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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139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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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천도를 시작으로 태조는 유교적 통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해 나갔다. 한양 건설을 기획하고 설계한 총 책임자 정도전은 궁궐과 도성 자리를 정하고, 궁궐의 전당과 도성의 성문, 한성부의 5부 52방의 이름을 지었다. 정도전은 도성을 드나드는 성문의 명칭 하나하나에도 유교의 윤리와 오행 사상을 담았다.
배경
1380년 이성계가 황산대첩을 승리로 이끌다.
1388년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서 이성계가 군사를 회군하다.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태조로 즉위하다.
설명
조선 태조 이성계는 개국 2년여 만인 1394년 10월 28일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긴다. 한양의 주변 형세와 육로, 수로 등 교통의 이점, 지리적인 조건을 감안한 선택이었다.
천도 작업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사람은 태조(太祖, 재위 1392~1398) 본인이었다. 그는 1393년 2월, 새로운 수도의 후보지로 거론되던 공주 계룡산을 직접 살펴보기 위해 떠나던 길에 남은(南誾) 등에게 말했다.
“예로부터 왕조가 바뀌고 천명을 받은 군주는 반드시 도읍을 옮기기 마련이며, 나의 후사가 될 적자가 도읍을 옮기려 해도 대신이 옳지 않다고 막는다면 어찌 도읍을 옮길 수 있겠느냐.”
그때 태조는 계룡산에 닷새 동안 체류하면서 도읍지로서 적합한지 면밀히 살폈다. 앞서 같은 해 1월 지리와 복서(卜筮, 점)에 통달한 정당문학(政堂文學) 권중화(權仲和)가 왕실의 태(胎)를 봉안할 곳을 찾으러 다니다 돌아와서 계룡산을 추천한 데 따른 것이다. 태조가 다녀간 뒤 계룡산에서는 궁궐터를 다지는 등 천도 준비가 진행됐지만, 공사는 2개월 만에 중단됐다. 정도전(鄭道傳)과 하륜(河崙) 등이 계룡산은 나라의 남쪽에 치우쳐 있고, 강이 멀고, 동북쪽과 막혀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도읍지로 적절치 않다고 건의했기 때문이다. 태조의 왕사(王師)인 무학대사(無學大師)도 “옛 신라의 도선(道詵) 선사는 이씨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다고 했다.”라고 말했다.
태조는 정도전과 무학대사, 하륜 등에게 새로운 도읍지를 알아보라고 명한다. 이에 하륜은 현재 서울 연희동과 신촌 일대인 무악(毋岳)을 추천했다. 하지만 대다수 신하들이 터가 좁아 적합하지 않다고 반대했다. 그러자 태조는 직접 한양으로 행차해 지세를 살펴본 뒤 무학대사의 의견을 물었다. 무학대사는 “사면은 높고 수려하며 중앙은 편편하고 넓어 적절하다.”라고 말했고, 태조는 1394년 8월 13일 대신들의 동의를 얻어 한양을 수도로 정했다. 개경으로 돌아온 태조는 최고의결기구인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하여금 천도를 정식 건의하도록 했으며, 도평의사사는 같은 해 8월 말 ‘안팎 산수 형세가 훌륭하고, 사방으로 통하는 도로와 거리가 고르며 배와 수레도 지날 수 있으니 한양에 영구히 도읍을 정하는 것이 하늘과 백성의 뜻에 맞다’라고 글을 올렸다.
한양이 수도로 정해졌지만, 궁궐을 어디에 지어야 할지를 놓고는 다시 정도전과 무학대사 사이에 의견이 갈렸다. 무학대사는 인왕산 근처를 추천하며, “인왕산 아래 동향(東向)으로 궁궐을 지으면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피할 수 있고 대대로 안온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도전은 “안온하기는 하지만, 음침하여 나라가 발전하기 어렵다.”라며 백악(白岳) 근처를 추천하고 “삼각산 아래 남향으로 궁궐을 지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태조는 정도전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1394년 9월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해 종묘와 사직, 궁궐, 관청 등의 위치를 정하게 했다.
이어 10월 25일부터 천도를 시작해 10월 28일 비로소 태조가 한양으로 옮긴다. 본격적인 한양 건설은 천도 이후로 이뤄졌다. 그리하여 태조는 궁궐이 완성될 때까지 옛 한양부 객사(客舍)에서 임시로 머물렀다.
정도전이 총괄한 한양 건설의 핵심인 궁궐 공사는 1395년 9월 마무리된다. 궁궐은 백악산 아래에 남향으로 지었다. 정도전은 궁궐의 이름을 《시경》에 나오는 ‘기취이주(旣醉以酒) 기포이덕(旣飽以德), 군자만년(君子萬年) 개이경복(介爾景福)’을 따서 경복궁이라고 지었다.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가 불러서, 군자가 만년토록 큰 복을 누린다’라는 뜻이다. 또한 정도전은 무학대사의 의견을 반영해 궁궐의 화기를 막기 위해 정문에 돌로 만든 해태상을 세우고, 그 앞에 연못을 파서 동으로 만든 용을 넣어 두었다. 경복궁의 좌우에는 왕실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종묘(宗廟), 땅과 곡식의 신을 모시는 사직(社稷)을 각각 지었다. 그리하여 같은 해 10월, 태조가 경복궁에 들어갔다.
도성은 한양의 지세를 이용해 둥글게 만들었으며, 그 길이가 17킬로미터에 이르렀다. 풍수학에 따라 백악을 주산으로 삼고, 좌청룡으로 낙산(駱山), 우백호로 인왕산(仁王山), 안산(案山)으로 남산(南山)을 연결했다. 당시 전국의 군인이 동원되어 각 구역별로 공사를 맡았다.
이어 1396년에는 도성에 사대문과 네 개의 소문을 만들었다. 네 개의 대문으로 동에는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에 돈의문(敦義門), 남에 숭례문(崇禮門), 북에 소지문(昭智門)을 두었다. 소지문은 숙정문(肅靖門)이라고도 한다. 중앙인 종로에는 보신각(普信閣)을 두었다. 인, 의, 예, 지, 신의 오덕(五德)을 표현한 것이다. 또 4개의 소문을 짓고 동소문을 혜화문(惠化門), 서소문을 소의문(昭義門), 남소문을 광희문(光熙門), 북소문을 창의문(彰義門)이라고 했다.
한양부(漢陽府)의 이름도 한성부(漢城府)로 바꿨다. 한성 5부 중 동부 청사는 현재의 종로구 인의동, 서부 청사는 중구 무교동, 남부 청사는 중구 을지로 1가, 북부 청사는 종로구 사간동, 중부 청사는 종로구 종로3가에 각각 두었다. 동부에는 12방이 있어, 각각 연희, 숭교, 천달, 창선, 건덕, 덕성, 서운, 연화, 숭신, 인창, 관덕, 흥성이라 했다. 서부는 11방으로, 영견, 인달, 적선, 여경, 인지, 황화, 취현, 양생, 신화, 반석, 반송이 있었다.
남부도 11방으로, 광통, 호현, 명례, 태평, 훈도, 성명, 낙선, 정심, 명철, 성신, 예성을 두었다. 북부는 10방으로 나누고, 광화, 양덕, 가회, 안국, 관광, 진정, 순화, 명통, 준수, 의통이라 불렀다. 중부는 8방으로, 정선, 경행, 관인, 수진, 징청, 장통, 서린, 견평으로 이뤄졌다. 도성 안 5부 52방에는 모두 10만 명 규모의 백성이 살았고, 관청과 시장, 학교 등이 들어섰다. 다만 승려와 무당은 도성 안에서 살지 못하게 했다.
한양 지역은 서해안과 연결되는 한강을 끼고 있어 육로와 수로를 골고루 갖췄고, 주변에 높은 산이 있어 천혜의 요새지로 여겨졌다. 위치상으로도 한반도의 중간 지역에 속한다. 때문에 조선 시대 훨씬 이전부터 명당으로 주목받았다. 삼국은 한양을 중심으로 한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쟁투를 벌였고, 각국이 최고의 전성기를 누릴 때는 그 영역에 어김없이 이 지역이 포함됐다.
풍수가들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 세계의 중심국가가 된다.”라고 했다. 고려 시대에는 문종(文宗)이 이곳을 남경으로 삼긴 했지만, ‘한양의 주인공은 목자씨(木子氏=李氏)가 된다’라고 하여 선뜻 수도로 삼지 못했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 2년(1390)에는 서운관(書雲觀)에서 《도선밀기(道詵密記)》를 인용해 송도의 기운이 다했으니, 수도를 한양으로 옮길 것을 건의했다. 공양왕이 이를 마음에 두고 대신들의 의견을 구했으나 한결같이 “참위설(讖緯說)을 믿고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반대했다. 그러자 공양왕이 “비록(秘錄)에 ‘도읍을 옮기지 않으면 군신을 폐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음양의 설이 어찌 거짓이겠느냐.” 하며 이들을 꾸짖었다.
태조가 한양 천도를 이루긴 했지만, 조선은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종(定宗) 때인 1399년 3월에 개경으로 환도했다가, 제2차 왕자의 난 이후 태종(太宗) 때인 1405년 10월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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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사건들의 기승전결,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와 상호작용을 추적하여 5천 년의 한국사를 복합적으로 이해한다. 고대, 고려, 조선, 근대, 현대로 한국사의 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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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한양 천도 –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이근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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