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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127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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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가 몽골의 고려 복속에 반대해 봉기하는 과정에서 일부 농민들이나 개경 관노들이 호응했고, 삼별초가 완전히 진압된 직후 몽골이 일본 원정길에 나섰다는 점에서 삼별초의 강력하고 자주적인 항쟁이 개경 정부나 몽골에 얼마나 위협이 됐는지를 알 수 있다.
배경
1253년 삼별초가 금주와 전주 등지에서 몽골군을 격파하다.
1258년 원나라가 고려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이듬해 강화도의 내외성을 헐어 버리다.
1264년 원나라가 원종의 친조를 권유하여, 원종이 원으로 향하다.
설명
삼별초(三別抄)는 최우가 정권을 장악했을 당시 개경의 수비와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 야별초에서 비롯됐다. 야별초는 그 숫자가 늘어나자 좌별초와 우별초로 개편됐고, 몽골 항쟁 당시 포로로 잡혀갔다가 도망쳐 나온 사람들로 신의군(神義軍)이 조직되면서 삼별초라는 특수 부대가 제 모습을 갖추게 됐다. 당초 최씨 무신 정권의 사병 역할을 했던 삼별초는 개경 정부가 몽골과 손을 잡자 잠시 동안 해상 왕국에 버금가는 위력을 떨치며 마지막까지 대몽 항쟁을 이끌었다.
고려 원종(元宗) 11년인 1270년 6월 삼별초가 전시(戰時) 수도인 강화도를 떠나는 장면을 《고려사절요》는 이렇게 묘사하였다.
배를 모아 공사(公私)의 재물과 자녀를 모두 싣고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구포(仇浦)로부터 항파강(缸破江)까지 뱃머리와 꼬리가 서로 맞닿아 무려 1,000여 척이나 되었다.
구포는 강화도 외포항, 항파강은 강화도와 석모도 사이의 좁은 해협이다. 원종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한, 바로 그다음 달이었다. 원종의 환도에 삼별초는 개경으로 가는 대신 전남 진도(珍島)로 향했다. 강화도를 떠나기 직전 삼별초를 이끄는 장군 배중손(裴仲孫)은 야별초를 지휘하던 노영희(盧永僖)와 함께 난을 일으키고 강화도 도성에서 “오랑캐 군사가 인민을 살육하니 무릇 나라를 돕고자 하는 자는 모두 격구장으로 모여라.”라고 외쳤다. 이들은 또 왕족인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관부를 설치해 대장군 유존혁(劉存奕), 상서좌승 이신손(李信孫)을 좌우 승선으로 삼았다. 강화도를 떠난 지 두 달 만에 진도에 도착한 삼별초는 그곳에서 반몽 정권을 세우고 항쟁을 선언한다. 이로부터 3년 동안 삼별초는 진도와 서남해안, 제주도를 근거지로 삼아 개경 정부와 몽골(원나라)을 상대로 강력하게 저항했다.
삼별초가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진도를 대몽 항쟁의 근거지로 선택한 것은 개경 환도를 전후해 강화도에서 이탈하는 무리들이 잇따른 데다, 삼별초에 대한 고려와 몽골의 군사적 위협이 갈수록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몽골군이 해전에 약하다는 점도 감안했다. 실제로 장군 현문혁(玄文奕)은 가족과 함께 개경으로 달아나다 붙잡혔는데, 처자식은 스스로 물에 빠져 목숨을 끊었고 현문혁은 얼마 뒤 혼자서 개경으로 도망했다. 직학(直學) 정문감(鄭文鑑)은 배중손으로부터 승선 직책을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고 부인과 함께 물에 빠져 죽었다.
참지정사 채정(蔡楨)과 추밀원부사 김연(金鍊), 도병마녹사 강지소(康之邵)는 배중손이 난을 일으키자 바로 육지로 달아났고, 강화도를 경비하던 많은 군졸들도 뒤를 따랐다. 또 개경 정부는 상장군 정자여(鄭子璵)를 강화도로 보내 삼별초를 회유하는가 하면, 장군 김지저(金之氐)를 시켜 삼별초의 명부를 입수하기도 했다. 개경 정부가 삼별초의 핵심 인물들을 숙청하고, 병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였다.
삼별초가 대몽 항쟁을 선언하며 강화도를 떠나자 원종은 어사대부(御史大夫) 김방경(金方慶)을 토벌군 책임자인 추토사(追討使)로 삼아 몽골군과 연합해 삼별초를 추격하게 했다. 이에 김방경과 몽골군의 송만호(宋萬戶)가 이끄는 토벌군 1,000여 명은 서남해 영흥도에서 처음 삼별초와 마주쳤다. 하지만 송만호가 삼별초의 기세에 겁을 먹고 김방경의 공격을 막는 바람에 삼별초는 큰 저항 없이 진도에 도착한다.
삼별초는 진도에 용장산성(龍藏山城)과 행궁을 축조해 여원 연합군과의 장기전에 대비하는 한편, 서남해 연안과 도서 지역을 장악해 재물과 곡식을 거두고 현지 주민을 진도로 옮겨 살게 하는 등 갈수록 세력을 넓혀 나갔다. 이에 북으로는 전주, 동으로는 합포(合浦, 마산), 김해, 동래까지 삼별초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과거 몽골군의 잔혹한 행위에 고통을 겪었던 백성들이나 주변 고을들이 스스로 삼별초에 호응하거나 항복하는 일도 많았다. 당시 전라도 토적사(討賊使)인 참지정사 신사전(申思佺)은 삼별초의 위세에 놀라 나주에서 개경으로 달아나 파면되기도 했다. 또한 진도는 지방의 조세를 수도로 운송하는 조운로(漕運路)의 길목에 위치하여 삼별초가 조운선과 상공미(上供米, 궁중에 바치는 쌀)를 탈취하는 일이 잇따랐다.
이런 가운데 삼별초를 토벌하려는 고려 관군과 몽골의 연합군도 번번이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물러나야 했다. 1270년 9월에는 김방경과 몽골 원수 아해(阿海)가 나주의 금성산(錦城山)을 포위한 삼별초를 물러나게 했지만, 더 이상 삼별초를 압박하지는 못했다. 급기야 삼별초는 같은 해 11월 제주도를 지키던 관군을 전멸시키고, 이 지역까지 장악하였다. 한 달 뒤 김방경과 아해가 이끄는 토벌군이 진도를 공격했지만, 삼별초의 반격으로 아해는 싸우기를 포기했고, 김방경은 관군을 독려하며 삼별초와 싸우다 가까스로 포위를 뚫고 빠져나왔다.
다급해진 고려와 몽골은 1271년 5월 군사와 전함을 대폭 늘려 진도에 대한 총공세를 감행한다. 여기에는 고려를 완전히 제압하고 일본 정벌에 나서려는 몽골의 야심도 깔려 있었다. 몽골은 아해를 파면하고 대신 흔도(忻都)를 새 원수로 임명했다. 몽골군이 해전에 익숙하지 않아 패퇴를 거듭했다는 점을 고려해 몽골에 귀화한 고려인 무장 홍다구(洪茶丘)도 지휘관으로 투입했다.
여원 연합군이 벽파정과 장항, 동면 세 곳으로 나누어 일제히 협공하자, 삼별초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진도에서 물러났다. 이 과정에서 삼별초를 이끌던 배중손이 전사하고, 승화후 왕온과 그 아들 왕환(王桓)도 홍다구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고려사절요》는 여원 연합군이 삼별초와의 싸움에서 여러 차례 패배했고, 이 때문에 삼별초가 연합군을 업신여겨 방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기록하였다. 이 전투에서 연합군은 진도에 있던 1만여 명을 붙잡고 전함 수십 척과 양곡 수천 석, 각종 재물을 빼앗아 개경으로 보냈다.
진도가 함락되자 배중손 대신 김통정(金通精)이 삼별초를 이끌고 별장 이문경(李文京)이 점령하고 있던 제주도로 다시 근거지를 옮겼다. 이들은 현재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 일대에 항파두성(缸坡頭城, 항파두리)을 쌓고 관아와 군사 시설을 갖추는 등 대몽 항쟁의 전열을 재정비했다. 당시 남해현을 점거하고 있던 유존혁도 전함 80여 척을 이끌고 제주도로 합세했다.
이렇게 세력을 추스른 삼별초는 다시 반격에 나섰다. 1272년부터 회령(會寧, 전북 김제), 탐진(耽津, 전남 강진), 결성(結城, 충남 홍성),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 경기 부천), 합포, 거제 등을 잇달아 공략해 전함을 불태우거나 몽골군과 몽골에 협조하는 관원 등을 잡아 가는 등 연합군에게 타격을 입혔다. 삼별초가 다시 맹위를 떨치자 홍다구는 김통정의 조카인 낭장 김찬(金贊) 등을 제주도로 보내 삼별초를 회유하려 했으나, 김통정은 이를 듣지 않았다. 이에 원종 14년인 1273년 4월 김방경과 흔도, 홍다구가 연합군 1만여 명과 전함 160여 척으로 제주도를 공격하였다.
삼별초는 함덕포와 비양도를 통해 상륙한 대규모 연합군에게 계속 밀리다가 결국 항파두리성의 내성까지 몰렸다. 고려 관군이 불화살을 쏘며 이들을 뒤쫓자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뒤덮었고, 삼별초는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김통정을 비롯해 지도부 70여 명은 인근 산 속으로 들어갔으나, 김통정은 목매 자살한 채 발견됐고, 나머지 지도부들은 체포돼 모두 처형됐다. 제주도 전투에서 여원 연합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삼별초는 1,3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로써 삼별초의 대몽 항쟁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고려는 이후 오랜 기간에 걸쳐 몽골의 간섭과 지배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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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사건들의 기승전결,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와 상호작용을 추적하여 5천 년의 한국사를 복합적으로 이해한다. 고대, 고려, 조선, 근대, 현대로 한국사의 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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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삼별초 봉기 –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이근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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