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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사건 사림파의 개혁 정책에 제동을 걸다
기묘사화
己卯士禍시대 | 151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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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파는 중종 재위 기간에 중앙 정치로 복귀한다. 그러나 이내 또다시 사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드니, 그것이 중종 14년인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이다. 기묘사화는 조광조 일파의 급진 개혁 정책에 대한 반정 공신들의 대대적인 반격에 따른 것이었다.
배경
1504년 연산군이 폐비 윤씨 사건 관련자를 대대적으로 숙청하다.
1506년 성희안, 박원종 등이 중종반정을 일으켜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다.
1515년 중종이 조광조 등을 중용하여 사림파를 중심으로 왕도 정치를 행하려 하다.
설명
연산군 재위 시절에 두 차례의 사화를 통해 사림파가 조정에서 제거됐지만, 중종은 즉위 이후 다시 사림을 끌어들였다. 반정(反正)으로 중종 즉위를 이끌었던 공신 세력(훈구파, 勳舊派)이 조정의 권력을 독점하고 세력을 넓혀 나가자 이들을 견제하고 유교 정치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중종은 1510년 반정 주도 세력인 영의정 박원종(朴元宗)이 타계한 뒤 훈구파가 서서히 위축되는 모습을 보이자, 조광조(趙光祖)를 필두로 기호 지역 출신의 젊은 사림들을 대거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이들은 사헌부, 사관원, 홍문관 등 언론 3사의 언관(言官)으로 포진하여 점차 목소리를 높여 나갔다. 조광조 일파는 특히 사림의 의견을 공론으로 내세우며, 중종에게 과감한 개혁을 실천할 것을 요구했다.
조광조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던 중종은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향촌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유교 사상에 기반을 둔 민간 자치 규율인 향약(鄕約)을 실시했다. 국왕의 사유재산을 관리하는 내수사(內需司)의 장리(長利, 일종의 고리대금업)를 폐지하도록 했으며, 또한 추천으로 관리를 발탁하는 현량과(賢良科)를 도입해 1519년에 사림 28명을 등용했다. 이상적인 유교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국왕에게 유학을 강론하는 경연(經筵)을 활성화하는 한편, 국가적 제사를 주관하는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하였다.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 《주자가례(朱子家禮)》, 《소학(小學)》 등도 보급했다. 이와 함께 농촌 지역의 경제적인 안정을 위해 당시 지배층의 토지 겸병을 철폐하고,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는 균전제(均田制)를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당시로서는 하나같이 파격적인 조치들이었다.
일반 백성들은 조광조의 이 같은 급진적인 개혁 정책을 환영했지만, 기득권층인 훈구파는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위기감 속에 반전의 기회를 노리던 훈구파는 때마침 ‘반정공신의 위훈(僞勳) 삭제 사건’을 빌미로 조광조 일파를 몰아붙인다. 당시 조광조는 반정공신으로 책봉된 100명 가운데 성희안과 유자광 등 76명은 공신 자격이 없다며 이들의 위훈을 삭제하고 그 토지와 노비를 몰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즈음 중종은 성리학적 규범과 왕도 정치의 실현을 끈질기게 설파하는 조광조 일파에 대해 서서히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위훈 삭제 사건으로 거세게 반발하던 훈구파는 이런 분위기를 이용해 사림파를 제거하려는 계책을 세웠다.
희빈(熙嬪) 홍씨(洪氏)의 아버지인 홍경주(洪景舟)와 평소 사림으로부터 비난을 받던 남곤(南袞), 위훈 삭제의 대상인 심정(沈貞) 등은 밤에 중종을 만나 “조광조 일파가 언관권(言官權)을 지나치게 행사해 조정을 문란하게 하고, 《경국대전(經國大典)》이 규정한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적) 권력 구조를 흔들어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으니 당연히 이들을 엄히 다스려야 한다.” 하고 상소했다. 훈구파는 특히 조광조를 모함하기 위해 나뭇잎에 꿀을 발라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을 써놓고 벌레가 파먹게 한 다음, 이를 궁 안 개울에 띄워 중종에게 보여 주었다. ‘주초(走肖)’는 곧 ‘조(趙)’를 의미하는 것으로, ‘주초위왕’은 ‘조광조가 임금이 된다’라는 뜻이다. 이에 중종은 조광조를 비롯해 그 일파를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중종실록》은 당시 조광조 일파의 죄목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였다.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 등은 서로 붕당을 결성해 자기들에게 붙는 자는 천거해 권력이 있는 주요 자리를 차지하고, 뜻이 다른 자는 배척했고, 후진을 꾀어 격렬한 언행이 버릇이 되게 함으로써 국론과 조정을 날로 그릇되게 하였다.
이 일로 조광조는 능주(綾州, 전남 화순)에 유배된 뒤 사약을 받아 죽었고, 김정(金淨), 김식(金湜), 기준(奇遵), 한충(韓忠) 등은 귀양을 간 뒤 사형 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밖에 김구(金絿), 박세희(朴世熹), 박훈(朴薰) 등 수십 명이 유배됐다. 이것을 기묘사화(己卯士禍)라고 부른다.
기묘사화 당시 중종은 조광조 일파를 처단한 배경에 대해 “나라의 정사는 조정에 있어야 하고, 조정의 정사는 대신이 해야 한다. 대간(臺諫, 언론 3사)은 그 부족한 점을 보완할 뿐이다. 이들에게 정사가 있으면 어지러워진다는 옛말도 있는데, 근래 정사가 대신에게 있지 않고 대간에 있다. 이 폐단을 바로잡아야 조정이 안정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조광조 일파의 강도 높은 언관권에 대한 중종과 훈구파의 반발이 기묘사화의 원인 중 하나였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당시 화를 입은 사림들은 대부분 30대로, 이들을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고 부른다. 기묘사화로 사림파는 다시 한 번 중앙 정치에서 축출됐으며, 조광조가 추진한 현량과와 향약 등 개혁 정책은 대부분 혁파됐다. 위훈이 삭제된 공신들의 작위도 회복됐다. 이로써 조광조의 급진 개혁 정치는 4년 만에 끝을 맺는다. 과격한 개혁 정책을 성급하게 밀어붙이다 오히려 역풍을 맞은 셈이다.
조광조 일파가 제거되자 남곤과 심정, 김안로(金安老) 등 훈구 대신이 조정을 지배하였다. 한편 중종은 기묘사화가 일어난 지 10년이 지나자 훈구 대신의 권력 독점을 막기 위해 다시 사림을 등용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사림파는 된서리를 맞았다. 조선 시대 4대 사화 가운데 마지막인 을사사화(乙巳士禍)는 1545년 13대 명종(明宗) 즉위년에 일어났다. 을사사화는 다른 사화와 달리 외척 간의 왕위 계승 다툼에서 빚어졌으며, 화를 일으킨 쪽이나 화를 당한 쪽 모두에 사림들이 가담하고 있었다. 때문에 을사사화는 기본적으로 사림 내부의 갈등과 분화라는 성격을 띠고 있다.
을사사화의 시발점은 중종 재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중종의 셋째 왕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와 그 동생인 윤원형(尹元衡)은 문정왕후가 낳은 경원대군(慶原大君)을 중종의 뒤를 이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중종의 둘째 왕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동생 윤임(尹任)의 저지로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윤임 측은 대윤파(大尹派), 윤원형 측은 소윤파(小尹派)로 불리며, 세력 다툼을 벌였다. 대윤파 쪽에는 영호남 출신의 신진 성리학자가 많았고, 소윤파에는 서울 근교의 사림들이 포진해 있었다.
결국 장경왕후가 낳은 인종(仁宗)이 중종의 뒤를 이어 12대 국왕에 오르고, 자연스럽게 윤임의 대윤파가 득세하였다. 하지만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자, 소윤파의 경원대군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그가 곧 명종이다. 명종의 나이가 어리다 보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이로 인해 윤원형이 조정의 실권을 쥐었다.
권력을 장악한 소윤파는 “인종의 외척인 윤임 세력이 명종을 해치기 위해 역모를 꾸미고 있다.” 하며 대윤파를 거세게 몰아세웠다. 특히 소윤파는 택현설(擇賢說)을 내세우며 윤임 일파를 압박했다. 대윤파가 인종의 후사로 명종이 아니라 계림군(桂林君)이나 봉성군(鳳城君) 가운데 현명한 사람을 내세우려 했다는 것이 택현설의 요지다. 결국 문정왕후는 윤원형과 이기(李芑), 정순붕(鄭順朋) 등에게 밀지를 내려 윤임과 유관(柳灌) 등을 탄핵했고, 이로 인해 윤임과 유관, 유인숙(柳仁淑)을 비롯해 대윤파가 참변을 당했다.
을사사화 이후 윤원형과 이량(李樑) 등이 척신 정치를 벌이면서 사림의 기세는 한때 기우는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명종 20년인 1565년에 문정왕후가 숨지자, 유생들의 상소에 따라 을사사화로 유배된 사람들은 모두 풀려나고, 대신 윤원형이 처벌을 받는다. 이즈음 영남의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남명(南冥) 조식(曺植), 호남의 일재(一齋) 이항(李恒)과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서울 근교의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등이 각 지역을 중심으로 사림을 일으킨다. 이처럼 연산군 이래 명종대에 이르기까지 4대 사화를 거치며 부침을 거듭한 사림파는 14대 선조(宣祖, 재위 1567~1608) 초에 이르러 명실상부하게 정치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자리매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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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사건들의 기승전결,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와 상호작용을 추적하여 5천 년의 한국사를 복합적으로 이해한다. 고대, 고려, 조선, 근대, 현대로 한국사의 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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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기묘사화 –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이근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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