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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110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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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년 윤관이 동북쪽의 천리장성을 넘어 여진족을 평정하고 이듬해까지 총 아홉 개의 성을 축조한다. 이것이 윤관이 세운 동북 9성이다. 고려가 동북쪽으로 북진 정책을 펼쳐 고구려의 옛 영토 일부를 수복하고, 새로운 농경지를 확보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하지만 고려는 여진의 강화 요청과 국내 온건파들의 주장 등으로 1109년 동북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어야 했다. 고려의 북진 정책에 사실상 제동이 걸린 것이다.
배경
1080년 문종 34년에 3만 병력을 동원하여 여진을 정벌하다.
1095년 숙종이 왕위에 즉위하여 나라 안정을 꾀하다.
1104년 여진 정벌을 위해 별무반을 설치하다.
설명
당초 고려는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을 회유, 포섭하는 정책을 썼다. 부족 생활을 하던 이들은 시조인 애친각라(愛親覺羅)가 고려 출신이어서,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여기며 고려와 쉽게 동화됐다. 여진의 토산품인 말, 모피, 활, 화살 등을 고려에 주고, 식량과 옷감, 철제 농기구, 무기 등을 얻어 가기도 했다. 특히 고려는 귀순하는 여진인에게 대장군이나 장군 등의 관직이나 토지, 가옥을 하사했다. 또 귀순한 여진인끼리 기미주(羈縻州)라는 자치주를 운영토록 했다.
하지만 이 같은 고려와 여진의 관계는 11세기 말부터 12세기 초에 이르러 틀어졌다. 북만주 하얼빈 지역에 있는 완안부(完顔部)의 영가(盈歌), 오아속(烏雅束) 등이 여진족을 통합하며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함으로써 천리장성을 중심으로 고려와 충돌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고려와 친선 관계를 유지하던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도 완안부 쪽으로 기울게 된다. 이 과정에서 고려는 숙종(肅宗) 8년인 1103년 여진 추장 허정(許貞)과 나불(羅弗) 등을 사로잡아 억류하고, 이듬해 문하시랑 평장사(平章事) 임간(林幹)과 동북면 행영병마도통사(行營兵馬都統使) 윤관을 잇달아 보내 여진을 정벌토록 했으나 모두 패하고 말았다. 여진은 그 기세를 타고 정주(定州, 함남 정평) 선덕관성(宣德關城)을 공략해 고려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겼으며, 이로 인해 천리장성 북쪽은 모두 완안부 치하로 들어가게 된다.
윤관은 당시 잇따른 패전의 원인에 대해 숙종(肅宗, 재위 1095~1105)에게 건의했다.
“여진족은 원래 말을 타고 생활하기 때문에 고려의 보병으로는 당해 낼 수 없습니다. 병력을 증강하고 기병을 양성하면 반드시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목 생활을 해 온 여진족이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 부대를 주력으로 삼고 있으니 고려가 승리하기 힘들다는 얘기였다.
숙종은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여진족을 정벌하기 위한 특수 부대로 별무반(別武班)을 새로 편성했다. 별무반은 기병 부대인 신기군(神騎軍), 보병 부대인 신보군(神步軍), 승려 부대인 항마군(降魔軍)으로 이뤄졌다. 당시 문무의 산관(散官)과 서리(胥吏), 상인, 복례(僕隸, 사내종), 주부군현에서 말을 기르는 사람들을 신기군에 편입하고, 말이 없는 사람들은 신보군에 소속시켰다. 항마군은 사원에 속한 하급 승려들을 징발해 조직했다.
드디어 고려는 예종(睿宗, 재위 1105~1122) 2년인 1107년 겨울, 윤관을 원수,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삼고 17만 명의 별무반을 일으켜 여진족 토벌에 나섰다.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별무반의 출병을 두고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에 논란이 벌어졌다. 그러나 예종이 거란군 소탕을 맹세한 숙종의 글을 대신들에게 내보임으로써 강경파가 힘을 얻었다.
여진족 정벌에 나선 윤관은 우선 억류한 허정과 나불을 데려가라며 정주, 장주(長州, 함남 정평)의 여진족을 유인했다. 이에 고려 관문에 도착한 추장 고라(古羅) 등 여진족 400여 명에게 술을 주어 취하게 한 뒤 복병을 시켜 모두 죽였다. 이어 윤관은 대내파지촌(大乃巴只村, 함남 함주)의 여진족을 패퇴시키고, 문내니촌(文乃泥村)을 지나 석성(石城) 아래까지 파죽지세로 몰고 올라갔다.
석성에서 진을 치고 있던 여진족은 고려의 항복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세게 저항했다. 이때 추밀원별가(樞密院別駕) 척준경(拓俊京)이 적진으로 달려가 여진족 추장 두서너 명을 죽이자 기세가 오른 고려군이 일제히 공격해 여진족을 크게 격파했다. 또 1108년 1월 윤관이 이끄는 정병 8,000명이 가한촌(加漢村)의 소로에서 매복한 여진족 군사에게 기습당해 10여 명만 살아남았을 때, 척준경은 적진을 뚫고 들어가 몇 겹으로 포위된 윤관 등을 구해 내기도 했다. 이에 윤관은 눈물을 흘리며 “이제부터 너를 아들과 같이 보겠다.”라고 했다.
고려군은 이어 2월에 여진군 수만 명이 웅주성을 포위했을 때도 합심하여 적을 물리쳤다. 이처럼 윤관은 함흥 지역을 거쳐 북진을 계속하여 여진족 촌락 135개를 무너뜨리고, 5,000명을 죽였으며, 5,000명을 포로로 잡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1107년에 점령한 함주, 영주, 웅주, 길주, 복주, 공험진과 이듬해에 점령한 통태진, 진양진, 숭령진 아홉 곳에 성을 쌓아 방비 태세를 강화하고 고려의 지배권을 확실히 다졌다. 가장 북쪽인 공험진의 선춘령에는 비를 세워 경계로 삼았다. 이어 고려는 아홉 곳의 성에 남쪽 지방의 백성 6만 9,000호를 이주시켜 농토를 개간하게 했다. 영주성 안에는 사찰 두 개를 지어 각각 호국인왕사(護國仁王寺), 진동보제사(鎭東普濟寺)로 이름 지었다.
한편 고려의 북계(北界)에 세워진 동북 9성의 정확한 위치를 두고는 해석이 엇갈린다. 두만강 이북에서 함경도 일대라는 설과 함경남도 일대라는 설, 그보다 남쪽인 함흥평야 일대라는 설이 있다.
동북 9성의 설치로 고려는 여진에 대해 군사적인 승리를 거두고, 고토(古土) 일부를 되찾았지만, 이 같은 분위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윤관의 승리 이후에도 토착 여진족의 저항이 계속돼 고려군과 백성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는 등 피해가 잇따랐다. 1109년 5월에는 여진이 길주성을 포위하고 공격해 성이 거의 함락될 뻔했으며, 고려군의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다. 《고려사절요》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여진이 소굴을 잃자, 맹세코 보복하고자 먼 곳의 추장들을 이끌고 공격하는데 속임수와 장기를 쓰지 않는 것이 없었다. 성이 험하고 튼튼해 쉽게 함락당하지는 않았으나, 싸우고 지키느라 우리 군사의 손실 역시 많았다.
또한 9개 성의 거리가 서로 멀어, 거란군이 매복해 노략질을 자주 일삼았고, 군사 징발에 기근과 유행병까지 겹쳐 백성의 원성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즈음 여진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 강화를 요청하고, 동북 9성 지역을 돌려줄 것을 애원했다. 여진은 사신을 통해 “고려가 9성을 쌓아 우리가 마음 편안히 돌아갈 곳이 없으니, 9성을 돌려주면 대대로 자손에 이르기까지 세공(歲貢)을 정성껏 닦고 감히 기와와 작은 돌도 고려와의 경계 위에 던지지 않겠다.”라고 호소했다.
그러자 예종은 1109년 7월 문무백관들과 의논한 끝에 마침내 여진족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동북 9성을 돌려주었다. 당시 신료들은 대부분 9성을 지키기 어렵고 고려인의 피해가 커 돌려주는 것이 옳다며 여진과의 화친을 건의했다.
동북 9성의 반환으로 고려의 북진 정책은 사실상 중단됐다. 또 이 과정에서 윤관은 애초부터 여진 정벌을 못마땅하게 여긴 중신들에 의해 패장으로 몰리고, 결국 관직과 공신 작호를 삭탈 당한다. 예종은 윤관의 원수 직책을 거두는 것으로 사태를 무마하려 했으나, 중신들은 파업까지 단행하며 윤관을 몰아붙였다. 예종은 1110년 윤관을 복직시키려 했으나 윤관은 이를 정중히 사양했다. 그리고 이듬해 윤관은 세상을 하직한다.
이후 여진의 아골타(阿骨打)는 1115년 황제를 칭하며, 금(金)나라를 건국했다. 금나라는 1125년에 거란을 멸망시키고 2년 뒤에는 송나라의 수도 변경(汴京, 개봉)을 함락시킨 뒤 고려에게 군신 관계를 요구했다. 고려에서는 찬반 격론이 일었으나 권신 이자겸(李資謙) 등 온건파의 주장대로 금나라에 대해 사대의 예를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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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사건들의 기승전결,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와 상호작용을 추적하여 5천 년의 한국사를 복합적으로 이해한다. 고대, 고려, 조선, 근대, 현대로 한국사의 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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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윤관의 여진 정벌 –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이근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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