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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169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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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 안용복 등이 울릉도 부근에서 어로 행위를 하여 일본에 끌려갔으며, 특히 대마도주는 이곳을 계속 탐내 왔다. 그러나 일본 정부에서는 안용복에게 울릉도와 우산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는 서계를 써 준 후 조선으로 돌려보냈으니, 곧 조선 시대에 일본은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이 조선에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배경
1693년 일본의 대마도주가 울릉도에 대한 야욕을 보이다.
1694년 울릉도는 조선 땅임을 명시한 예조의 서계를 일본에 전달하다.
1696년 조선의 어부 안용복이 울릉, 우산 양도 감세장이라 가칭하다.
설명
1693년 봄,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동래와 울산 출신 어부 40여 명이 일본의 어부들과 충돌하였다. 일본 어부들은 협상을 하자며, 조선 어부들의 대표로 나선 안용복(安龍福), 박어둔(朴於屯) 두 사람을 꾀어내 일본 땅인 은기도(隱岐島, 옥기도)로 납치해 갔다.
이때 안용복은 은기도주에게 “울릉도는 조선 땅이고, 조선 사람이 조선 땅에서 고기를 잡는데 왜 데리고 왔는가.”라고 항의했다. 은기도주가 상관인 백기주(伯耆州) 태수(太守)에게 데려가니, 여기서도 안용복은 조선 땅인 울릉도에 일본 어부들이 출입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안용복은 다시 도쿠가와 막부가 있던 에도로 불려가 막부의 관백(關白)에게 넘겨졌고, 이곳에서도 똑같은 주장을 했다. 그러자 관백은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라는 서계(書契)를 써 주고 안용복을 송환했다. 여기서 울릉도는 그 속도(屬島)인 우산도(于山島, 독도)까지 포함한 것이었다. 그러나 안용복이 귀국길에 대마도에 이르자, 대마도주는 관백의 서계를 빼앗았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대마도주는 다치바나 마사시게(橘眞重)를 보내 조선 어부 안용복과 박어둔을 “일본 영토인 죽도(竹島, 울릉도의 일본 이름)를 침범한 죄인”이라며 동래부(東萊府)에 넘겼다. 조선 조정에 보내는 대마도주의 서신도 전달했다. 서신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조선의 어부들이 해마다 일본의 죽도에서 고기잡이를 해서 이를 금지토록 했는데도, 올 봄에 안용복을 포함해 어부 40여 명이 또다시 죽도에 들어와 고기를 잡았다. 앞으로는 죽도에 조선의 배가 들어오지 못하게 해 달라.
대마도주가 안용복 사건을 역이용해 울릉도를 차지하려는 속셈이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일본과 정면충돌하는 사태를 우려해 ‘우리나라의 울릉도도 멀리 있다는 이유로 마음대로 왕래하지 못하게 했는데, 조선 어부들이 일본의 죽도까지 들어가 번거로움을 끼쳤다’라는 내용으로 회답 서신을 보냈다. 조선의 영유권을 확인하면서도, 일본과의 논란을 피하기 위해 한 섬에 두 가지 이름을 붙이는 일도이명(一島二名)의 모호한 태도를 취한 것이다. 이에 대마도주는 다치바나 마사시게를 통해 ‘우리나라의 울릉도’라는 표현을 삭제할 것을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조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의 사론(史論)은 ‘왜인들이 울릉이란 명칭을 숨기고 (……) 점거할 계책을 삼으려고 했으니 (……) 엄격히 물리쳐 교활한 왜인으로 하여금 다시는 마음을 내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데도, 신중한 데에 지나쳐 이웃 나라에 약점을 보였다’ 하고 비판했다.
결국 숙종은 1694년 갑술환국으로 정권을 장악한 소론파 남구만(南九萬)의 의견을 받아들여, 죽도는 곧 조선 영토인 울릉도이며, 조선 영토를 침입해 조선인을 잡아간 것은 명백한 일본인의 실책이라는 점을 밝힌 강경한 내용의 회답서를 대마도주에게 다시 보냈다. 수정한 회답서에는 일본인들이 다시는 울릉도를 왕래하지 말도록 당부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안용복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1696년 신년 초에 열린 회의에서 울릉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하고 대마도주에게 일본인의 울릉도 왕래를 금지하도록 지시했다. 울릉도가 백기주에서는 160리가 넘지만, 조선에서는 40리 거리에 불과하기 때문에 조선 영토가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막부는 대마도주에게 이 같은 결정 내용을 조선에 공식으로 알리도록 했다. 하지만 대마도주는 계속 시간을 끌었고, 일본 어부들의 울릉도 및 독도 출입도 여전했다. 이에 안용복은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영유권 수호를 위해 담판을 지었다.
동래에 살았던 안용복은 1696년 봄, 어머니를 만나러 울산에 갔다가 영해 출신 유일부(劉日夫), 유봉석(劉奉石), 평산포의 이인성(李仁成), 낙안의 김성길(金成吉), 연안의 김순립(金順立), 순천 송광사 승려인 뇌헌(雷憲), 승담(勝淡), 연습(連習), 영률(靈律), 단책(丹責) 등을 만나 해물이 많은 울릉도로 가기로 했다. 이에 유일부를 사공으로 삼아 울릉도에 도착했는데, 당시 상황을 안용복은 뒷날 비변사에서 이같이 밝혔다.
“드디어 같이 배를 타고 그 섬에 이르렀는데, 주산(主山)인 삼봉(三峯)은 삼각산(三角山)보다 높았고, 남에서 북까지는 이틀 길이고 동에서 서까지도 그러했다. 산에는 잡목과 매, 까마귀, 고양이가 많았고, 왜선도 많이 와서 정박해 있어 뱃사람들이 다 두려워했다.”
안용복은 배를 정박해 놓은 일본인들에게 “울릉도는 본디 우리 지경(地境)인데, 왜인이 어찌하여 감히 지경을 넘어 침범했는가. 너희들을 모두 포박해야 하겠다.” 하고 소리쳤다.
이에 일본인들은 “우리는 본래 송도(松島, 독도의 일본 이름)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잡이 하러 나왔다가 이제 돌아갈 것이다.”라고 답하였다.
그러자 안용복은 “송도는 우산도(于山島)로서, 그것도 우리나라 땅인데 너희들이 감히 거기에 사는가.”라고 따졌다. 안용복이 이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다음 날 새벽 배를 몰아 우산도로 갔다. 실제 그곳에서는 일본인들이 가마솥을 걸어 놓고 생선을 조리고 있었다. 이에 안용복이 막대기로 쳐서 깨뜨리고 큰소리로 꾸짖자, 일본인들은 모두 돛을 올리고 돌아갔다.
안용복 일행은 일본인들을 추격해 마침내 은기도에 이르렀다. 은기도주가 찾아온 까닭을 묻자, 안용복은 말했다.
“근년에 내가 이곳에 들어와 울릉도와 우산도 등을 조선의 지경으로 정하고, 관백의 서계까지 받았는데, 이 나라에는 정식(定式)이 없이 또 우리 지경을 침범했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그러자 은기도주는 안용복의 항의를 백기주에게 전하겠다고 했으나, 오래도록 기다려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이에 격분한 안용복은 직접 담판을 벌이기 위해 배를 타고 곧장 백기주로 나아가 ‘울릉, 우산 양도 감세장(鬱陵于山 兩島 監稅將)’이라 가칭했다. 백기도에 사람을 보내 통고하니, 백기도주가 사람과 말을 보내 안용복 일행을 맞이했다. 안용복은 푸른 철릭(무관의 공복)에 흑포(黑布) 갓, 가죽신을 착용하고, 가마에 올라 일행들과 함께 백기주 마을로 갔다.
안용복이 백기주 태수의 집무처로 들어가자 백기도주는 그와 대좌하여 무슨 일로 왔는지를 물었다. 이에 안용복은 “일전에 울릉도와 우산도 두 섬의 일로 관백으로부터 서계를 받았음이 명백한데도, 대마도주가 서계를 탈취하고 중간에서 위조하여 여러 차례 차왜(差倭)를 보내 불법으로 침범하니, 내가 장차 관백에게 상소하여 죄상을 낱낱이 말하려 한다.” 하고 밝혔다. 백기도주가 이를 허락하자, 안용복은 이인성으로 하여금 상소문을 지어 관백에게 보내도록 일렀다.
이때 대마도주의 아버지가 백기주 태수를 찾아가 “이 상소가 올라가면 내 아들은 반드시 중죄를 얻어 죽을 것”이라며 상소문을 보내지 말 것을 간청하였다. 이렇게 해서 상소문이 관백에게 올라가지는 않았으나, 이 같은 정황을 알게 된 일본은 일전에 국경을 침범해 울릉도에 들어간 일본인 열다섯 명을 적발해 처벌했다. 그리고 백기주 태수는 안용복에게 “두 섬이 이미 조선에 속한 이상, 뒤에 혹시 다시 침범하여 넘어가는 자가 있거나 대마도주가 함부로 침범하는 일이 있으면, 국서(國書)를 만들어 역관(譯官)을 정해 들여보내면 엄중히 처벌하겠다.” 하고 약속했다. 당시 백기주 태수는 안용복 일행에게 식량과 화폐를 주려 했으나 안용복과 뇌헌 등은 이를 사양하고 귀국했다.
이에 대마도주는 도쿠가와 막부에서 지시받은 대로 공식 문서를 뒤늦게 조선에 보냈고, 1699년에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 울릉도와 우산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하는 최종 외교 문서가 오갔다. 이로부터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만들어진 일본의 지도와 문헌에는 울릉도와 우산도를 조선 영토로 표시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안용복 일행이 귀국한 직후 안용복을 사형시켜야 한다는 일부 주장이 있었으나, 영중추부사 남구만 등의 만류로 귀양 조치하는 것으로 매듭을 지었다. 당시 남구만은 조정에서 안용복의 활약상을 이같이 밝혔다.
“대마도의 왜인이 울릉도를 죽도라 거짓 칭하고 막부의 명령이라 거짓 핑계 대어 조선인들이 울릉도를 왕래하지 못하도록 중간에서 농간을 부린 것이 안용복 덕분에 죄다 드러났으니 참으로 통쾌하고 기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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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사건들의 기승전결,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와 상호작용을 추적하여 5천 년의 한국사를 복합적으로 이해한다. 고대, 고려, 조선, 근대, 현대로 한국사의 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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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안용복 사건 –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이근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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