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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1945~1951년대 세계 영화사

네오리얼리즘

네오리얼리즘(Neo Realism)은 현지 촬영, 자연 조명, 비전문배우 기용 등 사실주의 영화 미학이 특징으로 2차 대전 후 이탈리아의 경제 빈곤과 갈등으로 얼룩진 비관주의에 깊게 뿌리를 두고 있다. 네오리얼리즘은 그렇게 독창적이거나 통일된 영화 운동은 아니었지만 허구적인 영화 제작에 사실주의라는 다른 접근을 가하게 했다. 더욱이 이러한 접근은 당시 다른 나라들에 큰 자극을 주었다.

네오리얼리즘의 가장 중요한 영화들은 1945년에서 1951년 사이에 나타났다. 루치노 비스콘티(Luchino Visconti)의 〈강박관념(Ossessione)〉이 네오리얼리즘의 포문을 연 영화였다면, 로베르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의 〈무방비 도시(Open City)〉는 네오리얼리즘을 세계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된 작품이다. 그리고 〈전화의 저편(Paisan, 1946)〉, 〈독일 영년(Germany Year Zero, 1947)〉으로 이어지는 전쟁영화 3부작이 스타일의 전형을 이룬다고 평가된다. 이 사조를 대표하는 감독으로는 로베르트 로셀리니, 비토리오 데 시카(Vittorio De Sica), 루치노 비스콘티를 꼽을 수 있다.

네오리얼리즘은 이탈리아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그것은 1922년 무솔리니가 파시스트 정권을 장악했을 때부터 시작된다. 무솔리니는 낙후된 이탈리아 영화를 다시 부흥시키겠다는 공약을 내세웠고, 1930년대 초에 그 약속을 이행했다. 히틀러와 달리 정치의 다양성을 어느 정도 인정했던 무솔리니는 1934년 정부 직속 영화국을 창설해 영화의 보호 육성과 해외 선전, 외국영화의 수입관리에 나서도록 했다. 그 후 많은 이탈리아의 주요 대학에 영화학부의 개설이 이어졌다.

하지만 나치의 영화 통제가 국민들에게 그다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보고, 노골적인 선전영화보다는 대중적인 오락영화 제작에 중점을 두게 하였다. 그리고 1935년 11월에 유명한 영화학교인 ‘영화 실험 센터’를 로마에 설립하고 교장으로 좌파 지식인 루이지 치아리니를 앉혔다. 이곳은 나중에 이탈리아 영화를 짊어질 젊은 영화인재들을 양성하게 된다. 또한 1937년에는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스튜디오인 ‘치네치타(Cinecitta)’가 문을 열었다.

치아리니는 공산주의에 공감하는 학생들에게 영화를 가르치며 용기를 북돋웠는데, 그는 반파시스트인 움베르토 바르바로 같은 교수들을 채용하기도 했다. 바르바로는 1920년대 러시아 영화학교에 관한 기사들과 번역물 등을 통해 새로운 리얼리즘에 대한 필요성을 강의했다. 사실상 미래의 네오리얼리즘 영화를 만든 감독들이 이미 이 학교에 모여 있었다.

한편 영화계에 막대한 지원을 한 무솔리니(Mussolini)는 그 대가로 영화에 대한 통제를 시작했다. 파시즘(Fascism)을 선전하는 영화나 값싼 오락영화 이외에는 제작이 불가능한 시기였다. 파시즘 정권은 사전 시나리오 검토를 통해 영화제작을 허가했으며, 영화가 완성되면 실사 검열을 하는 이중 검열 제도를 실시했다. 이 검열 제도는 얼마나 엄격했는지 살인, 자살, 불륜 장면들을 금지했고 성직자들이나 군인, 경찰들도 영화에 등장할 수 없었다. 당연히 사회적, 종교적, 섹스에 대한 문제들은 이태리 영화에서 다루어 질 수 없는 금기사항이었다. 이탈리아 영화에서는 배고픔도 실업자나 매춘, 가난 따위도 존재하지 않았다. 파시즘 최대의 희생자는 모든 형태의 사실주의였던 것이다.

이 당시의 영화들을 ‘백색전화 영화’라고 부르는데, 대부분의 영화들이 화려한 장식의 실내에서 상류층 여인이 화려한 의상을 입고 전화기로 사랑을 속삭이는 식의 장면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잡지 《시네마》에서는 1941년부터 ‘영화 실험 센터’의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젊은 영화인들을 모았는데, 이들은 노골적으로 기존 영화들을 비판했고 이탈리아 영화의 변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문학계에서도 몇몇 출판업자들이나 잡지들 덕분에 정권의 정치, 미학 정책에 반기를 드는 문학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모두 파시즘의 판에 박힌 진실이나 국가적 신화 같은 것들을 거부했고 사회적, 심리적 각도에서 이탈리아 현실을 재조명 할 것을 진지하게 주장했다. 그렇다고 이 예술가들이 모두 ‘사실주의’를 전적으로 주장하거나 옹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세계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런 예술적, 이성적 반란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영화 속에서 표현됐다. 당시 이탈리아 영화의 수준을 그나마 유지시키며 영화계를 이끌던 젊은 영화인들은 야망과 열정을 가지고 파시스트 정부의 시스템을 조금씩 밀어냈다. 이때 데뷔한 많은 영화인들 가운데 앞으로 네오리얼리즘을 이끈 주역들이 있었다.

네오리얼리즘은 나름의 독특한 영화 양식을 만들어냈다. 1945년에 로마의 거대 복합 스튜디오인 치네치타는 전쟁으로 대부분 파괴되었고, 따라서 세트는 공급부족이었으며 녹음기재는 귀했다. 따라서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은 실제 장소에 의존했고 영상은 다큐멘터리처럼 가공되지 않은 거친 경향을 띄게 되었다. 로셀리니는 거리의 사진사들로부터 음화필름을 조금씩 사들였다고 하며 따라서 〈무방비 도시〉의 상당 부분이 각기 다른 질감의 필름으로 촬영되었다. 거리나 건물 내에서의 촬영은 할리우드 삼점 조명 체계와는 달리 가능한 조명상황으로 촬영했다.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은 유명한 연극 또는 영화배우들도 자주 기용하기는 했지만, 비직업적인 배우들 역시 그들의 사실적 외모나 행동거지에 따라 다수 기용했다. 〈자전거 도둑〉의 아버지 역은 한 공장 노동자를 기용한 것이었다. 이탈리아 영화는 오랜 더빙 전통이 있었다. 대사를 후시녹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감독들은 소수의 제작진으로 현장촬영과 카메라 움직임을 사용할 수 있었다. 연기와 배경에 대한 상당한 정도의 즉흥적인 결정은 화면구성에 어느 정도 유연함을 주었는데, 〈무방비 도시〉에서 피나가 죽는 장면, 〈독일 영년〉의 마지막 시퀀스, 〈흔들리는 대지〉에서 깊이감 있게 연출된 바닷가 풍경 등에서 잘 드러난다.

네오리얼리즘에서 서사형식(narrative form)각주1) 이 갖는 의미는 심지어 더 큰 영향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복잡한 구성의 백색전화 영화에 반발하며 네오리얼리즘 감독들은 서사 연결을 느슨하게 했다. 〈강박관념〉이나 〈무방비 도시〉, 〈구두닦이〉 같은 이 운동의 초기 주요 영화들은 비교적 관습적인 플롯 구성으로 되어 있다. 인물 행위들의 동기들은 보통 경제적, 정치적 문제(빈곤, 실업, 착취)로서 구체적으로 그려지지만 그 결과는 흔히 단편적이며 근본적인 해결에 이르지 않는다.

로셀리니의 〈파이잔〉은 연합군이 상륙한 기간 동안 이탈리아의 삶을 보여주는 6개의 일화로 이루어진다. 이 영화에서 흔히 사건의 결과나 원인에 따른 결과는 알 수 없다. 〈자전거 도둑〉은 주인공 부자가 여전히 자기들의 자전거를 찾지 못한 채 거리를 배회하는 것으로 끝난다. 미래가 불확실한 채로 말이다. 〈흔들리는 대지〉는 선주들에 대한 시실리아 어부들의 봉기가 실패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다음번의 봉기가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없애지는 않는다. 네오리얼리즘의 삶의 단편으로 이어진 플롯 구성은 이 운동에 속하는 많은 영화들에 할리우드의 폐쇄된 서사구조의 대조적인 열린 성격을 갖게 했다.

이 시기에 네오리얼리즘에 대해 내렸던 정의 가운데 지금까지도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아마도 데 시카 감독과 손잡고 〈자전거 도둑〉과 〈움베르토 디〉를 만들었던 영화 대본 작가 체자레 자바띠니의 정의일 터이다. 자바띠니는 네오리얼리즘 영화가 이루어 놓은 가장 위대한 업적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영화에 담아냈다는 점이라는 것이다. 이는 보다 관습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서 관객의 흥미를 끌기는 하지만 영화 밖에서 겪는 현실과는 연관성을 갖지 못하는 영화의 허구와 대조를 이루었다. 자바띠니에게는 네오리얼리즘의 목표가 인위적으로 꾸미거나 극적으로 과장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의 삶이 지닌 ‘일상성’을 재발견하는 일이었다. 그는 이런 삶에서 가장 사소하고 겉으로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은 세부적 내용들이 시로 가득할 뿐만 아니라 인간 조건의 ‘반향과 반사’라고 주장했다.

경제적, 문화적 요인들이 네오리얼리즘 운동을 유지시켜온 힘이었듯이 그것들은 또한 이 운동이 종식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이탈리아가 다시 번영을 맞기 시작하자 정부는 당대 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영화들을 경계하기 시작했고, 네오리얼리즘이 정치와 사회 현실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묘사한다는 이유로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1949년 이후, 검열과 당국의 압력은 이 운동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방대한 규모의 이탈리아 영화제작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고 네오리얼리즘은 더 이상 쇼규모 제작사의 자유를 누릴 수 없었다. 이제 유명해진 네오리얼리즘 감독들은 보다 개인적인 관심사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로셀리니는 기독교적 인본주의와 서구 역사에 대한 탐구로, 데 시카는 감상적인 로맨스들로, 비스콘티는 상류사회 풍속도로 관심을 바꾸었다.

네오리얼리즘은 전 세계 영화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운동은 에르마노 올미와 샤티야지트 레이와 같은 감독들 그리고 프랑스 누벨바그와 같은 집단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지역성을 특징으로 적은 예산을 들여 만들어도 충분히 가치 있는 영화가 탄생할 수 있음을 전 세계에 입증했다. 흥미롭게도 이 교훈을 새겨 놓은 곳은 할리우드였다.

참고 영화

독일 영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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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목제작시기영화감독
강박관념(Ossessione)1942루치노 비스콘티(Luchino Visconti)
무방비 도시(Roma, Citta Aperta)1945로베르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
전화의 저편, 파이잔1946로베르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
구두닦이(Shoeshine)1946비토리오 데 시카(Vittorio De Sica)
독일 영년(Germany Year Zero)1947로베르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
흔들리는 대지(La Terra Trema)1948루치노 비스콘티(Luchino Visconti)
자전거 도둑(Ladri di biciclette)1948비토리오 데 시카(Vittorio De Sica)
움베르토 디(Umberto D)1952비토리오 데 시카(Vittorio De Sica)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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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강호 집필자 소개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교 일반대학원에서 석사학위(1988), 박사학위(1996)를 취득했다. 1998년부터 대진대학교 연극영화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영화학회 회장(..펼쳐보기

출처

영화사를 바꾼 명장면으로 영화 읽기
영화사를 바꾼 명장면으로 영화 읽기 | 저자신강호 | cp명커뮤니케이션북스 도서 소개

영화의 줄거리, 설명이나 비평보다는 왜 그 장면이 명장면인가에 초점을 맞춰 내용과 형식을 유기적으로 연관시켜 분석한다. <전함 포템킨>부터 <매트릭스>까지 81명 감독..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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