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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145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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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가 조카 단종을 끌어내리고 직접 왕위에 오르자 신하들은 이것이 왕위 찬탈이자 유교의 법도에 어긋난 것이라며 단종 복위운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복위운동이 탄로 나면서 이를 주도했던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 여섯 명이 모진 고문 끝에 처형당하였으니, 이들을 사육신이라고 한다.
배경
1452년 단종이 즉위하자 황보인과 김종서가 실권을 잡다.
1453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다.
1455년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여 세조로 즉위하고 전제 왕권을 강화하다.
설명
“나리(세조)가 나라를 도둑질했다. 하늘에는 두 해가 있을 수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있을 수 없다. 나는 나리의 신하가 아니다.”(성삼문)
“어떻게 공신(功臣)으로서 배신을 할 수 있는가.”(세조)
“상왕 전하(단종)의 복위를 위해 후일을 기약했을 뿐이다.”(성삼문)
“내가 내린 녹을 먹지 않았느냐.”(세조)
“나리의 녹을 먹은 적이 없다.”(성삼문)
성삼문의 집 창고를 확인해 보니 세조에게 녹봉으로 받은 쌀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세조는 인두를 달구어 성삼문의 살갗을 지지게 했다.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궈라. 형벌이 참으로 독하다.”
성삼문은 이렇게 기개를 보였다.
“역모에 끼어들지 않았다고 하면 전하께서 살려준다고 한다.”(신숙주)
“나 혼자 살려고 상왕 전하와 동지들을 배신하란 말이냐.”(박팽년)
1456년 6월, 박팽년과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兪應孚)는 세조에게 모진 고문을 받은 뒤 모두 처형됐다. 세조가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이에 반발해 단종 복위를 꾀하려다 거사 계획이 사전에 누설된 데 따른 것이다. 남효온(南孝溫)은 《추강집(秋江集)》에서 이들 여섯 명을 사육신(死六臣)이라고 칭했다. 남효온을 포함해 김시습(金時習)과 원호(元昊), 이맹전(李孟專), 조여(趙旅), 성담수(成聃壽)는 세조 즉위 이후 왕위 찬탈을 비난하며 스스로 관직을 내놓거나 아무런 관직도 받지 않았다고 해서 생육신(生六臣)이라 불린다. 사육신 사건 이후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자 세조의 친동생이자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두 번째로 단종 복위운동을 벌이다 역시 실패했다. 잇따른 복위운동으로 정권의 정통성 확립에 위기감을 느낀 세조는 결국 영월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단종을 죽인다.
계유정난 이후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 세력은 단종을 계속 압박해 왕위에서 물러나도록 했다. 1455년 윤6월 세조가 즉위할 당시, 단종의 명을 받고 상서원(尙瑞院)에서 옥새를 가져오던 동부승지 성삼문은 경회루 근처에서 통곡을 하고, 박팽년은 경회루 연못에서 투신자살하려다 “후일을 도모하자.”라는 성삼문의 만류로 뜻을 접었다. 세조는 즉위 직후 태조 때의 개국공신과 1차 왕자의 난 때의 정사공신(定社功臣), 태종 즉위 과정에서 공을 세운 좌명공신(佐命功臣), 계유정난의 정난공신(靖難功臣)을 불러 4대 공신 모임을 가졌다. 어린 조카에게서 왕위를 빼앗았다는 정권의 정통성 시비에서 벗어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당시 많은 유신들은 세조의 행위를 유교의 정치법도에 어긋나는 명백한 ‘왕위 찬탈’이라고 규정했다. 특히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사 출신 대신들은 상왕이 된 단종을 다시 왕위에 앉히기 위해 거사를 계획했다. 때마침 명나라에서 온 사신을 환영하는 연회가 세조와 세자가 참석한 가운데 창덕궁 광연전(廣延殿)에서 열렸다. 성삼문의 부친인 성승(成勝)과 유응부가 환영 연회의 별운검(別雲劒, 왕이 행차할 때 왕 옆에서 칼을 들고 호위하는 무관)으로 임명되자 이들은 거사를 결심하였다. 유응부는 “내가 세조를 칼로 죽이겠다.”라며 별렀다.
하지만 세조의 책사인 한명회가 불안한 마음이 들어 “날씨가 덥고 광연전이 좁으니 세자는 참석하지 말고, 별운검도 안 두는 게 좋겠다.” 하고 세조에게 건의하자 왕도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거사를 준비하던 사람들 사이에 의견이 갈렸다. 무신인 성승과 유응부는 거사를 연기하면 비밀이 새나갈 염려가 있다며 당초 계획한 대로 실행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문신인 성삼문과 박팽년은 세자가 궁궐에 있다가 군사를 몰고 오면 거사가 실패할 수 있다며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논란 끝에 성삼문 등의 의견대로 거사를 연기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화근이 됐다. 이들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꾀하던 집현전 학사 출신의 김질(金鷯)이 거사가 연기되자 고민하던 끝에 장인인 우찬성(右贊成) 정창손(鄭昌孫)을 찾아가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정창손은 바로 궁궐로 들어가 세조에게 고변하였다.
세조는 성삼문부터 불러 심문했다. 성삼문은 “상왕의 복위는 모반이 아니며, 신하된 자로서 마땅한 도리”라며 세조와 언쟁을 벌인다. 단종 복위 계획이 이미 드러난 마당이어서 성삼문은 세조를 ‘전하’가 아니라 ‘나리’라고 불렀다. 성삼문은 세조에게 “주공(周公)은 조카의 왕위를 빼앗지 않았다.” 하고 꼬집었다. 세조가 계유정난 이후 자신을 고대 중국 주나라 때 문왕의 아들이며 무왕의 동생인 주공에 비유하던 일을 일깨운 것이었다. 당시 무왕이 타계하고 나이 어린 성왕이 즉위하자, 숙부인 주공이 섭정을 하였는데, 주공은 성왕의 자리를 일절 넘보지 않았다. 성왕과 주공의 처지가 단종과 수양대군의 사례와 같았지만, 주공과 수양대군의 처신은 결과적으로 달랐던 것이다. 성삼문은 세조의 옆에 서있던 신숙주에게 화살을 돌렸다.
“집현전에 함께 있을 때 세종대왕이 어린 손자(단종)의 앞날을 잘 보살펴 달라고 당부했건만, 너는 어찌하여 불충을 저지르느냐.”
계유정난 당시부터 수양대군의 편에 섰던 신숙주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자리를 피했다.
세조는 성삼문에 이어 박팽년에게 “충청감사로 있을 때 이미 신(臣)이라고 했고, 녹까지 먹어 놓고, 이제 와서 신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하고 지적했다. 박팽년은 “충청감사는 상왕의 신하로서 한 일이고, 장계(狀啓)에서도 신이라고 쓰지 않았다.”라고 반박했다. 당시 장계를 살펴보니 ‘신하 신(臣)’이 적혀야 할 곳에 모두 ‘클 거(巨)’가 적혀 있었다. 박팽년의 집 창고에도 쌀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유응부는 “칼로 베려던 일이 간사한 자의 고변으로 실패했으니 빨리 죽여라.”라고 말한 뒤 성삼문과 박팽년을 바라보며 꾸짖었다.
“예로부터 서생과는 일을 도모할 수 없다고 하더니 맞는 말이었구나. 너희들이 연기하자고 하는 바람에 화를 당하게 됐다.”
유응부는 형리들의 모진 고문으로 심문 과정에서 숨을 거뒀다. 당시 유성원은 성균관에 있다가 거사 계획이 탄로 나자 급히 집으로 돌아가 사당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세조는 유응부와 유성원의 시신까지 한강가 새남터 형장으로 옮겨 성삼문 등과 함께 몸을 여섯 갈래로 찢어 버렸다. 당시 성삼문과 박팽년은 유명한 시를 남기며 자신의 심정을 밝혔다.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성삼문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박팽년
야광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세조는 이들의 시를 듣고 “지금은 역적이지만, 후세에 충신으로 이름을 떨칠 것”이라고 했다.
사육신 사건이 일어난 지 1년 뒤인 1457년 6월, 세조는 단종을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해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를 보냈다.
이로부터 3개월 뒤 계유정난 직후 유배됐던 금성대군이 순흥(順興, 경북 영주)에서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단종 복위를 도모하였다. 단종을 순흥으로 옮긴 뒤 군사를 일으켜 한양으로 진격하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안동의 관노 이동(李同)이 이를 알아채고 고변하는 바람에 금성대군은 반역죄로 세조의 사약을 받고 옥사한다.
복위운동이 잇따르자 세조의 숙부인 양녕대군(讓寧大君)과 영의정 정인지, 좌의정 정창손, 이조판서 한명회 등은 노산군이 ‘반역의 주인’이라며 아예 노산군을 죽여 화근을 없애야 한다고 청했다. 세조는 일단 노산군을 서인(庶人)으로 삼았다가 뒤이어 사약을 내렸다. 죽음을 맞았을 때 단종의 나이는 열일곱 살이었다. 그는 유배 생활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원통한 새 한 마리 궁에서 쫓겨나와
외로운 몸 그림자 푸른 산 헤매네.
밤마다 자려 해도 잠은 오지 않고
해마다 한을 없애려 해도 없어지지 않는구나.
울음소리 끊어진 새벽 산엔 어스름 달 비추고
봄 골짜기엔 피 토한 듯 낙화가 붉어라.
하늘은 귀 먹어서 이 하소연 못 듣는데
어찌하여 서러운 이 내 몸은 귀만 홀로 밝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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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사건들의 기승전결,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와 상호작용을 추적하여 5천 년의 한국사를 복합적으로 이해한다. 고대, 고려, 조선, 근대, 현대로 한국사의 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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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사육신 사건 –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이근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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