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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194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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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부터 한글학자들은 정체성을 확보하고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국어학 운동, 한글 보급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움직임을 알아챈 일제는 ‘내선일체’를 기치로 민족 말살 정책을 전개하여 조선 내에 일본어를 보급하고 조선어를 금지했다. 그럼에도 이에 굴하지 않자 결국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적이고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사전을 편찬한다는 등의 구실을 들어 대대적으로 탄압하기에 이른다.
배경
1931년 조선어 연구와 발전을 위한 조선어학회를 창설하다.
1938년 일제에 의해 모든 학교의 조선어 과목이 폐지되다.
1943년 조선어학회 회원 33명이 체포되고, 우리말사전 편찬 사업이 중단되다.
설명
일제는 1930년대 중반 이후 더욱 극렬한 식민통치를 펼쳤다. 1936년 12월에는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을 실시해 치안유지법 혐의를 받은 ‘요시찰인’을 감시하고 탄압했으며, 이듬해 2월에는 이의 연장선상으로 사상보호단체라는 명목으로 대화숙(大和塾)을 설치해 사상범을 강제로 가입시키고 관리했다. 이어 1941년에는 독립운동가는 언제든지 잡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을 공포했다.
이 같은 일제의 강압적인 통치의 핵심은 식민지 동화 정책의 궁극적인 목적인 민족 말살 정책이었다. 한국인을 일본인화(化)하고 일본과 한국을 하나로 만들어, 한국인을 징용이나 징병 등 침략 전쟁에 효과적으로 동원하겠다는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내선일체(內鮮一體)’가 이를 집약시킨 통치구호였다. 이를 위해 일제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이 일본어 보급과 조선어 말살이었다.
이 같은 배경에 따라 1936년 8월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 지로(南次郞)는 식민지 조선을 완전한 전시 체제로 만들기 위해 내선일체를 표방하며 일본어 사용 운동을 강압적으로 밀어붙였다. 우선 총독부에 근무하는 한국인 관리에게 조선어 사용을 금지시키고, 나아가 학생이나 지방 관리 등에게도 이를 강요했다. 1938년 봄 신학기부터는 학교에서 조선어 과목을 완전히 폐지했다. 또 철저한 감시를 통해 조선어를 사용하는 관리나 학생을 단속했으며, 적발된 사람은 문초를 하거나 퇴학 처분을 내렸다. 아울러 민족주의적 색채를 지닌 단체를 내선일체의 방침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온갖 구실을 붙여 탄압하고 강제 해산시켰다. 조선어학회 사건을 날조하기 직전인 1940년에는 조선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폐간 조치하고, 이듬해에는 문예지인 〈문장〉과 〈인문 평론〉도 폐간시켰다.
하지만 한글학자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민족 정체성 확보와 민족문화 보존을 위해 국어학운동과 한글 보급운동을 꾸준히 전개해 나갔다. 한글학자들은 이미 1921년 조선어연구회의 결성에서부터 이 같은 움직임을 보였다.
조선어연구회는 주시경(周時經)의 영향을 받은 서울의 사립학교 교원과 교육자를 중심으로 꾸려진 단체로, 한글의 정확한 법리 연구를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휘문의숙 교장인 임경재(任暻宰)를 비롯하여 조선일보 문화부장 장지영(張志暎), 보성학교 교사 이승규(李昇圭), 동래보통학교 교사 최현배(崔鉉培), 동광학교 교사 이병기(李秉岐) 등이 그 회원이었다.
이들은 연구발표회와 강연회 등을 통해 한글 연구와 보급운동, 한국어 학자 양성 등 다양한 활동을 벌였으며, 1926년 11월 4일(음력 9월 29일)에는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고, 이날을 가갸날로 삼았다. 1927년 2월에는 전문 국문연구지의 효시인 〈한글〉 창간호를 냈다. 이로부터 가갸날은 한글날로 바뀌었으며, 이후 양력 환산과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 등으로 현재의 10월 9일을 한글날로 삼게 됐다. 권덕규(權悳奎), 이병기, 최현배 등이 동인이 되어 발간한 잡지 〈한글〉은 1928년 재정난으로 한때 휴간했다가 1932년 조선어학회의 기관지로 계승된다.
특히 1929년 10월에는 조선어연구회의 제안으로 조선어사전 편찬회가 조직됐다. 앞서 1920년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조선어사전》은 낱말은 우리말이지만 주석은 일본어로 된 것으로, 식민지 조선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조선어연구회의 사전 편찬 발의는 이에 대응하는 성격도 갖고 있었다. 조선어학회는 바로 조선어연구회가 1931년 1월 확대 개편된 단체였다.
창립 당시 25명의 회원으로 출발한 조선어학회는 ‘조선어문의 연구와 통일’을 그 목적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 1936년 《조선 표준말 모음》에 이어 1940년에는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제정하는 등 《우리말 큰 사전》의 편찬 작업을 속속 진행시켜 나갔다. 1932년에는 《훈민정음 언해본》, 1938년에는 《계몽야학회 속수독본》을 발간하기도 했다. 사전 편찬을 위한 기초 작업을 준비해 온 조선어학회는 마침내 1942년 원고 조판에 착수하였다. 일제가 함흥 학생 사건을 조작해 사전 편찬 사업을 중단시키고 조선어학회를 탄압, 해체한 것이 바로 이때였다.
1942년,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가던 함흥 영생고등여학교 박영옥(朴英玉)이 기차 안에서 친구와 조선어로 대화를 나누다가 국어(당시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취조를 받았다. 경찰은 함경남도 홍원에 있는 박영옥의 고향 집을 수색하다가 일기장에서 ‘일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처벌을 받았다’라는 구절을 발견하고, 학교 교사들을 상대로 탐문을 벌였다. 경찰이 체포한 사람은 미국에서 유학했던 교사 정태진(丁泰鎭)이었다. 경찰은 정태진을 조사한 결과, 그가 조선어학회 회원으로 조선어사전 편찬 사무를 맡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로써 경찰은 대형 사건을 조작, 날조하였다. 정태진에게 고문을 가해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적 단체이며,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사전을 편찬하고 있다’라는 허위 자백서를 받아낸 것이다. 일본 경찰은 1942년 10월 1일 허위 자백서를 들고 조선어학회를 급습하여 회원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했다.
먼저 일제는 이극로(李克魯)와 최현배 등 11명을 체포해 홍원경찰서로 압송했다. 함께 검거된 사람은 이윤재(李允宰), 이중화(李重華), 김윤경(金允經), 정인승(鄭寅承), 이희승(李熙承), 장지영, 한징(韓澄), 권승욱(權承昱), 이석린(李錫麟)이었다. 이로부터 1943년 4월 1일까지 일제는 여러 차례에 걸쳐 모두 33명을 체포하였다. 아울러 이들이 10여 년 동안 우리말 큰 사전의 제작을 위해 작업하고 완성한 400자 원고지 3만 2,000여 장과 어휘카드 20만 매를 압수했다.
일제는 이들을 구속해 1년 동안 온갖 고문으로 짜맞추기 수사를 한 뒤, 치안유지법의 내란죄 혐의를 적용해 이 가운데 12명을 함흥지방법원으로 넘겼다. 이 과정에서 이윤재와 한징은 고문과 굶주림, 추위 등으로 옥중에서 사망했다. 일제가 내세운 혐의 사실은 조선어학회가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락해 왔고, 강습회, 강연회 등을 통해 민족의식을 앙양시켰으며, 이극로가 독립정부의 대통령, 정인승이 문부대신을 맡는 등 정부 조직을 계획했고, 사전 편찬을 위한 원고에 ‘백두산’, ‘대한제국’, ‘단군’ 등 반(反)국가적인 주석을 달았다는 것 등이었다. 한마디로 조선어학회가 ‘학술 단체를 가장해 국체(國體)의 변혁을 도모한 독립운동 단체’라는 것이었다. 공판에 회부된 인사들에 대한 예심 종결 결정문에서도 일제의 인식과 의도를 엿볼 수 있다. 결정문은 이렇게 되어 있다.
민족운동의 한 형태로서 이른바 어문운동은 (……) 가장 심모원려를 품은 민족 독립운동의 점진적인 형태이다. (……) 겉으로는 문화운동의 가면을 쓰고 조선 독립운동을 목적한 실력 배양 단체로서 본건이 검거되기까지 10여 년이나 오랫동안 조선 민족에 대해 조선의 어문운동을 전개해 온 것이니 (……) 그 기도하는바 조선 독립을 위한 실력 신장에 기여 (……)
1944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9차례의 재판 결과 이극로는 6년, 최현배는 4년, 이희승은 2년 6월의 징역형을 각각 선고받았다. 정인승과 정태진은 각각 징역 2년을 받았다. 또 김법린(金法麟), 이중화, 이우식(李祐植), 김양수(金良洙), 김도연(金度演), 이인(李仁)에게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됐다. 장현식(張鉉植)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징역형이 선고된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등은 고등법원에 항소했으며, 해방을 맞아 모두 풀려났다.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이들은 일제가 압수한 우리말 큰 사전의 원고를 철도청 창고에서 찾아내 손상을 입은 부분을 다시 정리한 뒤 모두 6책으로 된 《한글학회 지은 큰 사전》을 1947년부터 1957년에 걸쳐 발간했다. 수록한 어휘 수는 모두 16만 4,125개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어대사전은 이처럼 일제의 가혹한 민족 말살 정책과 조작, 고문 수사를 이겨내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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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사건들의 기승전결,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와 상호작용을 추적하여 5천 년의 한국사를 복합적으로 이해한다. 고대, 고려, 조선, 근대, 현대로 한국사의 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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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조선어학회 사건 –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이근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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