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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사를 움
직인 100
대 사건
냉전과 반목이 불러온 민족의 비극

6 · 25 전쟁

한국전쟁
요약 테이블
시대 1950년

해방 이후 민족 분단으로 인한 대립과 반목은 끝내 동족상잔의 비극을 불러왔다. 6·25 전쟁은 엄청난 희생자를 낳고, 한민족에게 치유하기 어려운 정신적 후유증을 남겼다. 전쟁이 발발한 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한반도는 종전이 아닌 정전 상태에서 남북 간의 적대감과 간헐적인 무력 충돌이 이어졌고 평화와 안전이 위협받았다. 특히 20세기 말까지 강대국들의 외교 정책과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한반도의 정세 역시 끊임없이 요동쳤다.

배경

1948년 남한 단독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이 수립되다.
1949년 민족 독립운동 지도자 김구가 피살되다.
1950년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가 인천에 상륙하다.

설명

해방 이후 남과 북에 두 개의 단독 정부가 들어선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동서 냉전이 심화되던 시기인 1949년 중국에서는 모택동(毛澤東)이 공산혁명에 성공해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섰다. 이에 미국은 동북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봉쇄하기 위해 일본을 중심으로 한국과 대만, 필리핀을 연결하는 방위 전략을 세우게 되었다. 하지만 남한에서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반대 시위가 계속되는 것은 물론, 5·30 총선거에서도 이승만 정권이 고작 30석의 의석을 확보하는 등 정국 불안이 심화되었다. 미국은 알류산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잇는 ‘애치슨 라인’을 설정함으로써 한국과 대만을 태평양 지역의 방위선에서 제외했다.

중국의 공산혁명과 미국의 애치슨 라인 설정은 소련이 한반도 문제에 적극 개입하는 계기로 작용하여 1950년 4월부터 소련은 북한에 군수물자와 공군 등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당시 남한 정부는 수립 초기부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제헌국회 소장파 의원들이 미군 철수와 평화통일을 주장하면서 현 정권에 반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김약수 등 13명의 소장파 의원들을 남로당 공작원과 접촉하여 정국을 혼란시키려 했다는 혐의로 검거했다. 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이다. 이승만 정권의 불협화음은 국회 내의 일만이 아니었다. 제주 4·3 사건과 여수·순천 사건으로 촉발된 무장 항쟁 등이 잇달았고, 여기에 경제난까지 겹쳐 민심은 바닥을 쳤다. 이승만 정권은 결국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이어받은 국가보안법을 제정하는 등 정권 유지에도 벅찬 상황이 되었다.

한편 북한의 김일성 정부는 군사력을 증강하며 대남 통일 공세를 강화하는 한편, 남한의 무장 투쟁 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무장유격대를 남파했다. 소련의 스탈린이 1949년 9월 북한 주재 대사로부터 받은 보고서에는 ‘김일성은 현 정세하에서는 평화통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남한 정부를 무력으로 공격하면 남북 양쪽의 인민들이 이를 지지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북한은 1949년에 소련, 중국과 잇따라 군사비밀협정을 체결하여 비행기와 탱크 등을 지원받은 데 더해 중국군에 참여한 조선의용군 4만여 명을 북한 인민군에 편입시켰다. 남과 북의 대치가 심화되는 가운데 1949년에는 38선 주변에서 크고 작은 군사 충돌이 874차례나 일어났다.

6·25 당시 남한의 육군 장교복

ⓒ 육군박물관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6·25 당시 북한의 육군 장교복

ⓒ 육군박물관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남북 간의 전면전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을 기해 북한 인민군이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개시하면서 일어났다. 당시 남한의 국방부는 ‘북괴군 전면 공격에 대한 담화’를 발표했으나, 김일성은 26일 방송을 통해 남한의 북침에 따른 반격전을 전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인민군은 월등한 화력을 앞세워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했고, 남한은 27일 정부를 대전으로 옮겼다. 인민군이 낙동강 일대까지 진격하는 데는 불과 2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7월 하순에는 경상도를 제외한 남한의 전 지역이 인민군에 점령당했다.

미국은 북한의 군사 행동을 소련의 공산화 전략으로 판단하고 곧바로 전쟁에 개입했다. 미국은 26일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해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한국의 군사 원조 권고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유엔은 미국이 주도하는 통합군 사령부를 구성하고, 16개국의 연합군을 편성해 남한에 파견했다. 연합군 사령관을 맡은 미국의 맥아더(D. MacArthur) 장군은 7월 14일 이승만에게서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이양받았다. 남한 지역의 90퍼센트를 차지한 북한은 유엔군의 반격에 의해 후퇴할 때까지 3개월 동안 효율적인 전시 동원 체제를 갖추기 위해 당과 인민위원회, 민주청년동맹, 여성동맹 등을 남한 지역에 조직했다. 동시에 남한의 1,526개 면 가운데 1,198개 면을 대상으로 ‘무상 몰수 무상 분배’의 원칙에 따라 토지 개혁도 실시했다.

유엔군이 9월 15일 인천에 상륙하면서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허를 찔린 북한은 패주를 거듭하며 일방적으로 후퇴했다.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연합군이 계속 북진하자, 중국은 연합군이 38선을 넘으면 인민군을 지원하기 위해 중국군을 투입하겠다고 경고했다. 중국은 당초 유엔 안보리가 연합군에 부여한 임무는 “침략군을 38선 이북으로 몰아내 평화와 군사분계선을 회복하는 일”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하지만 10월 1일에 한국군이 3사단을 선두로 38선을 넘은 데 이어, 연합군도 10월 7일 38선을 넘어 원산과 함흥, 흥남까지 진격했다.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한 뒤 10월 하순에는 청천강 북쪽으로 진격했다. 10월 26일에는 한국군 6사단이 압록 강변의 초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연합군의 38선 이북 지역으로의 진격은 유엔으로부터 사후 승인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중국에 참전 명분을 제공했다.

서울 시가전

6·25 당시 연합군과 북한군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한반도 전역을 전쟁으로 몰아넣었다.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연합군이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 근처까지 밀고 올라가자, 중국은 10월 25일부터 100만 명의 군대를 파견해 전세를 역전시켰다. 중국군의 인해(人海) 전술로 연합군은 11월 28일 전면 후퇴를 결정하고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을 내준 뒤 평택과 오산 근처로 밀려났다. 연합군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남북한의 주민들은 눈보라 속에 대대적인 피란길에 오르게 되었고, 이때 수많은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다시 반격에 나선 유엔군은 3월 14일에 서울을 되찾고, 초여름 무렵에는 현재의 휴전선 일대까지 인민군을 밀어냈다. 당시 맥아더는 ‘중국을 쳐야 이길 수 있다’라며 원자폭탄 사용을 건의했다가 세계적인 반전 여론에 밀려 4월 11일 리지웨이(M. B. Ridgway) 장군에게 사령관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38선을 중심으로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진 채 공방전이 이어지자, 미국은 협상을 통해 전쟁을 매듭짓기로 결정했다. 소련은 미국의 비공식 제의를 받아들이고 유엔을 통해 휴전을 제의했고, 미국이 곧바로 이를 수용하면서 한반도는 휴전 교섭 국면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1951년 6월부터 연합군과 중국군, 북한군 사이에 휴전 회담이 진행되었다. 주요 의제는 군사분계선 설정과 중립국 감시 기구 구성, 포로 교환 문제 등이었다. 그러나 회담 중에도 소모적인 전투가 진행되어 희생은 더욱 커졌고, 작전권을 미국에 넘긴 남한 정부는 회담에서 배제된 채 북진 통일을 주장했다.

휴전 회담은 특히 포로 교환 문제에서 난항을 거듭했다. 연합군이 제출한 인민군과 중국군의 포로는 13만 2,000여 명이었고, 중국과 북한이 제출한 한국군과 연합군의 포로는 1만 1,500여 명이었다. 미국은 포로 개개인의 자유 의사에 따라 원하는 포로만 교환할 것을 제안했으나 북한과 중국은 모든 포로를 본국으로 송환시켜야 한다고 맞섰다. 인민군과 중국군의 포로 가운데 연합군이 확인한 송환 희망자는 8만 3,000여 명이었다. 하지만 인민군과 중국군이 이를 믿을 수 없다고 반발하면서 휴전 교섭은 한동안 중단되었다. 그러던 중 미국에서 아이젠하워(D. D. Eisenhower) 대통령이 당선되어 정권이 교체되고, 소련에서는 스탈린이 사망하는 등 국제 정세가 변했다.

휴전 회담은 상병(傷病) 포로 교환 협정이 이뤄지면서 1953년 4월 26일 다시 속개되었다. 협정은 이승만이 일방적으로 반공(反共) 포로 2만 5,000여 명을 석방하면서 다시 위기를 맞을 뻔 했으나, 결국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북한 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국 인민의용군 총사령관 팽덕회(彭德懷), 미국 합참의장 마크 W. 클라크가 협정서에 서명했다. 미국은 휴전 협정에 반대하던 이승만에게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군비 증강 등을 약속하고 동의를 얻어냈다. 10월 1일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국 영토의 어느 지점에나 미군이 주둔하는 것을 허용하는 전토 기지(全土基地)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3년 1개월간 지속된 6·25 전쟁은 양쪽에 240만 명이 넘는 군인 사상자를 냈다. 일반 시민의 희생은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한반도 전체가 초토화된 가운데 남과 북의 국경선인 38선은 휴전선으로 바뀌었다. 전쟁 이후 남북은 각각의 체제 이데올로가 강화되면서 권력 집중화와 독재 정권이 들어섰고, 이후 분단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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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집필자 소개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정치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국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박찬구 집필자 소개

부산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991년 서울신문사에 입사하여 사회부, 정치부, 미래전략팀을 거쳤으며 현재 국제부에서 근무 중이다.

출처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 저자이근호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역사적인 사건들의 기승전결,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와 상호작용을 추적하여 5천 년의 한국사를 복합적으로 이해한다. 고대, 고려, 조선, 근대, 현대로 한국사의 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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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6 · 25 전쟁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이근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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