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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100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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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9년, 강조가 7대 목종을 폐위시켜 시해하고, 현종을 옹립한 것이 강조의 정변이다. 당시 거란은 1차 전쟁 때 고려에 넘긴 강동 6주의 전략적 중요성을 실감하고 이를 반환받기 위해 고려를 넘보고 있었다. 거란과의 접경 지역인 고려 서북면에 위치한 강동 6주는 고려가 압록강 선으로 진출하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강조의 정변이 발생하자, 거란은 이를 구실로 강동 6주 반환을 요구하며 2차 고려 정벌에 나선다.
배경
993년 거란의 1차 침입이 서희의 담판으로 끝이 나다.
997년 경종의 장자 개령군 송이 제7대 목종으로 즉위하다.
1004년 거란이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다.
설명
강조(康兆)는 고려의 충직한 용장이었다. 정변 당시 강조가 바로 강동 6주를 포함한 서북면의 도순검사(都巡檢使)라는 주요 직책을 맡고 있었다는 사실도 이를 말해 준다. 특히 거란군 침공 시 고려군 총사령관을 맡았던 강조는 통주 전투에서 전과를 올렸으나 방심하다 거란군에게 생포되었다. 거란의 성종(聖宗)은 “그대처럼 걸출한 인물이 어찌 고려에 태어났는가. 나의 신하가 되면 그대를 살려주겠다.” 하며 회유했으나 “거란의 신하가 될 수 없다.”라고 한사코 거부하다가 장렬하게 죽음을 맞았다.
이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충절을 지킨 강조가 정변의 주역이 된 것은 고려 왕실 내부의 왕위 계승 싸움에 연루되면서다. 정변 당시 목종(穆宗, 재위 997~1009)이 후사를 두지 않은 채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러자 목종은 당숙인 왕욱의 아들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王詢)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마음먹고, 서경에 있던 강조에게 개경으로 와서 왕궁을 호위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당시 목종의 모후인 헌애왕후(獻哀王后)는 외가의 친척인 김치양(金致陽)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신의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삼기 위해 정변을 꾀하고 있었다. 이전부터 이종조카인 대량원군 왕순을 제거하기 위해 머리를 깎아 출가시키고, 여러 차례 자객을 보내 죽이려고도 했다. 당초 김치양은 승려 행세를 하면서 헌애왕후와 추문을 일으키다 왕후의 오빠인 성종(成宗, 재위 981~997)에 의해 유배당했다.
하지만 성종에 이어 목종이 열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정권욕이 강했던 헌애왕후가 섭정을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성종 재위 시절 천추궁(千秋宮)에 머물렀다 하여 스스로를 천추태후(千秋太后)라 부르게 했다. 또한 김치양을 왕궁에 다시 불러들여 우복야(右僕射) 겸 삼사사(三司使)의 높은 벼슬에 앉혔다. 김치양은 인사권을 전횡하고, 뇌물을 받아 호화로운 집을 짓는 등 국정을 마음대로 주물렀다. 이에 백성들의 원성이 날로 커갔다. 왕으로서의 권력을 잃게 된 목종은 여성처럼 용모가 빼어난 유행간(庾行簡)을 가까이에 두고 정치를 외면하였다.
결국 목종의 모후인 헌애왕후와 그의 정부인 김치양은 자신들의 아들을, 목종은 대량원군 왕순을 각각 왕위에 올리기 위해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강조는 목종의 명령을 받자 급히 개경으로 향했다. 하지만 도중에 ‘김치양 일파가 이미 목종을 시해하고, 북방의 군사권을 쥐고 있는 강조를 개경으로 불러들여 제거하기 위해 왕명을 사칭했다’라는 소문을 듣게 된다. 이에 강조는 다시 서경으로 발길을 돌린다.
당시 헌애왕후와 김치양은 계획이 빗나갈 것을 우려하여 강조가 개경에 도착하기 전 그를 생포하기 위해 군사를 배치했다.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강조의 아버지는 “왕이 죽고 없으니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국난을 평정하라.”라는 내용의 편지를 강조에게 보냈다. 그러자 강조는 다시 군사 5,000명을 이끌고 개경으로 향하였고, 평주(平州, 평산)에 이르러서야 목종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강조는 왕명 없이 아버지의 편지만 받고 군사를 움직인 것을 후회하였지만, 부하들의 건의로 결국 목종을 폐위하기로 결정한다. 이어 강조는 목종을 안심시키기 위해 김치양 일당을 제거할 테니 일단 귀법사로 피했으면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개경에 도착한 강조는 곧장 궁궐로 달려가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 등 일곱 명을 죽이고, 헌애왕후를 비롯한 일당 30명을 귀양 보냈다. 강조는 또 목종이 피신한 사실을 확인하고, 목종을 폐위시킨 뒤 대량원군 왕순을 왕으로 세웠다. 당시 난리를 피해 법왕사로 달아났던 목종은 강조에게 말을 보내 줄 것을 부탁했고, 강조가 말 한 필을 보내 주자 충주로 향했다. 하지만 강조는 뒷일을 염려해 부하들을 시켜 도중에 목종을 살해하였다.
이렇게 해서 강조의 정변은 일단락됐지만, 문제는 거란이었다. 거란은 사대 관계를 맺고 있는 고려의 신하가 임금을 죽인 죄를 묻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고려를 침공했다. 사실 거란은 1004년에 이미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거란이 우위에 서는 형제의 맹약을 송나라와 맺은 상태였다. 이로써 송나라와의 관계를 안정시켰기 때문에, 이제는 다시 동쪽으로 진출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고려가 거란 몰래 송나라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구심도 들었다.
이리하여 거란 성종이 직접 이끄는 보병과 기병 40만 명은 1010년 11월 압록강을 건넌 뒤, 흥화진과 귀주에서 고려군과 맞붙고, 통주, 곽주, 안북부, 서경을 거쳐 개경으로 쳐들어갔다.
거란은 첫 번째 흥화진 전투에서 당시 서북면 도순검사 양규(楊規)가 지휘하는 고려군이 거세게 저항하자 성을 함락시키는 데 실패하였고, 흥화진을 우회해 통주 쪽으로 남하해야 했다. 이로써 거란은 고려군이 배후에서 역습하거나 보급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하여 곳곳에 잔류 병력을 남기는 등 전력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청천강 이북의 요충지인 통주는 고려군의 주 방어선으로 총사령관인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 강조가 주력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강조는 통주성 바깥에서 벌어진 삼수채 전투에서 신무기인 검차(劍車, 수레 앞면에 칼과 방패를 꽂아 만든 무기)를 활용해 거란군을 수세에 빠뜨렸다. 하지만 초반 우세에 거란을 가볍게 여긴 강조가 자만에 빠져 평소 즐기는 장기를 두는 등 전투 대비에 소홀해졌다. 이 바람에 고려군은 크게 패배하고, 강조는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통주성을 지키던 고려군은 거란의 항복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세게 저항하여 끝내 성을 지켰다. 고려의 주 방어선을 무너뜨린 거란은 청천강 이북의 최종 거점인 곽주성까지 점령한 뒤 파죽지세로 서경까지 진격했다.
거란이 서경 인근까지 다다르자, 현종(顯宗, 재위 1009~1031)은 거란에게 강화를 제의했다. ‘고려 국왕의 거란 입조(入朝)’가 조건이었다. 그러나 현종의 강화 제의 이후에도 며칠 동안 서경성을 놓고 거란과 고려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서로 많은 피해를 당했다. 거란은 현종의 강화 제의를 항복으로 여기고 방심하고 있다가 고려 증원군의 공격으로 결국엔 서경성을 장악하지 못했다. 고려는 서경 내부에서는 항복 준비를 했으나, 증원군이 이에 반발하며 항전을 이어 가는 등 혼선을 빚기도 했다. 이에 따라 현종의 강화 제의는 무산됐다.
거란이 서경을 우회하여 개경 쪽으로 내달리자 현종은 개경을 떠나 나주로 피신을 떠난다. 1011년 1월, 거란이 개경에 들어가 약탈과 방화를 일삼자 현종은 거란이 철수하면 입조하겠다며 다시 한 번 강화를 제의했다. 거란은 이를 받아들여 열흘 만에 개경에서 빠져나와 회군했다. 거란은 개경까지 진격하는 도중 많은 군사들을 잃었으나 고려의 수도를 차지하고 국왕으로부터 친조 약속을 받았다는 점에서 회군의 명분을 찾았다.
그러나 거란군이 개경에서 철수해 1월 말 압록강을 건널 때까지 열흘 남짓 동안 고려군은 집요하게 거란군을 공격했고, 이 과정에서 거란군 수만 명이 희생됐다. 이로써 고려와 거란의 2차 전쟁은 종결됐다. 하지만 고려가 전쟁을 치르면서 강동 6주에 대한 지배권을 더욱 굳히고, 강화 조건인 국왕의 입조도 거부하면서 전쟁의 불씨는 다시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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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사건들의 기승전결,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와 상호작용을 추적하여 5천 년의 한국사를 복합적으로 이해한다. 고대, 고려, 조선, 근대, 현대로 한국사의 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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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강조의 정변 –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이근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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