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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사를 움
직인 100
대 사건
후금에 패하여 형제의 맹약을 맺다

정묘호란

丁卯胡亂
요약 테이블
시대 1627년

1627년 1월 중순, 후금 군사 3만여 명이 압록강을 넘어 조선을 침입했다. 인조와 대신들은 적군의 침입 배경과 전황을 점검하고, 전시 체제에 따른 각종 조치들을 의논했다. 하지만 조선은 후금의 군사들에게 파죽지세로 밀렸고, 인조는 결국 강화도로 피란을 떠났다. 후금은 조선과 형제의 맹약을 맺은 뒤 3월 초에야 물러났다.

배경

1623년 광해군의 중립 외교가 막을 내리고 친명배금 정책으로 전환하다.
1624년 한윤이 후금으로 달아나 인조 즉위의 부당성을 설파하다.
1627년 후금의 침입으로 인조가 강화로 피신하다.

설명

“이달 13일에 금나라 군사가 의주를 포위하고 접전했는데 승패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접반사 원탁)

“적의 형세가 어떻다고 보는가.” (인조)

“기병이 거침없이 쳐들어온다면 하루 동안 8~9식(息, 1식=30리)의 길을 달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시급히 대비해야 합니다.” (영중추부사 이원익)

“징병이 시급하니 3만 명을 기본으로 징발토록 하라.” (인조)

“강화도를 피난처로 정해 놓았다가 안주에서 패했다는 소식이 오면 곧바로 강도(江都)로 들어가소서.” (비변사 당상 이귀)

“그런 얘기는 서서히 하라.” (인조)

인조 직전의 광해군 재위 시절에는 국력이 쇠퇴해 가는 명나라와 새로운 강자로 세력을 넓히던 후금 사이에서 실리적인 중립 외교 정책을 구사했다. 이는 명나라를 사대하는 서인파가 반정을 일으키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인조 대에 이르러서는 광해군의 외교 정책을 비판하며 숭명배금(崇明排金)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후금의 요동 지역을 회복하기 위해 압록강 입구인 평안도 철산 앞바다의 가도(椵島)에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에 대해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누르하치 사망 이후 후금의 2대 황제로 즉위한 태종(홍타이지)은 왕자 시절부터 조선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하였으며, 인조의 이 같은 외교 노선에 상당한 자극을 받고 있었다. 후금은 또 명나라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배후인 조선으로부터도 위협을 받게 됐고, 게다가 조선과의 경제 교류까지 막히자 물자 부족을 타개할 방안이 절실했다.

홍타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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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차에 이괄의 난 당시 후금으로 달아난 한윤이 인조 즉위의 부당성을 설파하자, 후금은 ‘억울하게 폐위된 광해군을 위해 복수하겠다’라는 명분을 내세운다. 광해군 당시 후금에 투항한 강홍립(姜弘立) 역시 조선에 있던 자신의 가족들이 핍박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태종의 조선 침공을 부추겼다. 당시 조선에서는 이괄이 평안도에서 반란을 일으킨 여파로 변방 수비가 허술해져 있었다. 때문에 인조도 대신들과 방어 태세를 점검하면서 “관서(關西, 평안도) 지방은 미처 구제할 수 없을 듯하다.”라고 했다.

태종의 둘째 아들 아민(阿敏)이 이끄는 후금군은 의주를 점령하고 이어 용천, 선천, 안주, 평양, 황주 등지를 지나 황해도의 남동쪽인 평산에 이르렀다. 임진강 이북 지역을 큰 어려움 없이 장악한 셈이다. 한편으로 후금군은 가도의 모문룡 부대를 공략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은 곽산 능한산성과 안주성 등의 방어전에서 패퇴하고, 평산에 진을 치고 있던 장만(張晩)은 예성강 남쪽 개성으로 후퇴했다. 또 모문룡도 가도에서 대패해 평안도 선천의 신미도로 밀려났다. 이에 인조는 강화도로 옮겨 항전 태세를 갖췄고,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로 피신했다. 그리고 김상용(金尙容)이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서 한양을 지키게 됐다. 이 지경에 이르자 인조는 “팔도가 어육이 되는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하며 비통해했다.

강화 지도

고려 시대 몽골에 항쟁하기 위해 강화도로 천도한 이래, 인조는 정묘호란 때 강화도로 피란하여 항전을 준비했다. 이후로도 강화도는 한양 외곽을 방어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고, 이에 따라 국경과 군사 시설을 자세하게 표시한 지도도 여러 차례 제작하였다. 이 지도는 1679년 제작된 것으로, 강화궁성, 정족산성, 전등사, 돈대 등이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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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평산에 진을 친 후금군은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했다. 명나라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장기간에 걸친 조선과의 전쟁이 부담스러웠고, 조선 깊숙이 들어가 싸우기에는 병력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특히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조선 의병과 관군들이 합세해 후금군의 후방 쪽을 압박하여 배후 보급로도 끊길 상황이었다.

이에 후금은 평산에 머물며 조선에 강화를 제의한다. 조선으로서도 사실상 후금의 침략을 막아 낼 만한 능력이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후금은 부장 유해(劉海)와 강홍립을 강화도로 보내 3대 조건이 담긴 서신을 전달했다. 3대 조건이란 후금에 압록강 이남 변경 지역 땅을 내놓고,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잡아 보내며, 명나라 토벌에 군사 3만 명을 지원하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조선 대신들은 화친에 찬성하는 주화론자(主和論者)와 이에 반대하는 척화론자(斥和論者)로 나뉘어 논쟁을 벌였다. 결국 인조는 현실적으로 후금과 싸울 힘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화의 교섭에 응하였다. 교섭 과정에서 후금은 조선에게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후금이 형이 되고 조선이 아우가 되는 ‘형제의 맹약(兄弟之盟)’을 맺자고 제의했다. 나아가 명나라 연호인 천계(天啓)를 더 이상 사용하지 말 것, 조선 왕자를 인질로 보낼 것 등을 추가 조건으로 제시했다.

이에 조선은 “차라리 나라와 함께 죽을지언정 명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말라는 요구는 결단코 따를 수 없다.”라고 못 박고, 종친인 원창령(元昌令) 이구(李玖)를 왕제(王弟)라고 하여 후금 진영에 보냈다. 조선은 이와 함께 후금군이 평산을 넘지 않을 것, 맹약 후 즉시 철군할 것, 철군 이후 다시 압록강을 넘어서지 말 것, 양국은 형제국으로 칭할 것, 조선이 명나라에 적대하지 않는 것을 후금은 인정할 것 등을 요구했다. 이는 한마디로 명나라와의 사대관계는 계속 유지하되,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을 지킬 테니 더 이상 침범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후금은 이 같은 요구를 받아들이고 평산에서 철군하였다. 이를 정묘약조라고 부른다. 서로가 확전에 부담을 안고 조약을 맺은 만큼, 양국 모두 그 내용에 만족하지 못했다. 숭명배금의 명분을 중요시하는 조선에게는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는다는 것 자체가 패전국으로서의 치욕이었고, 후금은 눈엣가시 같은 모문룡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채 군사를 되돌려야 했다.

조선과 형제의 맹약을 맺고 돌아가던 후금은 도중에 평안도 철산의 용골산성을 공격했다. 이에 정봉수(鄭鳳壽)가 이끄는 의병들은 아침부터 10시간이 넘도록 모두 다섯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후금군을 물리쳤다. 이들은 활과 조총, 돌 등으로 후금에 완강히 저항해 적군 수백 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앞서 후금은 압록강을 넘어 남하할 때도 용골산성에서 정봉수의 군대에 의해 타격을 입었다. 당시 후금에 투항한 장사준(張士俊)이 후금군 수백 명을 이끌고 성 앞으로 와서 항복을 권유하자, 정봉수는 성 밖에 매복시켜 둔 의병들을 이끌고 그들을 공격해 장사준을 참수했다. 이에 사기가 오른 의병들은 곧이어 벌어진 전투에서 후금군의 공격을 물리쳤다. 정묘호란 당시 조선이 가장 크게 승리한 것이 바로 용골산성 전투였다.

철수하던 후금은 의주와 가산, 순안, 운산 등지에서도 조선의 관군과 의병에게 공격을 받아 손실을 입었다. 운산에서는 후금군 1,000여 명이 우후(虞侯) 이직(李溭)이 이끄는 300여 명의 군사에 의해 야간에 기습을 당해 패주했다. 이립(李立)은 의주 부근에서 적군 200여 명을 사살했으며, 김여기(金礪器)의 의병부대는 가산 부근에서 적군을 물리쳤다.

정묘호란 이후 조선은 남한산성 일대의 방어를 위해 수어청(守禦廳)을 설치하고 군사 훈련을 전담하는 어영청(御營廳)을 증강하는 등 군사력을 키우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후금은 갈수록 과중한 세폐(歲幣, 공물)를 요구했고, 조선과의 약조를 어기고 모문룡을 견제하기 위해 의주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로써 조선과 후금의 관계는 갈수록 악화되었고, 마침내 후금은 10년도 되지 않아 다시 조선을 침공하였다. 후금은 국호를 청(淸)이라 고치고, 태종을 스스로를 황제라 칭했으며, 수도는 심양, 연호는 숭덕(崇德)으로 정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선에게 군신(君臣)의 관계를 요구하였다.

남한산성 수어장대

인조 2년 남한산성 일대의 방어를 위해 수어청을 설치하였다. 수어장대는 수어청의 장관들이 모여 지휘를 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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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집필자 소개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정치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국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박찬구 집필자 소개

부산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991년 서울신문사에 입사하여 사회부, 정치부, 미래전략팀을 거쳤으며 현재 국제부에서 근무 중이다.

출처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 저자이근호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역사적인 사건들의 기승전결,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와 상호작용을 추적하여 5천 년의 한국사를 복합적으로 이해한다. 고대, 고려, 조선, 근대, 현대로 한국사의 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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