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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리 명승기
내앞마을의 지킴이

백운정과 개호송숲

요약 테이블
문화재 지정 명승 제26호
소재지 경북 안동시

개호송은 내앞마을의 풍수형국을 완성하기 위해 수구막이로 조성된 마을숲이다. 마을의 문중에서는 개호송을 매우 소중히 여겨 씨족의 흥망을 이 숲의 성쇠와 동일시했다. 내앞마을의 문중에서는 1697년 마을 결의문인 〈완의문(完議文)〉를 만들었는데 여기에서 그들은 이렇게 다짐하고 있다.

이 소나무가 없으면 내앞마을도 없음이 분명하다. 내앞마을은 우리 종사(宗祀)가 있는 곳이다. 종족의 기반이 흥하고 피폐함은 이 소나무에 달렸으니, 조상을 존중하는 뜻이 크다면 어찌 이 소나무를 보호하는 것에 마음을 다하지 않겠는가.

내앞마을은 의성김씨 동족촌이다. 15세기 후반 김만근(金萬謹, 1446~1500)이 처음 이 마을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개호송 역시 김만근이 처음 심은 것으로 전해지며, 그의 후손 김극일(金克一, 1522~1585)이 영해부사로 있을 때 영해의 소나무에서 채취한 솔의 씨를 가져와 파종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내앞마을은 마을의 물길이 빠져나가는 수구(水口)가 너무 넓게 터져 있어 물길을 따라 마을의 기운이 흘러 나가는 형국인데, 이 숲은 수구를 막아 마을의 지기를 모이게 하는 장풍의 수단으로 조성된 비보(裨補)숲이다.

고문헌에 임수(林藪), 동수(洞藪), 읍수(邑藪) 등으로 나타나고 있는 마을숲은 마을의 부족한 지세를 보완하거나 나쁜 기운을 차단하기 위한 풍수적 장치로 대부분 조성된 인공숲이다. 수구를 가로질러 조성하여 풍수형국을 완성함으로써 마을을 아늑하고 안온한 모습으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개호송

임하댐 아래에 조성된 조정지댐에서 바라본 개호송의 모습으로 옆에 자리한 내앞마을이 보인다.

ⓒ 김영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개호송은 마을 앞의 동쪽으로부터 서쪽의 안동시 방향으로 흘러가는 반변천에 조성된 숲이다. 500여 년 전 내앞마을과 함께 만들어졌으나 1605년 대홍수로 대부분의 수목이 유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그 후 1617년에 김용(金淪, 1557~1620)은 선조들의 유지를 받들어 마을 사람들과 함께 1,000여 그루의 소나무를 식재하여 마을숲을 다시 조성했다. 그는 문중회의를 통해 이 숲을 보호하기 위한 결의문을 작성하는데 이것이 바로 〈개호종송금호의서(開湖種松禁護議序)〉이다. 문중의 완전한 합의를 의미하는 이 결의문에는 마음을 다해 솔숲을 보호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개호에는 선대로부터 조성된 소나무 숲이 있었으나 들불이 일어나고 냇물이 넘쳐서 황폐해진 지 벌써 10여 년이 지났다.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자손으로서 어느 곳에 조상을 공경하는 마음을 붙일까 오직 죄송스러울 뿐이다.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1,000여 그루를 심었으니 선인들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우리가 소나무를 보호하지 못한 죄를 속죄하는데 이르렀다. (중략) 오늘 소나무를 심었지만 이후 불이 나서 타지 않을까, 소나 양이 짓밟을까 두렵다.

이 글은 마을숲이 내앞마을에서 얼마나 소중하고 귀중한 의미가 있는지를 실감하게 해준다. 이외에도 1737년 작성된 〈동중추완의(洞中追完議)〉에는 문중 사람의 옥바라지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숲에서 마른 나무 25그루를 베게 된 것을 크게 반성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와 같은 의성김씨 문중에 전해온 여러 완의문(完議文)에는 후손들이 개호송숲을 잘 지키도록 엄격한 준수의무를 강요하고 있다. 이로써 개호송숲은 오랫동안 마을의 지속적인 보호 아래 유지되어 왔으며 특별한 관심 속에서 점점 더 소중해져 나중에는 마을의 터전과 조상의 사당을 지키는 상징적인 대상으로 여겨지게 된다. 따라서 문중 사람들에게 이 숲은 씨족의 존숭 대상으로까지 승화된 소중한 마을숲이다.

개호송숲은 반변천을 따라 길게 조성되어 있는 장고(長皐)숲과 개호송(開湖松)으로 이루어져 있다. 장고숲은 반변천의 좌안에 퇴적된 모래톱을 따라 길게 선형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에서 보면 반변천 방향으로 터져 있는 수구를 가로막은 띠 나무, 즉 수대(樹帶)인 것이다. 장고숲이 끝나는 지점의 강물에는 마치 섬과도 같은 모습으로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개호송이다. 반변천에 임하댐이 조성되면서 임하댐의 조정지댐이 개호송의 바로 아래에 위치하여 개호송은 호수에 떠 있는 섬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마을숲은 대부분 마을의 입구에 위치하여 마을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개호송숲도 내앞마을의 안팎을 가르는 장치로 이곳을 지나야만 마을의 문을 통과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마을숲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을을 외부와 명확히 구별되는 내부로 인식하는 것이다.

개호송숲 안에 안온하게 자리하고 있는 내앞마을은 영남의 4대 길지 중 하나다. 《택리지》에는 조선 땅에서 가장 이상적인 마을의 입지로 도산, 하회, 닭실, 내앞을 4대 길지로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조선의 명당으로 이름난 내앞마을에서는 많은 인물이 배출되어 영남의 명문거족을 이루게 된다. 특히 입향조 김만근의 손자이며 청계공파의 중시조로 받들어지고 있는 김진(金璡, 1500~1581)은 그의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합격하고 학행이 뛰어난 선비로서의 일가를 이루어 명문의 기반을 튼튼히 다지는 역할을 한다. “차라리 부서지는 옥이 될지언정 구차하게 기왓장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寧須玉碎 不宜瓦全)”라며 서릿발같이 자식을 훈도했던 김진의 가르침과 함께 그의 후손들은 임금에 직언하는 강직한 성품으로 수없이 금부도사를 부르며 명문을 형성했다.

의성김씨 종택

의성김씨가 동족마을을 이루고 있는 내앞마을의 종택이다.

ⓒ 김영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장고숲이 자리한 반변천 건너 산 중턱에는 백운정(白雲亭)이 내앞마을을 바라보고 서 있다. 청계 김진의 둘째 아들 김수일(金守一)이 1568년(선조 1)에 세운 정자다. 백운정은 반변천 언덕에서 내앞마을과 개호송숲이 한 폭의 경관으로 부감되는 지점에 위치하여 탁월한 조망점을 형성하고 있다. 조선시대 많은 유림들이 드나들었던 이곳에는 미수 허목이 쓴 백운정 현판이 걸려 있다.

백운정 편액

미수 허목이 썼다는 백운정의 현판이다.

ⓒ 김영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내앞마을에는 개호송숲의 보존을 위한 문중의 기록이 이렇듯 다수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마을숲은 공원과도 같아서 대부분의 마을에 조성되었지만 개호송과 같이 보호를 위한 기록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은 극히 드물다. 강릉에는 율곡 이이가 그의 제자에게 강릉 지방 송림의 소중함과 보호를 특별히 강조하며 지어준 〈호송설(護松說)〉이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우리 선인들은 마을의 번영을 위해 마을숲을 가꾸고 보존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내앞마을의 전통문화를 나타내는 문화 경관으로서의 가치를 지닌 개호송숲은 근래에 임하댐의 조성과 함께 물속에 갇혀 건강이 나빠졌고 장고숲 또한 수종과 형태가 변화된 상황이다. 다른 수종이 침입하고 있는 개호송숲은 장기적으로 볼 때 내앞마을의 문중에 전해오는 기록의 내용처럼 소나무 위주의 숲이 되도록 가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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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범 집필자 소개

서울시립대학교 원예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조경학석사,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표 저서로는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우리 명승기행: 역사문화 명승 편》, ..펼쳐보기

출처

우리 명승기행
우리 명승기행 | 저자김학범 | cp명김영사 도서 소개

소소하지만 소중한 우리 유산의 중요성과 의미를 다시 한 번 일깨운다. 특징에 따라 명승 49곳을 고정원, 누원과 대, 팔경구곡과 옛길, 역사·문화 명소, 전통산업·문화..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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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백운정과 개호송숲우리 명승기행, 김학범,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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