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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올곧은 선비의 향기가 묻어나는
채미정
문화재 지정 | 명승 제5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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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북 구미시 |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 길재, 〈회고가(懷古歌)〉
오백년을 이어온 고려왕조가 국운이 다해 결국 멸망했다. 많은 인사들이 새롭게 열린 나라 조선의 공신이 되어 개국의 깃발 아래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러나 새로운 나라의 창업에 동참하지 않고 이미 무너져버린 고려왕조에 끝까지 충절을 지킨 사람들이 있었다. 세상에 다시 나오지 않을 각오로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간 사람을 비롯하여 두 나라,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들이다. 멸망한 고려에 충절을 지킨 충신으로 잘 알려진 삼은(三隱)도 이들에 속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길재(吉再)는 바로 그 삼은 중 한 사람이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의 학자로 그는 야은(冶隱), 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이라는 호를 즐겨 사용했다. 조선 개국 후 2대 정종 임금 시절, 당시 왕세제였던 이방원이 그를 불러 태상박사에 임명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글을 올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을 펴니, 이방원은 그 절의를 갸륵하게 여기고 예를 다해 대접하여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 후 길재는 고향인 금오산 아래에 머물렀다.
경부고속도로 구미인터체인지를 통과한 후 좌측 방향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금오산(976m)에 다다른다. 기암괴석과 울창한 수림이 절경을 이루고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깊은 명산이다. 경상북도 도립공원으로도 지정되어 있는 금오산의 계곡에는 채미정(採薇亭)이 고고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길재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정자로 이 길목에 〈회고가〉를 새긴 시비가 서 있다. 채미정은 1768년(영조 44)에 창건되었으나, 1977년 구미시에서 건물을 보수하고 경역을 정화하는 사업을 크게 시행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채미정은 벽체가 없고 16개의 기둥만 있는 정자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한식 건물로 한가운데 1칸을 방으로 만들고 ‘ㅁ’ 자로 우물마루를 두른 건물이다. 정자의 정중앙에 자리한 방은 온돌로 되어 있어 추운 계절에도 사용할 수 있다. 방문은 들문의 형식으로 사방에 2짝씩 달려 있는데 모든 문을 들어 올리면 방이 없는 무실형 정자의 모습으로 변한다. 채미정의 경역은 정문인 흥기문(興起門)을 시작으로 석축 상단에 가로로 쌓은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다. 이곳에 숙종의 어필 오언시(五言詩)가 걸려 있는 경모각(敬慕閣)과 구인재(求仁齋), 비각 등의 건물이 위치하고 있다. 채미정으로 가려면 깊은 계곡 위에 놓인 다리를 지나야 한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계류와 울창한 수목들은 채미정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특히 채미정에서 바라보는 금오산의 풍광은 명승으로서의 경관미를 한층 돋보이게 한다.
채미정이 위치한 금오산은 경관이 빼어나고 힘과 기상이 넘치는 바위산이다. 불교를 신라에 처음 전파한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이곳을 지나다가 저녁노을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것을 보고 금오산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채미’는 고사리를 캔다는 뜻으로 중국 주나라의 전설적인 형제 성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에 관한 고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백이와 숙제는 본래 은나라 고죽국(孤竹國)의 왕자들이었다. 선왕이 죽은 뒤 두 사람 모두 후계자가 되기를 사양하고는 고죽국을 떠나버려, 결국 왕위는 가운데 아들이 물려받았다고 한다. 그 무렵에 주나라의 무왕(武王)이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토멸하였다. 백이와 숙제는 무왕의 정벌이 신하가 천자를 배신한 인의(仁義)에 위배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나라에서 나는 곡식을 거부하고 수양산으로 들어가 몸을 숨기고 고사리로 연명하다가 굶어 죽었다고 한다.
유림들은 백이와 숙제를 절의의 상징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사기(史記)》의 〈백이숙제열전편〉에는 이렇게 〈채미가(采薇歌)〉가 전해지고 있다.
저 서산에 올라
登彼西山兮
산중의 고사리나 꺾자
采其薇矣
포악함을 포악함으로 바꾸면서도
以暴易暴兮
그 잘못을 모르는구나
不知其非矣
신농과 우하의 시대는 가고
神農虞夏 忽焉沒兮
우리는 장차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我安適歸矣
아, 이제 떠나야 하리
于嗟徂兮
천명이 모두 쇠하였구나
命之衰矣
인의를 저버린 군주, 새로운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을 고집한 백이와 숙제는 야은 길재가 사표(師表)로 삼고자 한 인물이다. 신하가 주군을 멸하고 세운 조선에서 길재는 백이와 숙제가 간 길을 택하고자 했다. 이처럼 은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켰던 백이와 숙제의 고사에서 비롯된 명칭인 ‘채미정’은 길재의 충절을 상징한다.
길재는 1353년 구미에서 태어나 당시 관료로 있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개경으로 가서 이색, 정몽주, 권근 등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1374년 생원시, 1383년 사마감시, 1386년 진사시에 합격한 후 성균박사를 지냈다. 고려의 쇠망을 짐작한 후 늙은 어머니의 봉양을 구실로 사직하여 낙향했다.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으며 세속의 현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 연구에 매진했기 때문에 그를 본받고 가르침을 얻으려는 학자가 줄을 이었다고 한다.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등이 그의 학맥을 이은 유림이다. 1419년(세종 1) 67세를 일기로 생을 마친 길재는 금산의 성곡서원, 선산의 금오서원, 인동의 오산서원에 향사되었다.
왕권이 교체되는 난세에도 고려에 절의를 지키고 학문에만 정진한 야은 길재는 사후, 오히려 조선에서 충절(忠節)이라는 시호를 받으면서 충신이 되었다. 또한 후학들에 의해 학통을 잇게 하는 중심인물로 위상을 지니게 된다. 채미정은 충절을 지키며 오직 학문에 정진한 야은의 올곧은 선비로서의 향기가 묻어나는 명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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