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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사건

국채보상운동

외채를 상환하자는 국민의 자발적인 모금운동

요약 테이블
시대 1907년

일본은 강제로 체결한 한일협정서를 바탕으로 대한제국에 강제적으로 차관을 들인다. 또한 대한제국은 일본이 추천하는 재정, 외교 고문을 맞아야 했다. 이에 따라 일본 고문들은 대한제국의 재정, 금융, 화폐 제도 등을 재편하여 식민 지배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1906년, 1,300만 원이던 대일 국채가 1년 만에 1,840만 원으로 늘어나자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었다.

배경

1905년 일본이 대일 차관을 들여 조선의 경제권을 장악하기 시작하다.
1906년 대일 국채가 1,300만 원까지 불어나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각종 자발적인 모임이 생겨나다.

설명

국채 1,300만 원은 우리 한국의 존망에 직결된 것이다. 2,000만 민중이 3개월 기한으로 담배 피우는 것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한 사람마다 매달 20전씩 거두면 1,300만 원이 될 수 있다. 설령 다 차지 못 하는 일이 있더라도 1원부터 10원, 100원, 1,000원을 출연하는 자가 있어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고종 44년인 1907년 2월 21일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국채보상(國債報償)취지서 내용이다. 대구 광문사(廣文社) 사장 김광제(金光濟)와 부사장 서상돈(徐相敦) 등의 명의로 된 것이었다. 대구에서 비롯된 국채보상운동은 이를 계기로 전국으로 급속히 확산돼 각계각층의 국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가운데 1년 정도 지속됐다. 일본이 한국을 경제적으로 예속시키기 위해 강압적으로 떠안긴 차관 1,300만 원을 온 국민의 힘을 모아 청산함으로써 경제 자립을 실현하고 나아가 국권을 회복하자는 운동이었다.

1906년을 기준으로 대한제국 정부의 예산 세입액은 1,318만 9,336원, 세출액은 1,395만 523원으로, 세출액이 세입액보다 77만 원 많은 적자 상태였다. 한 해 예산과 맞먹는 거액의 국채를 대한제국 정부가 상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때문에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일본의 야욕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국민 모두가 나서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국채보상운동이 처음 제안된 것은 그해 1월 29일 광문사 문회(文會) 특별회였다. 출판사를 운영하며 애국계몽운동을 벌이던 광문사가 광문사문회라는 명칭을 대동(大東)광문회로 바꾸는 문제를 논의하는 회의였다. 이 자리에서 서상돈은 모든 국민이 금연으로 돈을 모아 국채를 보상하자고 제의했고, 참석자들이 이에 찬성하면서 즉석에서 2,000여 원이 모금됐다. 이어 2월 21일, 대구 북후정(北堠亭)에서 대동광문회 주최로 국채보상을 위한 대구군민대회가 열려 국채보상취지서가 발표됐고, 대회에 참석한 군민들은 한 푼 두 푼씩 성금을 내 모두 100여 원을 모았다. 이렇게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전 국민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으며 전국 각 지역으로 번져 나갔다.

문제가 된 대일(對日) 차관은 1905년 6월부터 1906년 3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발생한 것이다. 우선 일본은 1905년 6월 한국의 문란한 화폐를 정리한다며 그 비용으로 한국에 300만 원의 화폐정리자금채(貨幣整理資金債)를 관세 수입을 담보로 억지로 떠넘겼다. 또 같은 달에 구채(舊債) 상환과 세계(歲計) 부족 보충비 구실로 일본에서 공채로 모집한 200만 원을 국고금 수입을 담보로 한국에 들여왔다. 같은 해 12월에는 천일은행과 한성은행의 보조 대부와 금융조합 창립자금으로 150만 원을 차입했다. 1906년 3월에는 통감부 개설로 소요되는 시정(施政) 개선비와 기업자금 명목으로 일본흥업은행에서 1,000만 원이 차입됐다. 이렇게 해서 총 1,650만 원 가운데 실제로 도입된 차관 1,150만 원과 이에 따른 이자를 합친 것이 1,300만 원이었다.

당시 대일 차관의 이자는 연 6~7퍼센트나 됐다. 하지만 이 차관들은 대한제국 정부의 필요나 요청에 의해 도입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대한제국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억지로 떠넘긴 것이었다. 시정 개선비에는 일본인이 거주하는 지역의 시설비와 일본인 관리의 고용 비용 등이 포함돼 있었다. 대일 차관이 통감부의 자의적 사용으로 상당 부분 소비된 것이다. 때문에 이름만 차관일 뿐, 실제 사용은 일본인이 한다는 비난도 나왔다. 화폐 정리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토착 자본의 붕괴를 초래한 조치였다.

이처럼 일본이 차관을 명목으로 대한제국의 침탈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1904년 8월 강제 체결된 한일협정서(제1차 한일협약)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조약에는 일본이 추천하는 재정, 외교 고문을 대한제국이 맞아들이도록 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대장성 주세국장 출신인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가 재정 고문으로 임명되어 대한제국의 재정, 금융, 화폐 제도를 재편하는 등 식민 지배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해 갔다. 이 과정에서 화폐와 황실의 재정을 정리하고, 농업 개발을 명분으로 토지를 약탈했으며, 재정 기구를 장악하고, 고리대로 우리 국민들의 자금을 수탈했다. 메가타가 부임한 이후 대한제국의 대일 차관이 급증한 것도 이 같은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일본의 경제 침탈은 1906년 3월부터 통감 정치가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더욱 노골적으로 진행됐다. 1906년 말 1,300만 원이던 대일 국채는 1907년 6월 말 현재 1,840만 원으로 늘어났다. 담배와 술을 끊고 부녀자들이 패물을 팔아가면서 국채보상운동을 벌인 것은 이처럼 일본의 식민 지배 야욕에 맞서 주권을 수호하려는 민족운동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

1908년 세워진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제가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독점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만든 기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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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이 확산되면서 전국적으로 자발적인 모임들이 속속 생겨났다. 국채보상을 위한 기성회(期成會), 단연회(斷煙會), 찬성회(贊成會), 의무소(義務所), 동맹(同盟), 부인회, 패물폐지(佩物廢止) 부인회, 부인회모집소, 애국부인회, 탈환회(脫環會), 의성회(義成會), 감선의연회(減膳義捐會) 등 명칭도 다양했다. 대구에서 국채보상회가 조직된 데 이어 서울에서는 김성희(金成喜), 유문상(劉文相), 오영근(吳榮根) 등에 의해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가 결성됐고, 서도(西道, 평안도) 출신자들은 국채보상서도의성회(西道義成會)를 만들었다.

이로써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7~8월에 절정을 이룬다. 보상운동에는 노동자와 농민, 부녀자, 군인, 인력거꾼, 기생, 백정, 영세 상인, 학생, 승려 등 모든 계층이 참여했으며, 특히 가난한 하층민이 주축을 이뤘다. 담배를 끊어 저축을 하고, 금은 비녀와 가락지 및 노리개를 내놓고, 심지어 머리털을 잘라 팔기도 했다. 탈환회는 반지를 빼고, 감선회는 반찬을 줄였다. 일본에서 유학하는 학생 800여 명은 담배 값을 모아 보내 왔다. 급기야 고종도 “국채보상의 일로 인민이 담배를 끊고 대금을 모집한다는데, 짐도 불가흡연(不可吸煙)”이라며 담배를 끊자, 여러 대신들도 이를 따랐다.

이처럼 대구에서의 국채보상운동이 짧은 기간에 범국민운동으로 전개된 데는 신문사들의 힘이 컸다.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 등은 국채보상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의연금을 받아 그 명단과 금액을 게재했으며, 각종 미담을 소개하기도 했다. 국채보상운동이 전 국민적인 운동으로 전개되자, 모은 돈을 관리할 통합기구도 생겼다. 1907년 4월 8일에는 참정대신으로서 을사늑약에 반대했던 한규설(韓圭卨)을 소장으로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가 대한매일신보사 내에 마련됐고, 비슷한 시기에 이준(李儁)을 의장으로 한 국채보상연합회의소가 생겨났다. 두 단체는 분열이 생길 수 있다는 여론에 따라 협의를 통해 연합회의소는 보상운동을 지도하고, 총합소는 의연금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기로 했다.

하지만 국채보상운동은 결과적으로 좌절되었다. 일본은 보상운동을 ‘국권 회복을 꾀하는 배일(排日)운동’으로 인식하고, 이를 방해하기 위해 총합소 회계를 맡은 대한매일신보사 총무 양기탁(梁起鐸)을 1908년 7월 국채보상금 횡령 혐의로 구속하였다. 또한 이 신문사 발행인인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E. T. Betheel)의 국외 추방 공작을 전개했다. 양기탁은 다섯 차례의 재판 결과 무죄를 선고받고 석방됐지만, 일본의 방해 공작은 계속됐고, 이로 인해 보상운동은 상당 부분 위축됐다. 이에 따라 국채보상운동 지도부는 모금보다는 모금액의 관리와 감독에 치중하였고, 1909년 11월에는 의연금 처리를 위해 유길준(兪吉濬)을 회장으로 국채보상금처리회를 조직했다.

1907년 3월 이후 1908년 7월까지 보상운동으로 모은 돈은 20만 원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처리회는 은행이나 학교 설립, 식산 진흥 등 다양한 방안을 논의한 끝에 1910년 9월 모금액을 교육 사업에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 직후 모금액 전부를 경무총감부에 빼앗기면서 이 같은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1907년 온 국토를 휩쓸었던 국채보상운동은 지도부가 구체적인 전망과 통일된 조직력을 갖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보이기도 했지만, 자발적인 대중운동으로 애국심과 항일 정신을 고취시켰다는 점에서 이후 민족운동의 동력을 비약적으로 높이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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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집필자 소개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정치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국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박찬구 집필자 소개

부산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991년 서울신문사에 입사하여 사회부, 정치부, 미래전략팀을 거쳤으며 현재 국제부에서 근무 중이다.

출처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 저자이근호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역사적인 사건들의 기승전결,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와 상호작용을 추적하여 5천 년의 한국사를 복합적으로 이해한다. 고대, 고려, 조선, 근대, 현대로 한국사의 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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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국채보상운동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이근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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