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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합론의 핵심은 한 원소가 집합의 원소냐 아니냐 하는 간단한 규칙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논의 역설에 나오는 아킬레스와 거북이처럼, 이솝 우화에는 달리기 시합을 하는 토끼와 거북이가 나온다.
토끼와 거북이는 둘 다 ‘동물’이라는 집합의 원소들이다. 토끼는 ‘포유 동물’의 부분 집합이고 거북이는 ‘파충류’의 부분 집합이다. 이제 ‘빠른 동물’이라는 집합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토끼는 그 집합에 속하고 거북이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주관적인 판단이다. 다른 동물들에 대입했을 때 ‘빠르다’는 기준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개는 어떨까? 빠른 동물일까? 그렇다면 뱀은? 기린은? 어떤 동물은 약간 빠르고 어떤 동물은 아주 빠르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집합의 원소는 둘 중 하나의 집합, 즉 빠른 동물이나 그렇지 않은 동물의 집합에 속해야 한다.
집합에서는 구분이 되는 기준이 명확해야 하는데 그 기준이 항상 완전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1시간에 25킬로미터를 달릴 수 있는 동물을 빠르다고 한다면 1시간에 24.95킬로미터를 달리는 동물은 빠르지 않은 것이 되고 만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아리스토텔레스는 약간 빠른 동물과 같이 이것과 저것 중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대상에 관한 배중각주1) 의 문제를 발견했다. 하지만 수학에는 중간을 다룰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이 문제는 20세기까지 다뤄지지 않았다. 버트런드 러셀은 ‘스스로 면도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이발사의 역설’과 ‘모든 집합을 포함하는 집합’에서 배중의 문제를 강조했고 이 문제를 집합론의 모순으로 제시했다.
1920년대에 폴란드 논리학자인 얀 루카시에비치는 다가 논리각주2) 의 특성을 연구했다. 이 논리에서 진술된 문장들은 1(완전한 참)과 0(완전한 거짓) 사이에 위치한 부분적인 참값을 가질 수 있다. 1937년에 철학자 막스 블랙은 다가 논리를 객체들의 집합에 적용해서 최초로 ‘퍼지(fuzzy)’ 집합 곡선들을 끌어냈다. 그는 이 집합들을 ‘모호한(vague)’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개요를 바탕으로 미국 수학자 로트피 자데는 1965년에 퍼지 논리학과 퍼지 집합을 개발했다. 이것들은 모호한 값과 범주를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제공했다. 하지만 퍼지 이론의 타당성과 특성을 두고 학자들의 의견은 엇갈린다. 어떤 수학자들은 퍼지 이론을 가능성 이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확률 이론의 변형으로 보기도 하고, 어떤 수학자는 확률 이론을 정확성이 적용될 수 있는 퍼지 이론의 특별한 사례로 보기도 한다.
버트런드 러셀
버트런드 러셀(1872~1970년)은 영국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수학자이자 철학자이다. 그는 여섯 살에 고아가 되어 할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집에서만 교육을 받았다.
그는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했지만 금방 철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그의 철학 연구 중 상당 부분은 수학 철학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바이어슈트라스, 데데킨트, 칸토어에게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형식적이고 논리적인 수학의 기본 원리가 정립되기를 바랐던 수학자들이었다.
러셀은 수학이 논리라는 것을 그의 책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에서 증명하고자 했다. 하지만 논리의 기저를 재정의하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는 역설을 발견했는데 그 역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이발사가 자신은 스스로 면도하지 않는 사람들만을 면도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이발사의 수염은 누가 깎을 수 있을까?
만약 이발사가 스스로 면도를 한다면 스스로 면도하지 않는 사람만을 면도한다는 전제를 어기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 면도를 하지 않는다면 전제에 따라 자신이 스스로 면도를 해야 하는 역설에 빠진다.
논리학자들은 이 역설을 다루기 위해 집합론을 바꾸는 등 다양한 방법들을 찾아냈다. 이 시도는 집합을 좀더 엄격하고 정확하게 정의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모호한 것을 계산하는 법
셈과 측정을 구별하는 것은 집합으로 완전히 나누어지지 않는 대상에 관한 것이다. 퍼지 집합은 한 집합에 속하거나 속하지 않는 양분 되는 원소 대신 0(원소가 아님)과 1(원소임) 사이에 있는 값을 사용해서 집합에 대한 소속 정도를 보여줄 수 있다. 따라서 한 집합에 소속된 것들은 0과 1 사이의 값을 가진다.
빠른 동물들의 집합에서 치타의 소속도가 1이라면 아킬레스는 0.5, 거북이는 0.1의 소속도를 가질 것이다. 전혀 움직이지 않는 다 자란 따개비는 소속도가 0이거나 이 집합에 포함되지 않는다.
퍼지 이론은 ‘다소’, ‘꽤’, ‘매우’와 같은 언어적 범주에 있는 것들을 활용한다. 그래서 한 동물은 ‘매우’ 빠르거나 ‘꽤’ 빠를 것이다. 빠른 동물들의 집합에서 0.6의 소속도를 가진 동물들을 ‘꽤 빠르다’고 한다면 0.8의 소속도를 가진 동물들은 ‘매우 빠르다’가 될 것이다. ‘퍼지’는 불확실함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범주들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다루는 것이다.
퍼지 집합은 서로 겹칠 수도 있다. 빠른 동물들의 집합에서 0.2의 소속도를 가지는 동물은 느린 동물들의 집합에서 0.8의 소속도를 가질 수 있다. 하나 이상의 집합에서 갖는 값들을 조합하면, 기존의 집합론에서 단순하게 집합에 속하거나 속하지 않는 것으로 설명했던 것보다 상황이나 대상에 대해 더 낫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기존의 집합에 퍼지 집합을 적용할 수도 있다. 기존의 집합에서는 불가능하지만, 퍼지 집합에서는 느린 동물과 빠른 동물의 집합처럼 한 원소가 두 개의 여집합의 원소가 될 수도 있다. 유일한 조건은 두 집합의 총 소속도를 더했을 때 0.2 빠르기와 0.8 느리기처럼 1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퍼지 논리의 활용
퍼지 논리는 의사 결정이나 컴퓨터 프로그램에 퍼지 집합을 적용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생각과 비슷한 판단을 내리거나 자주 일어나는 상황에 맞춰 기계를 작동시키는 많은 공학 제어 시스템에서 사용된다.
퍼지 논리는 가전 제품이나 자동차 등에도 사용된다. 예를 들어, 디지털 카메라는 센서를 통해 빛의 정도를 감지해서 사진가가 어떤 물체에 초점을 맞추려 하는지를 알아낸다. 그 후에 피사체에 초점을 맞추고 노출을 적절히 조절한다. 세탁기는, 세탁물의 양과 더러움의 정도에 따른 최상의 세탁 과정을 찾아낸다. 세탁기는 최적량의 비누와 물, 최적의 세탁 온도, 필요한 세탁 시간을 계산할 것이다.
퍼지 논리로 제어하는 최초의 시스템은 에브라힘 맘다니와 세토 어실리언이 1970년대 초기에 런던의 퀸 메리 대학에서 만들어냈다. 그들은 작은 스팀 기계와 보일러의 작동을 제어하기 위한 규칙을 정리한 다음 이것을 알고리즘으로 바꿔 시스템을 제어하는 데에 퍼지 집합을 사용했다. 퍼지 시스템을 이용한 제어가 상업적으로 사용된 것은 1980년대 덴마크 코펜하겐의 시멘트 공장에서였다.
퍼지 논리학은 제어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 시스템, 인공 지능, 음성 인식, 이미지를 처리하는 프로그램 등에도 사용된다. 이것은 인간의 판단을 추정해서 시스템에 필요한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시키려 하는 것이다.
퍼지 시스템의 기본 규칙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전문가의 판단이 필요하다. 하지만 인공 지능 시스템은 기계를 조작하는 사람이 수정을 가하면 그 환경에서 배운 것을 통해 스스로를 개선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진단 시약의 퍼지 시스템은 환자의 모든 징후를 관찰한 뒤 각각의 증상이 보여주는 정도에 따라 병의 가능성을 진단한다. 그리고 향후 더 나은 진단을 내리기 위해 확진 결과를 시스템에 새롭게 추가한다.
집합론은 20세기와 21세기에 수학을 새롭게 정의했으며 어떤 면에서는 수학을 현실 세계와 분리시키기도 했다. 고차원의 집합론은 현실의 대상이나 수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개념과 개념들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하지만 현실 세계의 부정확성과 만일의 사태를 다룰 수 있는 집합론은 현실 세계가 ‘고르지 않음’을 받아들여 기존의 수학보다 현실을 반영한 좀 더 정확한 모형을 제공한다.
센다이 지하철
1988년 일본 히타치에서는 센다이에 있는 지하철을 운행하기 위해 퍼지 논리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 지하철은 운전하는 사람이 따로 필요하지 않고 안내원만으로 운행될 수 있다. 퍼지 논리 시스템은 가속을 제어하고 안전, 편안함, 연료 효율과 목표한 위치(열차의 승강장)에 정확하게 멈추는 것들을 계산해 지하철을 운전한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집합론에서는 수와는 꽤 거리를 둔 상태에서 수학적인 활동이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상당 부분을 논리에 의존한다. 이렇게 본다면 애초에 수학의 핵심은 논리학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실제로 유클리드는 연속적인 논리 과정들을 통해 모든 기하학을 도출하려고 했다. 하지만 논리학은 19세기까지는 철저하게 적용되지 않았고 면밀하게 검토되지도 않았다. 집합론은 논리를 발전시켜 수학의 토대를 더 견고하게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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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점점 모호해지는 집합론 – 수학 오디세이, 앤 루니, 돋을새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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