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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사를 움
직인 100
대 사건

황사영 백서와 신유박해

조선에 널리 퍼진 천주교

요약 테이블
시대 1801년

16세기 말 중국에 다녀온 사신들이 서양 서적을 가지고 들어오면서 조선에 천주교가 처음 알려졌다. 서양의 학문이라 하여 서학이라 불린 천주교는 초기에 학문으로써 조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8세기 후반, 남인 학자들이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면서 천주교도가 크게 늘어난 반면, 성리학적 입장에서 천주교를 비판하는 움직임도 함께 커졌다.

배경

1784년 이승훈이 한국인 최초로 북경에서 천주교 세례를 받다.
1785년 정조 9년,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하다.
1791년 윤지충이 천주교 세례를 받고, 가톨릭 의식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아 처형되다.

설명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며, 나라가 나라 꼴이 되는 것은 교화가 되기 때문인데, 지금 이른바 사학(邪學)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무너뜨리고 교화에 배치되어 저절로 이적(夷狄, 오랑캐)과 금수(禽獸)의 지경에 돌아가고 있다.

순조(純祖) 1년인 1801년 1월 10일, 정순왕후가 천주교를 금지하는 교지를 내렸다. 정순왕후는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발동해 다섯 집을 하나로 묶어 서로 천주교도를 감시, 고발하게 했으며, 한 집에서라도 천주교도가 적발되면 다섯 집을 모두 처벌하도록 했다. 신유년(辛酉年)의 천주교 박해는 이렇게 시작됐다.

오가작통법

오가작통법은 다섯 집을 하나로 묶어 세금 징수, 부역 동원 등에 이용한 호적 제도이다. 순조 대에 이르러 정순왕후는 천주교를 적발하기 위해 오가작통법을 다시 발동하였다. 이것은 오가작통법의 초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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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천주교 금지령은 나라의 기강과 유교적 윤리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을 띠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정적을 제거한다는 정치적인 배경을 깔고 있었다. 정조 사후 순조가 열한 살에 왕위를 잇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고, 이로써 정조 시절 위기에 몰렸던 노론 벽파가 실권을 잡았다. 이에 정순왕후와 심환지(沈煥之) 등을 중심으로 한 노론 벽파는 천주교 금지를 빌미로 정적인 남인과 시파를 대거 숙청하였다. 당시 남인과 시파에는 학문이나 신앙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의 대규모 천주교 탄압으로 이승훈(李承薰), 이가환(李家煥), 정약종(丁若鍾), 권철신(權哲身)을 비롯해 300여 명이 처형되고, 정약전(丁若銓), 정약용(丁若鏞) 형제가 각각 신지도와 장기현으로 유배됐다. 이를 정권 측에서는 신유옥사(辛酉獄事)라 하고, 피해를 당한 측에서는 신유박해(辛酉迫害) 또는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고 부른다.

정순왕후가 교지를 내린 지 2개월 뒤인 3월 12일 청나라 신부인 주문모(周文謨)가 의금부에 자수를 하였다. 평소 그를 따르던 신도들이 거의 모두 잡혀가는 바람에 마땅히 발붙일 곳이 없었고, 또 언어가 익숙하지 못해 행동이 불편했으며, 자수를 하면 무거운 처벌을 면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주문모는 자수 이유를 밝혔다. 그는 1795년 북경에 있다가, 동지사가 귀국하는 틈을 타 몰래 조선으로 들어와 한양에서 전도 활동을 하고 있었다. 조정은 주문모를 신문하는 과정에서 정조의 이복형제인 은언군(恩彦君) 이인(李裀)의 처와 며느리가 주문모에게 영세를 받은 사실이 드러나자, 이들에게 즉각 사약을 내렸다. 주문모도 그해 5월 한강가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그해 9월에는 주문모를 따르던 신도 황사영(黃嗣永)이 의금부의 수색을 피해 달아났다가 북경에 있는 프랑스 출신 구베아 주교에게 천주교 박해의 내용을 알리고 조선에서 신앙과 포교의 자유를 가질 수 있도록 외세(外勢)를 동원해 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의 서한을 보내려다 붙잡힌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이 ‘황사영 백서(帛書, 비단에 쓴 글)’ 사건이다.

황사영은 정약종의 조카사위로, 정약종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신도가 됐다. 그는 충청도 제천의 토기 굽는 마을인 배론(舟論)으로 피신해 토굴에서 은거하며 황심(黃沁), 옥천희(玉千禧) 등과 의논해 구베아 주교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이에 황사영은 길이 62센티미터, 넓이 38센티미터의 흰 비단에 모두 1만 3,322자를 깨알 같이 먹으로 써 내려갔다.

황사영은 우선 조선에서의 천주교 상황과 주문모 신부의 활동, 천주교 박해와 순교자 관련 내용, 주문모 신부의 자수 및 처형 사실 등을 구체적으로 적은 뒤 조선에서의 천주교 포교를 위한 세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그 방안은 청나라 황제가 황지(皇旨)를 내려 조선에서 서양인과의 교제를 허용하도록 하고, 안주에 무안사(撫按司)를 열어 중국이 이 지역을 관리하게 하고, 서양국(西洋國)과 통하여 큰 선박 수백 척에 정병(精兵) 5만~6만 명과 대포를 비롯해 각종 무기를 싣고 해안가로 와 조선을 깜짝 놀라게 하여 천주교를 포교하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황사영은 호소하였다.

(이 나라는) 위로는 뛰어난 임금이 없고, 아래에는 어진 신하가 없어서 자칫 불행한 일이 있기만 하면 흙더미처럼 와르르 무너지고 기왓장처럼 부서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2,000년 이래 모든 나라에 성교(聖敎)가 전해져서 귀화하지 않은 곳이 없는데 홀로 탄알 만한 이 나라만이 다만 천주님의 명에 순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성교를 잔혹하게 해치고 형벌로 성직자를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이런 짓은 동양에서 200년 이래 없었던 일이니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묻는 것이 어찌 옳지 않겠습니까.

또한 “힘이 모자라면 배 수십 척에 5,000~6,000명만 되어도 쓸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이 백서는 그해 10월 중국으로 떠나는 동지사 일행에 섞여 황심과 옥천희가 북경까지 갖고 가기로 했다. 하지만 이들이 9월 20일과 29일 사이에 모두 체포되면서 백서 전달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조정에서는 백서 내용 가운데 외세에 무력 동원을 요청한 대목을 문제 삼아 이들을 나라를 위태롭게 한 역모 세력으로 규정하고, 이들과 가까운 천주교도와 남인 인사들을 대거 잡아들였다. 이어 황사영, 황심, 옥천회 등을 처형하고, 유배지에서 불러 올려 다시 조사한 후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각각 흑산도와 강진현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했다. 또 남인 지도자인 채제공(蔡濟恭)이 천주교를 두둔했다는 이유로 그 관작을 추탈했다.

이처럼 천주교도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한 뒤, 그해 12월 22일에는 〈토역반교문(討逆頒敎文)〉을 반포해 천주교도 처벌의 정당성을 역설하고, 관련자들의 혐의 내용을 널리 알리게 했다. 이후 남인과 시파는 정치권에서 대거 축출되고, 벽파가 정권을 잡으면서 일당 독재로 들어가게 된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도 더욱 가혹해졌다.

조선에 천주교가 처음 소개된 것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무렵이었다. 당시 중국에 간 사신들이 서양 관련 서적을 갖고 들어오면서 천주교가 알려졌으며, 처음에는 서양 학문이라 하여 서학(西學)이라고 불렸다. 특히 이탈리아 신부 마테오 리치가 한문으로 저술한 천주교 교리서 《천주실의(天主實義)》가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나 유몽인의 《어우야담》 등에 소개되면서 조선의 초기 천주교 전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인조 시절에는 소현세자가 북경에 인질로 잡혀 있다가 돌아오면서 천주교 관련 서적을 갖고 오기도 했다.

18세기 후반 정조 때에 이르러 서울 부근의 남인 학자를 중심으로 천주교를 신앙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일기 시작했다. 이때 권철신, 이벽(李蘗), 정약종, 정약용, 이가환 등이 천주교에 입교하였으며, 이들은 전국 곳곳에 천주교 조직을 만들어 포교 활동을 벌였다. 특히 이벽의 제자 이승훈은 정조 8년인 1784년 북경에서 서양인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귀국해 천주교회를 창설하기도 했다. 하지만 성리학적 입장에서 천주교를 배격해야 한다는 논의도 활발했다. 안정복(安鼎福)은 《천학문답(天學問答)》을 통해 성리학적 입장에서 천주교가 지닌 비현실성과 비윤리성을 비판했다.

정치적으로 남인과 가까웠던 정조도 1785년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관련 서적의 반입을 금지시켰다. 1791년에는 모친상을 천주교 의식으로 치르고 신주를 불태운 윤지충(尹持忠)을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조는 “정학(正學)이 밝아지면 사학은 저절로 종식될 것”이라며 천주교를 탄압하기보다 오히려 교화를 강조하며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펴나갔고, 그 결과 정조 재위 기간 동안 천주교도가 급속히 늘어났다.

이처럼 천주교도의 확산은 조선 사회의 성리학적 계급 질서와 지배층의 통치 행위에 중대한 위협으로 인식됐다.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인 의례, 의식을 거부하는 천주교는 조선 사회의 전통적인 가치와 정치, 사회 조직에 대한 일대 도전이었고, 때문에 천주교도가 늘어날수록 보수적인 지배층의 불안감도 그만큼 증폭됐다. 이에 따라 19세기 후반 개신교가 유입될 때까지 100년 가까이 천주교는 박해와 순교를 거듭하며 수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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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집필자 소개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정치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국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박찬구 집필자 소개

부산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991년 서울신문사에 입사하여 사회부, 정치부, 미래전략팀을 거쳤으며 현재 국제부에서 근무 중이다.

출처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 저자이근호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역사적인 사건들의 기승전결,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와 상호작용을 추적하여 5천 년의 한국사를 복합적으로 이해한다. 고대, 고려, 조선, 근대, 현대로 한국사의 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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