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청결의 역습

기생충에서 찾은 실마리

1990년대 초, 소화기 내과의사 조엘 와인스톡(Joel Weinstock)은 난해한 퍼즐과 맞닥뜨렸다. 20세기에 들어서 북미 전역에서 크론병 같은 염증성장질환이 크게 증가했다. 많은 연구자가 이 고약한 장 질환을 유발하는 특별한 유전자를 찾는 데 열중했지만 와인스톡은 생각이 달랐다. 염증성장질환은 불과 두 세대 전만 해도 1만 명 중 1명꼴로 발생했다. 그런데 지금은 250명 중 1명꼴이다. 질병 유전자가 그렇게 빨리 퍼질 수는 없다. 그는 환경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와인스톡은 무엇이 염증성장질환을 촉발했는지 묻는 대신 질문의 방향을 반대로 돌려물었다.

‘20세기 이전에는 무엇이 염증성장질환의 발병을 막았을까?’

뉴욕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와인스톡은 크론병 증가에 관한 데이터가 들어 있는 폴더를 뒤적이고 있었다. 문득 그는 같은 기간 기생충 감염이 매우 감소한 사실을 떠올렸다. 당시 와인스톡은 아이오와 주립대학에서 기생충에 관한 책을 편집하고 있었다. 그는 두 데이터를 점으로 연결했고 점들은 의미 있는 상관관계를 드러냈다. 그 결과 근거로 와인스톡은 ‘크론병의 원인은 기생충일 수도 있다!’라고 짐작했다.

일반적으로 몸은 외부 물질의 침입에 대항하여 염증을 일으킨다. 그러나 기생충은 대부분 염증을 유발하지 않고 반대로 숙주의 면역시스템을 진정시킨다. 우리 몸은 기생충에 감염되면 아이러니하게도 염증반응을 억제하는 신호물질을 만들어낸다. 축출을 피하기 위한 일종의 평화협정인 셈이다.

크론병은 정상적인 장 조직에 면역계가 불필요한 염증을 일으켜 조직이 괴사하는 질환이다. 와인스톡은 기생충이 숙주의 면역체계를 조작하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크론병 같은 질병으로부터 숙주를 보호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염증성장질환의 확산과 기생충 감염률을 비교하자 분명한 패턴이 나타났다. 어떤 인구 집단에서든 위생이 개선되고 구충사업이 효과를 보이면 염증성장질환 발생률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산업국가와 부유층에게는 높은 빈도로 나타나며 흙과 가까이 지내는 ‘덜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와인스톡은 장구한 공진화(여러 종의 생물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진화해가는 일)의 결과로 인간의 면역시스템은 적절히 기능하기 위해 기생충에 의존하게 되었으리라는 가설을 세웠다. ‘청결한 환경과 각종 약품이 우리 몸에서 기생충을 퇴출하자 면역시스템이 정상궤도를 이탈했다’고 그는 추론했다.

기생충의 부재가 크론병의 원인이라면 기생충에 다시 감염시켜 크론병을 치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임상실험에서 많은 환자가 치유 효과를 보인다면 와인스톡의 가설은 설득력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사람을 기생충에 감염시킨단 말인가? 우리가 구충사업을 대대적으로 펼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기생충은 빈혈을 일으키고 장을 막기도 한다. 종류에 따라서 심각한 위협이 되기도 하며 사망에 이르게도 한다. 따라서 어떤 기생충을 어떻게 감염시킬지에 대한 신중한 고민이 따라야 했다.

와인스톡은 임상실험에 쓸 적당한 후보를 돼지 농장에서 찾아냈다. 돼지를 치는 농부들은 지속적으로 돼지 편충에 노출된다. 농부들은 이 기생충에 감염돼도 별 탈이 없다. 와인스톡과 동료들은 아이오와 주립대학 윤리위원회에 돼지 편충의 알을 사람에게 먹이는 실험의 승인을 신청했다. 과연 윤리위원회가 이런 실험을 승인할 것인가? 그런데 우려와 달리 신청은 받아들여졌다.

1999년 봄, 실험에 지원한 크론병 환자들이 와인스톡의 실험실에 모였다. 그들은 문답지를 작성하고 기초 검사를 받았다. 지나치게 중증이거나 지나치게 경미한 환자들, 그리고 임신 가능성이 있는 여성은 제외됐다. 최종적으로 29명의 환자가 선발됐다. 와인스톡의 가설이 맞는다면 이들은 병이 나을 것이고, 틀리다면 병세가 지속되거나 악화될 것이다. 그들은 기생충을 받아들일 각오가 돼 있었다. 이제 그들의 몸 안에서는 문명이 거꾸로 흐를 것이다.

정상인은 소화기관의 노고를 거의 잊고 산다. 그러나 크론병 환자들은 매순간 자기 소화기관의 한계를 절감하며 산다. 그들은 매일 창자의 나약함과 무능함을 느낀다. 염증이 대장에만 나타나는 궤양성 대장염과 달리 크론병은 어떤 소화관이든 염증이 나타날 수 있다. 와인스톡의 실험실에 모인 사람들은 이 고통이 너무나 끔찍해서 돼지 기생충을 몸에 넣어서라도 치유되기를 희망하는 이들이었다.

환자들이 실험에 임할 각오를 하는 동안 돼지 편충도 준비되었다. 편충이 돼지 창자로부터 다른 질병을 옮기지 않도록 확실하게 처리하는 일이 필요했다. 편충의 알을 일반 돼지로부터 무균 돼지로 옮겼다. 그런 다음 이들 특별한 벌레들을 교배했다. 알이 수확되어 2,500개씩 나뉘었다. 1999년 3월 14일, 크론병 환자 29명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편충 알이 든 게토레이드 한 잔씩을 받아들었다. 와인스톡의 실험팀은 알이 보이지 않도록 미리 게토레이드에 목탄을 섞어놓았다. 실험팀이 지켜보는 가운데 환자들은 편충알이 든 게토레이드를 마셨다.

어미 편충은 하루에 알을 수천 개나 낳는다. 이 알들은 숙주의 배설물을 통해 땅에 버려진다. 그리고 알은 누군가 우연히 자기를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창자에 들어와 부화한다. 어린 편충은 창자의 점막에 붙어 성충으로 자란다. 다 자란 성충은 짝짓기를 하고 다시 알을 낳는다. 편충의 역사는 이렇게 한 번에 하나씩 작은 우연으로 수백만 년을 이어왔다. 실험팀은 크론병 환자들에게 먹인 편충알이 성충 단계까지 자라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기생충들은 어느 정도 자라다가 자연스럽게 사멸할 것이다. 다만 그 사이 환자들에게 긍정적인 면역반응을 일어나길 기대했다.

1주가 지나고 또 1주가 지났다. 환자들은 3주에 한 번씩 돼지 편충알이 든 게토레이드를 마셨다. 실험팀은 환자들 상태가 좋아지고 있는지 지속적으로 확인했다. 환자 4명이 실험을 포기하고 떠났다. 7주차에 이르러 몇몇이 아주 미세한 차도를 보였다. 물론 기생충 알 때문이 아니라도 이런 증세 호전은 간간이 있는 일이기 때문에 편충알의 영향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12주차, 환자들이 실험실에 모여 검사를 받았다. 마침내 원하던 결과가 나왔다. 25명 중 22명이 증세에 차도를 보인 것이다. 마지막인 22주차에 이르자 1명을 제외한 전원이 상태가 좋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확실한 차도를 보인 환자는 25명 중 무려 21명이었다. 실험팀은 기대 이상의 결과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그 이유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다른 치료 방법을 찾지 못하고 막다른 길에 선 중증 환자들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기에 실험팀은 더욱 반가웠고 마음은 더 급해졌다.

2005년 와인스톡은 크론병 실험에 이어 임상실험 하나를 추가로 더 시행했다. 이 실험에는 궤양성 대장염 환자 30명이 참가했다. 환자들에게 전 실험과 비슷한 방식으로 기생충을 섭취하게 했다. 30명 중 13명의 증상이 완화됐다. 와인스톡의 기생충 실험은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았다. 이와 유사한 대규모 실험이 이어졌고 그 결과는 와인스톡의 가설에 설득력을 더했다.

기생충 박멸은 국가적 차원의 공중보건 사업의 개가였다. 이처럼 인간은 끊임없이 자연을 통제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그러나 와인스톡의 실험이 갖는 맥락에서 보면 그 통제 결과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둑을 막고 직선으로 폈던 강물을 다시 옛날처럼 구불구불 흐르게 하면 강변 생태계가 균형을 회복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제거했던 기생충 가운데 몇 종류는 복구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와인스톡은 면역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기생충이 필요하다고 믿게 되었다.

‘기생충이 없으면 면역시스템은 무중력 상태에 버려둔 식물 같다. 중력이 없으면 식물의 뿌리는 메두사의 머리카락처럼 사방으로 자라나간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면역시스템은 기생충이 없으면 혼란에 빠진다.’

편충

ⓒ Delorieux for Johann Gottfried Bremser/wikipedia | Public Domain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 ・ Moises Velasquez-Manoff, “The Worm Turns” New York Times (2008. 6. 29)
  • ・ Marks D.J, Segal A.W. “Innate immunity in inflammatory bowel disease: a disease hypothesis” Journal of Pathology (2008)
  • ・ Crohn’s Disease Webcast, “Crohn’s Disease: Is a Clean Gut Causing Your Symptoms?”
  • ・ Dunn, Rob. “The Wild Life of Our Bodies” Harper Collins (2011), pp. 32~44.

유진규 집필자 소개

1965년 출생. 서울대 영어교육과 졸업. SBS 다큐멘터리 PD로 활동 중이다. 2007년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환경호르몬의 습격>으로 한국방송대상을 수상했고, 이후 <..펼쳐보기

출처

청결의 역습
청결의 역습 | 저자유진규 | cp명김영사 도서 소개

좋은 세균이 만들어내는 기적과 좋은 세균이 사라지면서 생겨나는 재앙에 관한 놀랍고도 충격적인 메시지! 세균을 질병의 원인이라고 여기는 현대인은, 매일 수많은 항균제품을..펼쳐보기

전체목차
전체목차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건강

건강과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



[Daum백과] 기생충에서 찾은 실마리청결의 역습, 유진규, 김영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