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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사건

서원 철폐령

세도 정치를 혁파하고 왕권 강화를 꾀하다

요약 테이블
시대 1871년

대원군은 1864년 전국 서원의 실태를 조사하게 한다. 그는 서원의 폐단과 존폐 문제를 제기한 후 제일 먼저 노론의 정신적 지주였던 만동묘를 철폐하였다. 이어서 1868년에는 사액서원을 제외한 전국 1,000여 곳의 서원을 정리하였고, 1871년에는 대대적인 서원 철폐령을 내리고 일인일원 원칙으로 대부분의 서원을 정리하였다.

배경

1864년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막을 내리다.
1868년 대원군이 전국 각지의 서원에 대해 대대적인 정리 작업을 개시하다.
1873년 최익현이 흥선대원군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리다.

설명

아들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이 1863년 12월 어린 나이로 26대 국왕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대원군은 이듬해부터 서원을 철폐, 정리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서원은 16세기 이후 중앙 정치의 실권을 쥔 사림이 본격적으로 설립하기 시작했다.

당초 서원은 선현에 대한 제향과 지방의 인재 양성을 위한 일종의 사설 교육기관 역할을 했지만, 갈수록 당쟁의 소굴이 되고 지방민을 침탈하는 폐단을 낳는다. 서원은 특히 많은 토지와 노비를 보유하면서도 면세와 면역 등 경제적인 혜택으로 국가 재정을 약화시켰으며, 당론을 명분 삼아 왕권을 견제하고 백성들을 억압하면서 조정의 권위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떨어뜨렸다. 군역을 면제받기 위해 서원의 학생으로 등록하는 양반들도 많았고, 이는 곧 농민들의 납세 부담을 키우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에 대원군은 1864년 7월, 전국 서원의 실태를 조사하도록 하면서 서원의 폐단과 존폐 문제를 공식으로 제기한 데 이어, 이듬해 3월에는 유생들의 격렬한 반대 속에 충북 괴산의 화양동에 있는 만동묘(萬東廟)를 철폐했다. 만동묘는 노론 영수인 우암 송시열의 뜻에 따라 임진왜란 당시 지원군을 보내 조선을 도운 명나라 신종(神宗)과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노론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그 옆에는 송시열을 모신 대표적인 서원인 화양동서원(華陽洞書院)이 있었다. 대원군이 야인(野人)으로 지낼 때 화양동서원에 들렀는데, 당시 부채를 들고 계단을 오르다 서원의 노비에게 변을 당해 이를 앙갚음하기 위해 이곳을 정리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당시 서원의 대표격이던 만동묘의 철폐는 유생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지만, 일반 백성들은 오히려 이 같은 조치를 환영했다. 황현(黃玹)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만동묘에 대해 ‘서원을 책임지는 자들은 대개 충청도에서 행패를 일삼던 양반집 자제들이다. 이들은 묵패(墨牌)로써 평민들을 잡아다 껍질을 벗기고 골수까지 빼내니 남방의 좀이라 불렸다. 백 년이 지나도록 수령들은 그 무리가 두려워 죄를 따지지 못했다’라고 기록하였다. 묵패란 서원의 제수에 쓸 목적으로 돈을 걷기 위해 각 고을에 보낸 도장 찍은 문서를 말한다.

황현은 또 ‘이때 백성들에게는 아무런 일도 없었지만, 서원에 소굴을 만들던 유생들은 마치 비상지변(非常之變)이라도 당한 것처럼 하루아침에 처소를 잃었다. 미쳐 날뛰고 부르짖으며 잇달아 대궐 문 밖에 엎드려서 상소했으니, 양식 있는 이들이 비웃었다’라고 썼다. 대원군이 “서원이 있고 나라가 망하는 것이 좋은가, 서원이 없고 나라가 있는 것이 좋은가.”라고 반문한 것도 이처럼 당시 서원의 폐단을 사회적으로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진실로 백성을 해치는 자라면, 비록 공자가 살아난다 해도 용서하지 않겠다.”

흥선대원군

고종이 즉위하자 그의 아버지 이하응은 흥선대원군에 봉해진 후 섭정이 되었다.

ⓒ 국립중앙박물관, 중박201105-260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서원 철폐에 강력하게 반발하는 유생들에게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단호한 결의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경복궁 문 밖에서 엎드려 시위하고, 탄원하던 전국 각지의 유생 수만 명을 군졸들을 풀어 강제 해산시키고 모두 한강 너머로 내쫓았다. 유생들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에 분개하며 전국적으로 유통(儒通)이라는 격문을 돌리고 반대 운동을 벌였지만, 대원군의 결심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유생들의 항의가 거세지자 일부 조정 대신들이 대원군에게 “선현의 제사를 받드는 것은 선비의 기풍을 기르는 것”이라며 서원 철폐령을 거두어 달라고 간언했지만, 대원군은 “서원은 우리나라 선유(先儒)에 제사 지내는 곳인데, 어찌 도둑이 숨는 곳이 되겠느냐.”라며 일축했다.

만동묘의 철폐에 이어 대원군은 1868년 사액서원(賜額書院)을 제외한 전국의 서원 1,000여 곳을 정리했다. 사액서원이란 국왕으로부터 편액(扁額)과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은 서원을 일컫는다. 중종 38년인 1543년, 당시 주세붕(周世鵬)이 경북 영주에 세운 소수서원(紹修書院, 백운동서원)이 서원의 효시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대원군은 또 1871년에 대대적인 서원 철폐령을 내려 사액서원에 대해서도 일인일원(一人一院)을 원칙으로, 선유 한 사람에 대해 한 곳의 서원만 두고 나머지는 정리하도록 했으며, 아울러 도학과 절의가 뛰어나 후세에 사표가 될 만한 선유에 한해서만 그를 기리는 서원을 계속 운영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전국의 서원 가운데 오직 47곳만 남게 되고, 600여 곳이 정리됐다. 1871년 신미년(辛未年)의 서원 철폐령 이후 살아남은 이 서원들을 가리켜 ‘신미 존치 47서원’이라고 부른다. 경기도에서는 용인 심곡서원(深谷書院)과 여주 강한사(江漢祠)를 비롯해 열두 곳이 존치됐고, 충청도에서는 충주 충렬사(忠烈祠) 등 다섯 곳, 전라도에서는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을 포함해 세 곳, 경상도에서는 예안 도산서원(陶山書院)과 선산 금오서원(金烏書院) 등 열네 곳, 강원도에서는 영월 창절서원(彰節書院) 등 세 곳, 황해도에서는 배천 문회서원(文會書院) 등 네 곳, 평안도에서는 영유 삼충사(三忠祠)를 포함해 다섯 곳, 함경도에서는 노덕서원(老德書院) 한 곳만이 남았다.

돈암서원

김장생을 제향하기 위해 세워진 서원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속에서 존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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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은 이처럼 원래 취지를 벗어난 서원을 철폐함으로써 조정의 권위를 세우고 지방 통치를 강화해 나갔으며, 서원이 가진 토지와 노비를 몰수해 세수를 늘리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서원의 폐단에 대해 국가가 정책적인 조치를 취한 것이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인조는 서원 설립을 허가제로 바꾸고 서원 학생의 상한선을 정해 이를 넘기지 못하도록 했다. 또 숙종 대에는 서원이 기부금품을 모으지 못하도록 했고, 서원 설립을 남발하거나 일인일원의 원칙을 어기는 사례를 단속했다. 영조 14년인 1738년에는 200여 곳의 서원을 없애기도 했다.

하지만 대원군의 서원 철폐 정책은 이전 사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하고 단호했다. 이는 유생들로부터 불신과 반감을 사는 계기가 됐으며, 결과적으로 대원군이 정권에서 물러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대원군이 철폐시킨 서원 가운데 절반 이상이 대원군 집권기가 끝난 이후 다시 회복됐다. 1873년 11월 대원군을 탄핵한 최익현(崔益鉉)은 상소를 올려 대원군의 실정을 거론하며 대표적인 것이 만동묘와 서원의 철폐라고 지적했다. 최익현은 ‘지금 나랏일들을 보면 폐단이 없는 곳이 없다. 가장 두드러지고 심한 것을 보면 황묘(皇廟, 만동묘)를 없애 임금과 신하 사이의 윤리가 썩게 되었고, 서원을 혁파하니 스승과 생도들 간의 의리가 끊어졌다’라고 밝혔다.

서원 철폐는 대원군이 집권 10년 동안 추진한 내정 개혁 가운데 가장 과감한 정책으로 꼽힌다. 이 시기 개혁 정책은 정조 이후 60여 년 만에 이뤄진 것이었다. 당시 개혁 정책의 핵심은 노론의 오랜 세도 정치에 따른 부정부패와 가렴주구 등 각종 폐해를 척결하고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는 데 맞춰져 있었다. 이를 위해 대원군은 1864년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이 물러나면서 안동 김씨 세도가 막을 내리자, 곧바로 당파를 초월한 인사 개혁을 단행하여 남인과 북인, 소론을 골고루 등용했다.

이와 함께 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1865년 영건도감(營建都監)을 설치해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 중건 사업을 벌였고, 이에 따라 고종 5년인 1868년 왕실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이사를 하였다. 종묘와 도성, 북한산성 등도 새롭게 수축했다. 또 삼정 문란으로 인한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환곡제를 사창제(社倉制)로 바꿔 각 고을에서 환곡을 스스로 운영하게 했다. 이는 수령과 아전이 환곡에 간여해 백성들을 수탈하는 행위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것이어서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다. 군포는 호포(戶布)로 이름을 바꿔 양반 등의 면세를 금지하고 가구당 골고루 2냥씩을 걷었다. 세도 정치의 중심 기관인 비변사를 없애고, 정치와 군사를 분리해 각각 의정부와 삼군부를 최고기관으로 삼으면서 국방력을 강화시킨 것도 대원군의 개혁 정책이 거둔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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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집필자 소개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정치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국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박찬구 집필자 소개

부산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991년 서울신문사에 입사하여 사회부, 정치부, 미래전략팀을 거쳤으며 현재 국제부에서 근무 중이다.

출처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 저자이근호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역사적인 사건들의 기승전결,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와 상호작용을 추적하여 5천 년의 한국사를 복합적으로 이해한다. 고대, 고려, 조선, 근대, 현대로 한국사의 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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