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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사건

운요호 사건

일본과 불평등 조약을 맺다

요약 테이블
시대 1875년

고종이 친정에 나서면서 대일본 관계를 시작으로 조선의 대외 정책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조선이 대외 정책을 둘러싸고 내홍을 겪고 있는 틈을 타 일본은 1875년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무력으로 조선을 압박하고, 결국 이듬해인 1876년 조선과 일본은 강화도에서 수호 조약을 맺었다. 이는 조선이 근대 국제법상 외국과 체결한 첫 번째 조약이었다.

배경

1868년 일본이 막부 체제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을 이루다.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다.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다.

설명

1868년 막부 체제를 무너뜨린 메이지(明治) 정부는 조선에 여러 차례 통상 교섭을 요구해 왔으나, 대원군의 거부로 계속 좌절됐다. 당시 일본과의 외교 업무를 맡고 있던 동래 부사 정현덕(鄭顯德)과 왜학훈도(倭學訓導) 안동준(安東晙)은 일본이 보낸 서계(書契, 외교 문서)를 격식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접수하지 않았다. 막부 체제 때와는 달리 ‘황제’, ‘칙서(勅書)’ 등의 용어를 사용해 조선의 상국(上國)처럼 행세하려 했다는 것이 서계를 거부한 이유였다. 하지만 대원군이 실각하자 사정은 달라졌다. 그 상징적인 사건이 문호 개방에 관심을 갖고 있던 고종과 민비(閔妃, 명성왕후) 세력에 의해 대원군의 심복인 정현덕과 안동준이 1874년에 제거된 것이다. 두 사람은 공금 유용 등의 죄목으로 파면당한 후 유배됐고, 안동준은 1875년 3월 동래부에서 효수형에 처해졌다.

고종

ⓒ 국립중앙박물관, 중박201105-260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조선 정부가 정치적 변화를 겪던 1874년 11월에 일본 외무대승(外務大丞)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가 부산에 이르러 국교 수립을 요청한다. 이번에도 일본은 ‘대일본(大日本)’, ‘황상(皇上)’ 등 조선을 자극하는 문구를 그대로 사용했다. 게다가 당시 조선에서는 일본 내부의 정한론(征韓論)을 경계하는 분위기여서 모리야마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모리야마는 민씨 세력이 쇄국파를 누르고 득세하고 있는 점을 이용해 외교적 접근 대신 군사적 압박으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할 것을 일본 정부에 건의했다. 일본 외교 문서에 따르면 당시 모리야마는 부관을 시켜 ‘이런 좋은 기회에 군함 한두 척을 파견하면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일본 정부에 보고토록 했다.

이에 따라 1875년 5월 운요호(雲揚號, 운양호) 등 군함 세 척이 조선에 파견됐다. 이들은 동래 앞바다에 도착해 함포 사격으로 무력시위를 벌인 뒤, 동해안을 따라 함경도 영흥만까지 올라갔다가 일단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어 그해 8월 20일 운요호는 항로를 측량한다는 구실로 다시 조선을 불법 침입했다. 중무장한 운요호는 서해안을 거슬러 올라가 조선의 발포를 유도하기 위해 강화도 초지진으로 접근했다. 해안 경비를 서던 조선군이 방어 차원에서 포 사격을 가하자, 운요호도 신식 함포로 공격을 퍼부은 뒤 영종진에 정박해 함포 공격을 이어 갔다.

일본군은 영종진에 상륙해 관청과 민가를 불태우고, 살상과 약탈을 자행했다. 이때 조선에서는 35명이 전사하고, 16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일본은 2명이 경상을 입었다. 강화도와 영종진에서 무력시위를 벌인 운요호는 29일에 일본으로 귀환했다. 이것이 일본이 통상조약을 맺기 위해 무력으로 조선을 협박한 운요호 사건이다.

운요호 사건

무력으로 조선과의 통상조약을 맺으려 했던 일본은 영국에서 수입한 근대식 군함인 운요호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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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1876년 1월, 일본은 운요호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묻고 왜관에 거류하는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함과 전권대신을 조선에 파견했다. 육군 중장인 구로다 키요타카(黑田淸隆)가 특명전권변리대신(特命全權辨理大臣)을 맡았고, 군함 8척과 군사 400여 명이 동원됐다. 이들은 부산 앞바다에 정박해 시위를 벌인 뒤 강화도에 무단 상륙해 무력으로 위협하며 조선 정부에 회담을 강요했다. 이에 조선 정부는 판부사 신헌(申櫶)을 접견대신으로 삼아 급히 강화도로 보냈다. 신헌과의 협상에 앞서 일본은 함포 사격으로 신헌 일행에게 위압감을 주고, 일본이 제시한 13개 조약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군사를 인천과 부평으로 상륙시키겠다고 위협했다.

이런 가운데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이 요구하는 통상조약을 체결할지를 놓고 논의가 거듭됐다. 대원군은 일본과의 협상 자체를 비판했고, 조정 내 많은 대신들도 일본을 믿을 수 없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최익현(崔益鉉)은 도끼를 메고 대궐 문 앞에 엎드려 ‘서양 도적들이나 마찬가지인 왜인과 화친하면 기자(箕子)의 오랜 나라가 하루아침에 오랑캐에 빠져 나라가 망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의 척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반면 판중추부사 박규수(朴珪壽) 등 일부 대신들은 현실적으로 일본 군대를 막을 수 없다며 일본의 요구를 수용할 것을 주장했다. 또 청나라도 이즈음 조선에 공문을 보내 ‘조선이 일본과 통상을 거부하면 이후의 일은 책임질 수 없다’라며 간접적으로 개항을 권고했다. 결국 고종은 한일 간의 우호 관계를 감안할 때 굳이 통상을 거절할 필요가 없다는 뜻을 협상장에 있는 신헌에게 전달했다.

이로써 조선과 일본은 2월 3일 강화도 연무당(鍊武堂)에서 12개 조항의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체결한다. 이를 강화도조약 또는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이라고도 한다. 일본의 요구가 주로 반영된 수호조규는 제1관에서부터 조선을 침탈하기 위한 일본의 정치적 포석이 깔려 있었다. 1관은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라고 규정했지만, 이는 조선과 청나라의 사대관계를 부정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을 약화하려는 것이었다. 4관과 5관에서는 부산을 포함해 모두 세 곳을 자유 무역항으로 개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부산을 뺀 나머지 두 곳은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에서 정하기로 했으며, 이후 일본은 인천과 원산을 지정했다.

이는 부산과 인천, 원산을 추후 한반도 침략의 전진 기지로 삼겠다는 일본의 전략적 계산이 반영된 결과다. 7관은 일본이 조선의 해안이나 도서를 임의로 측량해 해도(海圖)를 작성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으로, 일본 군함의 무력 침공 의도를 드러낸 조항으로 볼 수 있다. 9관에서는 양국 백성들이 각자 임의로 무역하며 양국 관리들은 조금도 간섭할 수 없고 또 제한하거나 금지할 수도 없다고 못 박았다. 이는 조선의 영세한 산업을 보호할 근거가 마련되지 않은 채 완전한 자유 무역이 이뤄지게 된 것을 의미한다. 특히 10관에서는 조선에서 범죄를 저지른 일본인은 일본에서 일본의 법률로 다스리도록 함으로써 치외법권(治外法權)을 인정했다. 이는 조선의 주권을 정면으로 침해하고 부정하는 굴욕적인 조항이다.

일본이 당초 주장한 13개 조항 가운데 최혜국 대우 조항을 뺀 12개 조항이 모두 수호조규에 포함된 반면, 조선이 요구한 미곡 교역 불허 등 6개 조항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또 6월에 체결된 수호조규부록과 통상장정(通商章程)에서는 개방된 항구에서의 일본 화폐 유통 인정, 관세 주권의 포기, 미곡의 무제한 수출 허용 등의 내용이 담겨 조선의 경제가 일본에 예속되는 결과를 불렀다.

이처럼 조선보다 12년 앞서 서양 세력에게 문호를 개방한 일본은 국제법과 국제 정세에 어두운 조선을 상대로 군사력을 앞세워 타율적이며 부당한 조약을 맺었다. 이후 조선은 강화도조약의 불평등성을 인식해 이를 개정하려고 애썼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갈수록 일본의 침략 정책에 말려들었다. 일본과의 조약 체결을 계기로 조선은 1882년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었고, 1883년에는 영국과 독일, 1884년에는 이탈리아와 러시아, 1886년에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등과 잇따라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조선은 본격적인 개항과 개방의 길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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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집필자 소개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정치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국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박찬구 집필자 소개

부산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991년 서울신문사에 입사하여 사회부, 정치부, 미래전략팀을 거쳤으며 현재 국제부에서 근무 중이다.

출처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 저자이근호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역사적인 사건들의 기승전결,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와 상호작용을 추적하여 5천 년의 한국사를 복합적으로 이해한다. 고대, 고려, 조선, 근대, 현대로 한국사의 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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