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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사건 프랑스 함대의 침입과 쇄국 정책
병인양요
丙寅洋擾시대 | 186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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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 서구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으로 동북아시아는 도전과 시련에 직면했다. 1854년 일본은 미국에 개항했고, 1860년 청나라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북경 조약을 체결했다. 조선 연안에도 서양 함선들이 통상조약 체결을 요구하며 빈번하게 출몰했다. 특히 러시아가 청나라와의 톈진 조약으로 우수리 강 동쪽을 차지해 조선과 국경을 맞대면서 집요하게 통상을 요구하고 국경을 침범하자, 조선은 대책 마련에 부심한다.
배경
1863년 철종이 승하하고 고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다.
1865년 흥선대원군이 천주교 금압령을 내리다.
1866년 프랑스 선교사 9명이 처형당하다.
설명
당시 조선에서는 1863년 철종의 뒤를 이어 고종(高宗)이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함에 따라 그 아버지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이 집정을 하고 있었다. 러시아 문제가 부각되자 대원군은 천주교도인 홍봉주(洪鳳周)와 승지 남종삼(南鍾三)으로부터 연이어 “프랑스 주교의 힘을 빌려 러시아의 남하를 막자.”라는 건의를 받는다. 대원군은 이때만 해도 천주교에 호의적이었다. 그 부인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閔氏)와 딸, 고종의 유모가 모두 천주교도였다. 대원군은 건의를 받아들였고, 이에 남종삼 등은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벌이던 프랑스 출신의 베르뇌 주교와 대원군과의 만남을 추진하였다. 이때가 1865년 겨울이었다.
하지만 황해도에 있던 베르뇌 주교가 한양에 도착하기 전, 북경 사신 이홍민 등이 ‘청나라가 서양인들을 죽이고 천주교를 단속하고 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한양에 보내면서 상황이 바뀐다. 이를 빌미로 영의정 조두순(趙斗淳)과 영중추부사 정원용(鄭元容)을 비롯한 대신들이 “대원군이 천주교와 흥정을 하려 한다. 서양인을 물리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 하며 정치적인 압박을 가하자, 대원군은 마음을 돌려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린다. 특히 이항로(李恒老)는 상소를 통해 “안으로는 사학(邪學)의 무리를 잡아 베고, 밖으로는 바다를 건너오는 적을 정벌해야 한다.” 하며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역설했다. 이로써 1866년 1월부터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된다.
당시 수렴청정을 하면서 대원군에게 정책 결정권을 맡겼던 조대비(趙大妃, 헌종의 모친인 신정왕후)는 1월 24일 사교(邪敎)를 금지하는 교서를 반포하고, “관리나 백성들 가운데 고발하는 자는 공로를 표창하고, 숨겨 주는 자는 코를 베어 죽일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던 프랑스 출신 신부 열두 명 가운데 베르뇌 주교를 포함해 모두 아홉 명이 붙잡혀 순교하였다. 남종삼, 홍봉주 등도 처형당했다. 탄압은 1870년까지 이어졌으며, 이 기간 동안 희생된 조선인 천주교도는 8,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를 병인박해(丙寅迫害)라고 한다. 같은 해에 일어난 병인양요(丙寅洋擾)는 바로 이 사건에 항의해 프랑스 함대가 조선의 강화도를 침공한 것을 이른다.
그해 조선은 서양 세력과 두 차례의 무력 충돌을 겪었다. 첫 번째가 프랑스 함대가 몰려오기 2개월 전, 평양에서 일어난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 호 사건이었다. 제너럴 셔먼 호는 7월 8일 황주 송산리 앞바다에 정박했다가 사흘 뒤 평양의 신장포구(新場浦口)에 이르렀다. 평안 병사 이용상(李容象)이 쌀과 고기 등을 건네며 철수를 요구했지만, 이들은 대동강을 타고 가다 총과 대포를 쏘며 평양 주민들을 살해하고, 조선 상선을 약탈했다. 그러자 평안 감사 박규수(朴珪壽)가 이끄는 관군과 평양 주민들은 제너럴 셔먼 호에 불을 지르고 선원 19명을 모두 죽여 버렸다. 조선 영토에서 일어난 서양과의 첫 무력 충돌이었다. 제너럴 셔먼 호 선원들은 조선의 퇴거 요구에 통상과 무역을 원한다고 하면서 “조선은 왜 천주교인들을 쫓아내는가. 프랑스의 큰 배는 이미 수도에 갔다.” 하고 말한 것으로 《조선왕조실록》은 기록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서양에서 온 배를 크고 모양이 이상하다 하여 이양선(異樣船)이라고 불렀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사이에 이양선이 몇 차례 조선 해안에 표류해 오기도 했지만,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통상 요구와 해로 측량, 조선 정세 탐지 등 특수한 목적을 띤 이양선이 조선 연안에 자주 출몰했다. 이 때문에 당시 해안 지역의 지방 관리들은 이양선이 출몰할 때마다 그 경과와 진행 과정을 조정에 보고하는 것이 주요 임무 가운데 하나였다. 프랑스 함대의 침범은 1866년 8월 13일 영종 방어사가 이양선 한 척이 부평의 경계 내로 들어왔다고 보고한 것으로 시작됐다.
이후 열흘 남짓 동안 이양선의 이동과 조선군의 대비 태세에 관한 보고가 다섯 차례 정도 조정에 보고됐다. 이양선이 세 척으로 늘어 강화도의 갑곶진을 거쳐 양화진에 이어 서강(西江)에 정박한 뒤 뱃머리를 돌려 강화 어귀와 김포 석곡을 지나 팔미도 바깥 바다로 빠져나갔다는 것이 열흘 동안의 보고 상황이었다. 이에 조선에서는 기마병과 보병 등을 서강에 보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했다.
당시 이양선은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이 이끄는 군함들이었으며, 베르뇌 주교 등이 체포될 당시 조선을 빠져나간 프랑스 신부들과 조선인 천주교도들의 안내로 강화도와 한강 어귀를 미리 정찰한 것이었다. 앞서 한 달 전 프랑스 나폴레옹 3세는 신부 아홉 명이 처형당한 사실을 보고받고, 북경 주재 벨로네 공사를 통해 청나라 공친왕(恭親王)에게 ‘대(對)조선 선전포고’를 통보하는 서한을 전달했다. 그러자 청나라는 이를 조선에 알렸고, 조선은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 반역을 꾀한 자들을 사형에 처했을 뿐이라고 해명한 답서를 청나라로 보냈다.
로즈 제독은 그해 9월 군함 일곱 척과 군사 1,000여 명을 이끌고 다시 침범했다. 이들은 팔미도와 부평 경계를 지나 곧장 강화도에 상륙해 산성을 공격하고 섬을 점령했다. 그러자 조선에서는 훈련대장 이경하(李景夏)가 이끄는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해 인근 요충지와 강 연안의 방어와 순찰을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영종 첨사 심영규(沈永奎)가 프랑스 군과 함께 있던 청나라 사람을 통역 삼아 우연히 대화를 나눴는데, 프랑스 군은 “조선이 우리 사람 아홉 명을 살해했기 때문에, 조선 사람 9,000명을 살해하려 한다. 우리가 싸우려는 곳은 한양이다.”라며 적의감을 보였다.
이즈음 한양에서는 프랑스 군의 침입 소식에 수천 명의 백성이 피란길에 오르는 등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이에 대원군은 양이보국책(攘夷保國策)을 내놓으며 항전의 뜻을 분명히 했다. 화친을 허락한다면 나라를 파는 것이며, 교역을 허락한다면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고, 적이 한양에 다다를 때 도성을 버리고 간다면 이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란 내용이었다.
프랑스 군은 9월 18일과 10월 4일에 각각 강화도 건너편 통진의 문수산성과 강화도 마니산 근처 정족산성에서 조선군과 교전을 벌였다. 문수산성에서는 한성근(韓聖根) 부대, 정족산성에서는 양헌수(梁憲洙) 부대가 수적 열세에도 총격전 끝에 프랑스를 물리쳤다. 두 곳의 전투에서 프랑스 군은 70여 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조선군의 거센 저항에 기세가 꺾인 프랑스 군은 마침내 함대를 이끌고 40여 일 만에 조선에서 철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군은 강화도 일대에 대해 약탈과 방화를 저질러 행궁과 사당, 외규장각 등을 불태웠으며, 20만 프랑 상당의 금은보화, 조선 시대 의궤(儀軌) 300여 권 이상과 군기물자 등을 빼앗아 갔다. 또 민가 가운데 절반 이상이 불에 타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병인양요는 이로써 마무리 됐다.
조정에서는 그 직후 서양 물품의 반입과 사용을 엄금하고, 이를 어기는 사람은 현장에서 즉각 처형할 것을 지시하였다. 병인양요를 전후해 조선의 쇄국(鎖國)과 양이(攘夷) 정책이 한층 강화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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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사건들의 기승전결,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와 상호작용을 추적하여 5천 년의 한국사를 복합적으로 이해한다. 고대, 고려, 조선, 근대, 현대로 한국사의 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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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병인양요 –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이근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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