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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인 100
대 사건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을미사변
乙未事變시대 | 189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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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이 경복궁을 습격해 조선의 왕비를 시해했다. 조선 침략의 최대 걸림돌을 제거해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의 지배권을 회복하기 위해 저지른 만행이었다. 청일 전쟁과 갑오개혁, 삼국 간섭으로 근대사의 격변에 휩싸인 조선은 결국 국모 시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맞는다. 45세의 나이에 참살된 명성황후는 1897년 대한제국 수립으로 고종이 황제에 오르면서 황후로 책봉됐다.
배경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개화당 정권이 무너지고 명성황후 세력이 득세하다.
1894년 일본의 요구로 김홍집 등을 중심으로 갑오개혁이 단행되다.
1895년 일본이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다.
설명
명성황후 시해는 치밀한 사전 각본에 따라 이뤄졌다. 1895년 4월, 삼국 간섭으로 비롯된 국제 정세 변화가 직접적인 기폭제가 됐다.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청나라로부터 요동 반도와 대만 등을 할양받았다. 하지만 만주와 조선 침략을 노리던 러시아가 이에 반발,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요동 반도를 청나라에 되돌려 주도록 일본을 압박했고, 삼국의 막강한 군사력에 부담을 느낀 일본은 요동 반도를 포기한다. 청일 전쟁의 승리로 상승세를 타던 일본의 기세가 한풀 꺾인 셈이다.
한 해 전인 1894년 7월, 일본은 청나라와 전쟁을 일으키면서 먼저 경복궁을 습격해 고종을 포로로 삼고 반일의 핵심인 왕후 세력을 권력에서 밀어낸 뒤 일본이 요구하는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이후 1년 남짓 동안 일본은 김홍집(金弘集), 박영효(朴泳孝) 등으로 구성된 친일 내각을 조종하며, 두 차례의 갑오개혁을 통해 청나라 간섭 배제, 왕권 약화, 근대적 내각제도 확립 등의 개혁안 수백 건을 제정하여 실시하게 했다. 이를 통해 일본은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과 정치, 경제적 침투를 더욱 강화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 입지가 크게 위축된 고종과 왕후는 삼국 간섭을 상황 반전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서양 세력, 특히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일본 세력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이른바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 러시아를 끌어들이고 일본을 배격함)이다. 이에 왕후는 갑오개혁 당시 일본을 견제하려다 실각해 청나라로 도피한 민영준(閔泳駿)의 정계 복귀를 꾀하는 등 친위 세력을 형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또 고종은 친러파인 이범진(李範晉)과 이완용(李完用) 등을 내각에 기용하며 친일파 제거를 시도했다. 그러자 일본은 세력 만회를 위한 수단을 강구하였고, 결국 왕후를 시해하는 음모를 꾸민다. 처음엔 친일 개화파의 영수인 박영효를 사주하여 일을 일으키려 했으나 음모가 사전에 발각되어 박영효가 일본으로 망명하자, 주한 일본 공사관이 직접 나선다.
‘여우사냥’, 이것이 명성황후를 시해하기 위한 작전에 붙인 이름이다. 구체적인 실행 계획은 10월 3일(음력 8월 15일) 남산의 일본 공사관 밀실에서 마련됐다. 육군 중장 출신의 암살 전문가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공사로 부임한 지 한 달이 막 지난 시점이었다. 전임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시해를 주모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과격한 성격의 미우라를 후임으로 천거한 것이다. 이들은 밀실 모의를 통해 시해 주역은 일본 낭인이 맡고, 겉으로는 왕후와 갈등을 빚고 있는 대원군과 조선인 훈련대(訓練隊) 군인들의 반란으로 꾸미기로 했다. 거사일은 10월 10일 새벽으로 정했다.
미우라는 우선 일본인 신문 〈한성신보(漢城新報)〉 사장인 아다치 겐조에게 6,000원의 보수를 주고 낭인 자객들을 동원하도록 했다. 당시 서울에는 수십 명의 일본 낭인들이 신문기자나 상인 등으로 와 있었고, 아다치 사장은 그 우두머리격이었다. 미우라는 또 훈련대의 1대대장 우범선(禹範善)과 2대대장 이두황(李斗璜), 전 군부협판 이주회(李周會) 등을 포섭했다. 조선인 훈련대와 일본 수비대, 순사는 공사관이 책임지고 움직이도록 했다.
그다음은 대원군이었다. 대원군은 1894년 갑오개혁에 불만을 품어 고종을 폐위시키고 적손자 이준용(李埈鎔)을 왕위에 앉히려다 발각돼 마포의 공덕리 별장 아소정(我笑亭)에 이준용과 함께 유폐되어 있었다. 미우라는 10월 6일 대원군과 친분이 있는 궁내부 고문관 대위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를 아소정에 보내 국왕 보좌 역할을 요청하며 서약서를 받아냈다. 거사 당일 대원군을 입궐시켜 책임을 뒤집어씌우려는 계책이었다. 대원군이 서약한 사항의 요지는 궁중 사무에 전념하고, 정무에 일체 간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만반의 채비를 마친 미우라는 시해 계획이 누설되지 않도록 오카모토가 귀국하는 것처럼 꾸며 송별회를 하기도 했다. 당초 미우라는 서울에 부임한 직후부터 주변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 공사관에서 불경을 외우며 두문불출했다. 왕후가 ‘금강산 승려’라고 별명을 붙일 정도였다. 부임할 때부터 왕후 시해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 위장술을 썼던 셈이다.
거사 날짜를 기다리던 미우라에게 10월 7일 예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 조선 정부가 그날 오전 군부대신 안경수를 공사관에 보내 훈련대 해산과 무장 해제, 민영준의 궁내부 대신 임명을 통고한 것이다. 일본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한 왕후의 전격적인 조치였다. 궁궐 수비를 명분으로 설치된 훈련대는 일본군 장교가 훈련을 맡고 있어 사실상 일본 공사관의 지휘를 받는 군대였다. 이와는 별도로 고종과 왕후가 궁궐 수비 전담부대로 창설한 것이 시위대(侍衛隊)로, 미국인 윌리엄 다이(W. M. Dye) 장군이 교관을 맡고 있었다. 미우라는 훈련대가 빠지면 시해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으로 생각하고, 거사 날짜를 앞당겼다.
이렇게 해서 그날 밤 아소정에 공사관 직원과 순사, 낭인들이 집결하였고, 이들은 잠든 대원군을 급히 깨워 8일 새벽 3시쯤 가마에 태우고 경복궁으로 향했다. 훈련대와 수비대는 서대문 부근에서 이들과 합류했다. 경복궁은 이미 미우라가 동원한 일본군들로 포위되어 있었다. 새벽 5시쯤 대원군 일행이 광화문 앞에 도착하자 일본 순사들이 긴 사다리로 담을 넘어 들어가 광화문 빗장을 풀었다.
이때 고종과 왕후가 임명한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이 군부대신 안경수와 함께 시위대(侍衛隊) 병력을 이끌고 나타나 이들을 저지하면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홍계훈(洪啓薰)이 총에 맞아 쓰러지고 안경수가 달아나자 흉도들은 함성을 지르며 고종의 편전인 북쪽의 건청궁(乾淸宮)으로 돌진했다. 이번에는 다이 장군이 이끄는 시위대 300~400명이 이들을 막았지만, 10분 만에 밀려났다. 이로써 일본군이 궁궐 안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건청궁에 이르자 낭인들은 일본군과 함께 밀실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흉도들은 궁녀들의 머리채를 끌어당기고 윽박지르며 왕후의 소재를 물었다. 궁녀들은 두려움에 떨며 비명을 질러 댔다. 흉도들은 또 고종에게 접근해 어깨와 팔을 붙잡고 끌고 다녔으며, 고종 옆에서 칼을 휘두르고 권총을 쏘며 왕후의 거처를 대라고 다그쳤다. 고종은 왕후가 피신할 수 있도록 다른 방을 가리키기도 했다.
마침내 흉도들이 건청궁 동쪽 곤녕합(坤寧閤)에서 왕후를 찾아냈다.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이 두 팔을 벌려 왕후 앞을 가로막자 흉도들은 권총을 쏘아 이경직을 쓰러뜨렸다. 신문기자 히라야마 이와히코(平山岩彦)가 칼로 이경직의 두 팔을 베었다. 흉도들은 왕후를 쓰러뜨려 짓밟았으며, 여러 명이 달려들어 칼을 휘둘렀다. 이들은 왕후를 찾다가 용모가 비슷한 궁녀 세 명도 살해했다. 이들은 왕후를 정확하게 확인하기 위해 미리 준비한 초상화와 대조하기도 하고, 왕후의 이마에 있는 마마자국을 찾아보기도 했다. 얼마 뒤 궁에 들어온 미우라도 왕후의 시신을 확인했다. 흉도들은 칼자국 등 증거를 없애기 위해 미우라의 지시에 따라 시신을 화장했다. 이들은 홑이불로 싼 시신을 건청궁 동쪽 녹원(鹿園) 숲 속으로 옮긴 뒤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석유를 뿌려 태웠다. 남은 것은 유골 몇 점뿐이었다. 이것이 을미사변(乙未事變)이다.
왕후가 시해된 지 두어 시간 뒤, 고종은 장안당(長安堂)으로 자리를 옮겨 대원군과 미우라 등과 대면했다. 이 자리에서 고종은 미우라의 강요에 따라 친일 개화파 중심의 김홍집 내각을 조직했다. 이날 일본인 흉도들의 행패는 고종을 호위하던 러시아 인 건축 기술자 사바틴(S. Sabatin)과 시위대 교관 다이 장군 등에 의해 전 세계에 폭로됐다. 국제적인 비난이 거세지자 일본은 미우라 일당을 송환해 재판을 열었지만,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 판결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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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사건들의 기승전결,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와 상호작용을 추적하여 5천 년의 한국사를 복합적으로 이해한다. 고대, 고려, 조선, 근대, 현대로 한국사의 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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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을미사변 –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이근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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