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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사를 움
직인 100
대 사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이용하다

아관파천

俄館播遷
요약 테이블
시대 1896년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며, 더불어 일본의 권력이 점차 강해지자 이에 대한 불만과 불안이 심해졌다. 이에 고종과 왕세자는 1896년 2월 11일부터 이듬해 2월까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것이 아관파천이다. 이 기간 동안 조선은 러시아로부터 여러모로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새단장된 옛 러시아공사관

옛 러시아공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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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894년 갑오개혁에 의해 과거 제도 폐지, 재정 일원화 등이 시행되다.
1895년 을미사변과 고종의 단발령에 분격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을미의병운동이 일어나다.
1896년 고종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에 거처하다.

설명

12월 27일에 임금이 경복궁을 나갔다. 이범진과 이윤용 등이 임금을 아라사 공사관으로 옮기고 김홍집과 정병하를 잡아 죽였지만, 유길준, 장박, 조희연 등은 달아났다.

황현이 《매천야록》에 기록한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은 이렇게 시작된다. 12월 27일은 양력으로 1896년 2월 11일이다. 고종은 이로부터 이듬해 2월 20일까지 1년 남짓 정동의 아라사(俄羅斯,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렀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것은 을미사변으로 명성왕후가 시해되고,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단발령(斷髮令)이 내려 전국적으로 반발이 확산되던 시기였다. 이처럼 국가적으로 비상한 시기에 고종은 왜 궁궐을 비우고 외국 공사관으로 이어(移御)했을까.

무엇보다 명성왕후 시해 이후 자신과 왕실의 안위에 대한 불안감, 일본의 무자비한 횡포와 독주에 대한 불만과 견제 심리가 컸기 때문이다. 당시 고종은 러시아와 미국 공사관에서 요리한 음식이나 외국인 선교사가 갖다 주는 캔으로 된 음식만 먹고 밤마다 잠을 설칠 정도로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고종은 일본이 친일 개화파 내각을 앞세워 추진한 갑오개혁에 강한 불신감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고종은 아관파천 이틀 뒤인 13일 백성들의 각종 조세를 탕감하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갑오개혁) 이후로 나라가 문명(文明)하고 진보한다는 명색만 있고 그 실질은 오히려 없으므로 모든 백성들이 의심을 품는 일이 없지 않다.”라고 했으며, 그해 9월 24일에는 내각을 의정부로 환원시키면서 “지난번에 역적 무리들이 나라의 권한을 농간질하고 조정의 정사를 뜯어고치면서 심지어는 의정부를 내각이라고 고쳐 부른 것은 거의 다 명령을 위조한 것”이라고 분명히 했다.

경복궁에 유폐된 것이나 다름없던 고종을 구출하려는 시도는 아관파천 이전에 한 차례 더 있었다. 1895년 11월 27일 밤, 친위대를 동원해 고종을 정동의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 했던 춘생문(春生門) 사건이 그것이다. 주모자는 이범진(李範晉), 이재순(李載純), 이윤용(李允用), 이완용(李完用), 이하영(李夏榮), 윤치호(尹致昊) 등으로 정동파 소속 인사들이었다. 정동파는 서양 외교관의 친목단체인 정동구락부에 출입하던 정치인들을 말한다. 이들은 미국인 호러스 언더우드(H. G. Underwood), 윌리엄 다이(W. M. Dye), 호머 헐버트(H. B. Hulbert) 등의 도움을 받아 고종을 경복궁 춘생문을 통해 미국 공사관으로 옮기게 했다.

그리고 김홍집 내각의 대신들을 제거하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 친위 쿠데타 사건은 서리군부대신 어윤중(魚允中)과 모의에 가담했던 안경수가 내각과 외부대신 김윤식(金允植)에게 누설하면서 사전에 발각돼 실패하고 만다. 이로 인해 행동대원인 시종 임최수(林冣洙), 육군 참령 이도철(李道徹)이 교수형에 처해지고, 나머지는 종신유형(終身流刑)이나 징역형을 받았다.

고립무원 지경이었던 고종은 춘생문 사건으로 더욱 궁지에 몰렸다. 춘생문 사건 가담자들에 대한 판결이 선고되던 날, 공교롭게도 단발령이 내려져 백성들의 반일 감정은 거세졌고 의병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됐다. 관군이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서울 지역의 경비는 평상시보다 허술해졌다.

이를 틈타 이번에는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려는 계획이 세워진다. 춘생문 사건에 가담했던 이범진, 심상훈(沈相薰), 이윤용, 이완용 등이 주도했으며, 궁관(宮官)들이 적극적으로 도왔다. 또 러시아 어 통역관 김홍륙(金鴻陸)과 시위 1대대장 이학균(李學均), 궁내관 최영하(崔榮夏), 시종 홍종우(洪鍾宇) 등이 가세했다. 이범진과 이윤용은 대표적인 친러파 인사로 ‘아당(俄黨)’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심상훈은 고종의 이종사촌이며, 이범진과 심상훈은 각각 춘천과 여주의 의병 세력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홍종우는 1894년 3월 상해에서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을 권총으로 암살해 고종의 신임을 얻었다.

특히 명성왕후 시해 뒤 고종이 가까이 지내던 궁녀 엄 상궁(嚴尙宮)의 역할이 컸다. 엄 상궁은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李垠)의 생모다. 당시 엄 상궁은 대원군과 친일파가 고종을 폐위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며 왕실의 안전을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길 것을 끈질기게 설득해 고종의 동의를 얻어냈다.

이들은 쿠데타를 일으키는 대신 궁녀의 가마를 타고 몰래 경복궁을 빠져나가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경복궁의 수문군(守門軍)이 궁녀의 가마는 관례적으로 검문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6시쯤 고종과 세자는 가마 두 개에 나눠 타고 건춘문(建春門)을 통과해 무사히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했다. 앞서 이범진 등이 고종의 파천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자 러시아 공사관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카를 베베르 공사가 김홍륙을 통해 친러파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아관파천 하루 전인 10일, 베베르 공사는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인천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군함에서 수병 100여 명을 포 1문과 함께 서울로 불러들여 공사관 주변을 경비하게 했다. 고종의 아관파천 배경에 대해 《매천야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임금은 처음부터 헌정(憲政, 갑오개혁)에 묶인 것을 싫어하여 이범진, 이윤용 등과 더불어 아라사의 힘을 빌려 김홍집 등을 제거하려 했다. 아라사 인들도 우리나라에 기반을 닦으려고 엿보다가 왜국(倭國)에 선수를 빼앗기자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바로 그날, 조칙을 내리고 을미사변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고종은 조칙에서 ‘8월의 변고는 만고(萬古)에 없었던 것이니,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역적들이 명령을 잡아 쥐고 제멋대로 위조하였으며, 왕후가 붕어한 조칙을 석 달 동안 반포하지 못하게 막았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 을미년 8월 22일 조칙과 10월 10일 조칙은 모두 역적 무리들이 속여 위조한 것이니 다 취소하라’라고 했다. 을미년 조칙은 명성왕후를 폐위하고 서인으로 강등시켰다가 이를 다시 회복시키는 내용으로, 폐위와 강등 자체가 잘못됐으니 모두 무효라는 것이다.

고종은 이어 조칙에서 ‘역적’으로 규정한 김홍집 내각을 즉각 해체하고 친일 관료들에 대해 대대적인 체포령을 내렸다. 총리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대신 정병하(鄭秉夏)는 광화문 경무청 문 앞에서 성난 군중들에게 맞아 죽었고, 군부대신 조희연(趙羲淵), 내부대신 유길준(兪吉濬), 법부대신 장박(張博), 훈련대 대대장 우범선(禹範善), 이두황(李斗璜) 등은 일본으로 도피했다. 우범선은 일본으로 귀화해 그곳에서 결혼했으며, 그 아들이 씨 없는 수박을 만든 우장춘(禹長春) 박사다. 탁지부대신 어윤중(魚允中)은 고향인 보은으로 가다가 용인에서 주민들에게 맞아 죽었다. 외부대신 김윤식(金允植)은 제주도로 유배됐다.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고 이범진, 이완용, 윤치호 등을 중심으로 새 내각이 구성되면서, 친일파는 힘을 잃고 친러파가 득세하였다. 고종이 1년 남짓 러시아 공사관에서 생활하며 집무를 보는 동안, 내각과 대신들도 이곳에서 모든 사무를 처리했다. 특히 러시아는 아관파천을 계기로 조선으로부터 각종 이권을 챙겼고, 이에 미국이나 프랑스, 독일 등도 균등한 이권의 배분을 요구하면서 열강에 의한 이권 침탈이 심해졌다. 러시아는 함경도 경원, 경성 일대 광산 채굴권과 압록강, 울릉도의 삼림 벌채권을 얻었으며, 미국은 경인철도 부설권과 한성전차 부설권, 평안도 운산 금광의 채굴권을 챙겼다. 프랑스는 경의철도 부설권, 독일은 강원도 당현 금광 채굴권을 얻었다. 영국은 은산 금광 채굴권을, 일본은 경부철도 부설권과 직산 금광 채굴권을 차지했다.

고종의 파천 기간이 길어지자, 백성들 사이에는 국가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조속히 환궁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전국 유생들은 상소를 올렸으며, 시전 상인들 사이에서는 환궁이 이뤄지지 않으면 폐점하겠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이 같은 여론의 압박 속에서 고종은 2월 20일 경운궁(慶運宮, 덕수궁)으로 환어(還御)한다. 경복궁보다는 경운궁이 러시아, 미국 공사관과 가까이 있어 일본을 견제하기에 유리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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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집필자 소개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정치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국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박찬구 집필자 소개

부산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991년 서울신문사에 입사하여 사회부, 정치부, 미래전략팀을 거쳤으며 현재 국제부에서 근무 중이다.

출처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 저자이근호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역사적인 사건들의 기승전결,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와 상호작용을 추적하여 5천 년의 한국사를 복합적으로 이해한다. 고대, 고려, 조선, 근대, 현대로 한국사의 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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