만에 대한 일대 공세를 준비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태풍이 연합군의 전함을 강타해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강남군이 모두 물에 빠져, 그 시체가 밀물과 썰물에 밀리는 바람에 항구가 막혀 밟고 다닐 정도였다. 이로써 여원 연합군의 2차 일본 정벌도 실패하였다.
일본은 두 차례나 자신들을 지켜 준 태풍을 신풍(神風, 가미카제)이라고 불렀다. 2차 정벌에서 원나라 쪽은 10만여 명, 고려는 7,000여 명이 전사했다. 잇따른 실패에도 쿠빌라이는 1294년 사망할 때까지 일본 정벌에 대한 야욕을 버리지 않았고, 이에 따라 고려의 물질적 피해와 노동력 손실도 계속됐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글
출처
역사적인 사건들의 기승전결,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와 상호작용을 추적하여 5천 년의 한국사를 복합적으로 이해한다. 고대, 고려, 조선, 근대, 현대로 한국사의 주..펼쳐보기
전체목차
한국사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
백과사전 본문 인쇄하기 레이어
[Daum백과] 여원 연합군의 1차 일본 정벌 –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이근호, 청아출판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