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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인 100
대 사건 왕이 주도한 정국의 전환
경신환국
庚申換局시대 | 168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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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사에서 17세기 후반은 붕당 간의 대립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다. 숙종의 즉위로 남인이 정권을 잡은 이후 20년 동안 집권 세력이 세 차례나 바뀔 정도였다. 서인은 1674년 갑인환국을 통해 남인에게 밀려났다. 남인은 1680년 경신환국으로 축출되고,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았다. 이어 1689년에는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제거되고, 남인이 집권한다. 하지만 남인은 1694년 갑술환국으로 물러나고 서인이 재집권한다.
배경
1674년 서인과 남인 사이에 예송 논쟁이 벌어지다.
1689년 세자 책봉 문제로 노론이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하다(기사환국).
1694년 폐비 민씨 문제로 남인이 실각하고 노론과 소론이 집권하다(갑술환국).
설명
‘환국’은 ‘정국의 전환’을 뜻한다. 환국이 잦았다는 얘기는 당파 간의 경쟁이 그만큼 격렬했다는 의미다. 다만 당시 환국의 주체는 특정 당파가 아니라 왕인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자신이었다. 숙종은 집권 세력을 자주 교체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 충성 경쟁을 유발하는 효과를 노렸다. 특정 당파가 권력이 지나치게 강해지면, 대출척(大黜陟)으로 정권의 국면을 바꿔 버리는 일이 반복됐다. 이 과정에서 숙종은 외척을 기용해 특정 당파의 권력 독점을 견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처럼 잦은 환국은 각 붕당이 견제와 균형의 원리로 공론을 모색하기보다는 일당(一黨) 전제(專制)로 나아가는 측면이 강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현종 재위 마지막 해인 1674년 1월 효종 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가 타계하자, 시어머니인 장열왕후(莊烈王后) 조대비(趙大妃)의 복제(服制)를 놓고 남인은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기년설(朞年說)을, 서인은 9개월이면 된다는 대공설(大功說)을 각각 내세웠다. 《주자가례》를 해석함에 있어 서인은 효종 비가 맏며느리가 아니라 둘째 며느리라는 점에 방점을 찍었고, 남인은 효종 비가 중전을 지냈으므로 큰며느리의 예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현종은 남인의 기년설을 받아들였다. 앞서 1659년 효종이 타계했을 때는 서인이 1년설을, 남인이 3년설을 제기해 서인의 주장이 채택됐다.
당시는 예(禮)가 성리학적 사회질서의 핵심 규범이었던 시기로, 이 같은 논쟁은 단순히 장례 절차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었다. 서인과 남인 간의 복상(服喪) 논쟁이 1674년 8월 숙종이 즉위한 직후 서인을 옭아매는 빌미가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특히 서인의 거두 송시열은 복상 논쟁에서 ‘적처가 낳은 둘째 아들부터는 모두가 서자’라고 해석했다. 이는 효종이 적자가 아닌 서자의 신분으로 왕통을 이었다는 점을 부각시킨 것으로, 왕위 계승의 정당성에 관한 민감한 문제였다. 전국의 유생들은 송시열의 예론에 대해 찬반으로 갈라졌고, 남인들은 외척 김석주(金錫胄)와 결탁해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을 맹렬히 몰아붙였다.
결국 숙종은 남인의 손을 들었고, 이로써 서인들을 일제히 몰아냈다. 이것이 갑인환국(甲寅換局)이다. 정권 교체 이후 남인은 서인의 처벌 문제에 있어 강경파인 허목(許穆), 윤휴(尹鑴) 등의 청남(淸南)과 온건파인 허적(許積), 권대운(權大運) 등의 탁남(濁南)으로 나뉘고, 정국의 주도권은 탁남이 쥐게 된다.
경신환국(庚申換局)은 숙종 6년인 1680년 일어났다. 당시는 남인 영수 허적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때였다. 그해 3월 허적은 조부 허잠의 시호를 맞이하는 잔치를 베풀었는데, 도중에 비가 내리자 숙종은 비가 새지 않도록 기름을 먹인 유악(장막)을 허적에게 갖다 줄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허적은 허가도 받지 않고 이미 유악을 가져간 상태였다. 유악은 왕궁에서 쓰는 군사 물자로써, 개인적인 이유로 빌려갈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 숙종은 허적을 비롯한 남인들의 호가호위하는 행태에 불만을 갖고 있던 터여서, 이 일을 계기로 서인들을 대거 요직에 불러들였다.
며칠 후에는 병조판서 김석주의 사주를 받은 정원로(鄭元老) 등이 “허적의 서자 견(堅)이 복선군(福善君)을 왕으로 삼으려고 그 형제들과 역모를 도모하고 있다.”라고 고변했다. 허견 등이 전시사령부인 도체찰사부 소속 경기 이천 둔군(屯軍)에게 매일 특별한 군사 훈련을 시켰고, 도체찰사부가 지휘하던 개성 대흥산성에서도 훈련이 있었는데, 이는 복선군 옹위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도체찰사는 영의정이 맡도록 돼 있었고, 당시 영의정은 허적이었다.
허견은 숙종이 병이 잦아 만약 불행한 일이 닥치면 화를 예측할 수 없으니 미리 대비해야 한다고 복선군과 윤휴 등에게 말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복선군도 이를 인정했다. 복창군(福昌君), 복선군, 복평군(福平君) 삼형제는 인조의 3남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아들로, 숙종과는 오촌 사이였다. 이 일로 복선군과 허견은 처형됐고, 허적은 삭직된 뒤 사사 당했으며, 윤휴도 역시 사약을 받았다. 이 밖에 100여 명의 남인들이 처벌을 받는 등 남인들이 대거 축출됐다. 김석주가 치밀하게 계획한 ‘3복의 변’으로 남인 세력은 물론 그들과 가깝게 지내는 종친 세력까지 제거당한 것이다.
이로써 정권을 잡은 서인은 송시열을 영수로 하는 노론(老論)과 윤증(尹拯)을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으로 나뉘었다. 권력의 핵심을 장악한 것은 송시열의 노론과 김석주, 김만기(金萬基), 민정중(閔鼎重) 등 왕실의 외척이었다.
경신환국으로 밀려난 남인은 그로부터 9년 뒤 다시 정권의 중심으로 들어섰다. 기사환국은 1689년 숙종이 후궁 장씨(張氏)의 소생인 왕자 윤(昀)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양자로 들여 원자로 삼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비롯됐다. 숙종의 정비는 노론인 김만기의 딸 인경왕후(仁敬王后)였으나 1680년 타계했고, 노론 민유중(閔維重)의 딸인 계비 인현왕후는 원자를 낳지 못했다. 이에 노론은 인현왕후의 나이가 아직 젊으며, 태어난 지 두 달밖에 안 된 후궁 소생을 원자로 삼는 것은 부당하다며 반대했다.
그럼에도 숙종이 왕자 윤을 원자로 확정하고, 생모 장씨를 빈으로 승격시키자 송시열은 거듭 시기상조라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자 숙종은 송시열을 포함해 노론계를 대거 유배 보냈고, 송시열에게는 사약을 내렸다. 또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비하려 하자, 반대 상소를 올린 노론 인사들도 귀양을 보냈다. 이를 계기로 희빈(禧嬪) 장씨가 중전이 되고, 원자 윤은 세자로 책봉된다. 아울러 정국의 주도권은 민암(閔黯)과 이의징(李義徵) 등 남인이 되찾았다.
그러나 남인의 집권은 오래가지 못했다. 기사환국 5년 뒤인 1694년, 노론계인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맏손자 김춘택(金春澤)과 소론계인 승지 한구(韓構)의 아들 한중혁(韓重赫) 등이 폐비 민씨의 복위운동을 벌이다 일당인 함이완(咸以完)의 고변으로 체포된다. 당시 우의정 민암 등 남인은 이 사건을 부각시켜 노론을 몰아내기로 하고, 복위운동에 연루된 서인들을 모두 하옥시켜 심문했다.
하지만 당시 숙종은 중전 장씨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민씨를 폐위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총애하던 숙원 최씨를 남인이 독살하려 한다는 고변이 서인 측으로부터 올라왔다. 그러자 숙종은 남인을 축출하고 다시 서인을 불러들였다. 또 폐비 민씨를 복위시키는 한편, 중전 장씨는 빈으로 강등했다. 송시열의 관작이 복구된 것도 이때였다. 이것이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이후 남인은 재기할 힘을 잃게 된다. 갑술환국 직후에는 남구만(南九萬)을 비롯한 소론 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소론은 7년 뒤 ‘무고(巫蠱)의 옥(獄)’으로 노론에게 밀려난다. 희빈으로 강등된 장씨가 자신의 거처인 취선당 주변에 신당을 지어 놓고 궁인과 무당을 시켜 인현왕후 민씨를 저주한 사실이 밝혀진 게 계기였다. 숙종 27년인 1701년, 인현왕후 민씨가 원인 모를 병마에 시달리다 죽은 직후였다. 희빈 장씨가 위기에 처하자 평소 장씨와 그의 소생인 세자를 지지하던 소론계가 숙종에게 장씨를 용서해 줄 것을 간청했다. 하지만 분노한 숙종은 이를 거부하고 희빈 장씨를 사사했으며, 소론계 인사들도 귀양 보내거나 파직시킨다. 이로써 조정의 주도권은 노론의 손에 쥐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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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사건들의 기승전결,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와 상호작용을 추적하여 5천 년의 한국사를 복합적으로 이해한다. 고대, 고려, 조선, 근대, 현대로 한국사의 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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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경신환국 –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이근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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