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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리 명승기
악성 우륵의 자리

탄금대

명승 제42호, 彈琴臺
요약 테이블
문화재 지정 명승 제42호
소재지 충북 충주시

신라 진흥왕 때인 552년 악성(樂聖)으로 불린 우륵(于勒)은 가야국의 멸망을 예견하고 신라에 귀화했다. 진흥왕은 우륵을 반기며 국원(충주)에 거주하게 했다. 그리고 신라의 청년인 법지, 계곡, 만덕을 선발해 악(樂)을 배우게 하고 우륵을 보좌하도록 했다. 이런 연유로 우륵은 만년에 멸망한 가야국을 떠나 충주에 우거했다.

남한강과 달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한 나지막한 산은 풍광이 매우 아름답다. 우륵은 이곳의 풍치를 탐미하여 산 정상에 있는 너럭바위에 앉아 가야금을 탔다. 이곳이 바로 우륵이 금(琴)을 탄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탄금대(彈琴臺)’다. 우륵이 연주하는 가야금의 미묘한 소리는 사람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했고 곧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탄금대 주변에는 지금도 가야금과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다. 칠곡리(칠금동), 금뇌리(금능리), 청금리(청금정) 등의 마을 명칭은 모두 가야금과 관련된 것이다.

탄금대는 충주시 근처에 있는 대문산(108m)의 정상을 지칭한다. 산 아래로 남한강이 흐르는데 강변에 기암절벽이 형성되어 있고 울창한 숲으로 덮여 있어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절벽을 따라 강물이 휘감아도는 탄금대는 남한강과 너른 들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강줄기의 모습은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벼랑에 위치한 열두대에서 가장 잘 보인다. 정상부에는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탄금정이 있고, 동쪽으로는 계명산과 남산이 솟아 있으며 아래로는 충주 시가지와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다.

ⓒ 김영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열두대

열두대 주변의 모습이다. 충주 탄금대는 상당 부분이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이곳이 명승적 가치를 갖는 중점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충주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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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금대는 옛날부터 유명한 지명으로 지리지와 고지도 등 각종 문헌에 자주 등장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탄금대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탄금대는 견문산에 있다. 푸른 절벽은 낭떠러지로 높이가 20여 길이요, 절벽 위에는 소나무와 참나무가 울창하여 양진명소(楊津溟所)를 굽어 임하고 있는데 우륵이 거문고를 타던 곳이다. 후세 사람이 이곳을 탄금대라 이름하였다.” 또한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에는 “충주 서쪽으로 8리에 위치하며, 강 아래에 큰 내가 있는데 금휴포(琴休浦)라 한다”라고 하여 가야금을 타며 쉬던 곳이란 의미로 쓰였다. 이밖에도 《해동지도(海東地圖)》, 《구한말지형도》, 《조선지형도》 등 다수의 고지도에 탄금대 지명이 나타난다.

우륵은 가야국 가실왕(嘉悉王) 때의 사람으로 490년경 대가야의 직할 현인 성열현에서 태어났다. 우륵의 고향인 성열현은 현재 어느 곳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정치적 · 문화적으로 발달된 지역이었던 곳으로 보인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가야금은 가야국의 가실왕이 중국의 쟁(箏)을 본받아 만들었고, 우륵이 12곡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가야금은 중국의 악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그것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가야국의 혼이 담긴 새로운 악기로 만든 것이다.

가야금은 우리의 고유한 악기다. 본래 대가야연맹을 상징하며 가야인의 천문의식을 담고 있다. 가야금은 위가 둥글고 아래가 평평한데 이것은 천원지방의 천문관을 나타내며, 12개의 줄은 1년 12달을 상징한다. 가야금은 가야국이 예악(禮樂)을 중시한 문화국가임을 증명하는 것으로 악으로서 백성을 통치하고자 했던 가야의 높은 문화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가야에서 만들어진 가야금은 고국을 떠나 충주에서 탄금대라는 장소와 결합하여 장소적 의미를 취하게 된다. 가야국보다는 오히려 충주가 가야금의 고을이 된 것이다.

탄금대는 임진왜란의 참혹한 역사를 보여주는 의미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당시 도순변사였던 신립(申砬)은 8,000여 명의 군사와 함께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에 맞서 탄금대에서 격전을 치렀다. 그는 배수진을 치고 물밀듯이 밀려오는 왜군에 대항해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결국 패하고 말았다. 신립은 이곳 탄금대에서 남한강에 투신하여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다.

신립 장군의 영정

조선시대 무신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도총부도사와 진주판관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당시 충주 탄금대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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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금대 북쪽 절벽에는 열두대가 위치하고 있다. 열두대의 지명에 관한 유래는 확실하지 않다. 바위의 층계가 12개이기 때문에 열두대라 하기도 하고, 절벽 아래 물이 12번 돌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교전 중 달구어진 화살을 식히느라 12번을 오르내렸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열두대 아래는 깊은 소가 있는데 이를 양진명소라 한다. 이곳에 뱃길을 관장하는 수신(水神)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나 선주, 선박 상인들은 양진명소에서 안전과 번영을 빌었다고 한다.

탄금대에는 전쟁과 관련된 또 다른 유적이 있다. 정상 주위에 남아 있는 오래된 토성이 바로 그것이다. 이 토성은 4세기 중후반에 탄금대를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던 철을 생산하는 세력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백제와 관련된 유물만이 출토되어 고구려나 신라가 이 지역으로 진출하기 전에 백제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탄금대는 충주의 시내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명소로서 이미 오래전부터 일반인들의 탐방은 물론 도시공원으로도 이용되어 왔다. 그래서 탄금대에는 공원 시설이 다양하게 조성되어 있다. 또한 전쟁의 역사성과 관련된 궁도장을 비롯해 우륵의 가야금과 관련된 공원 시설, 충혼탑, 야외음악당, 특히 공원의 효과적인 활용을 위한 공원도로도 많이 개설되어 있다. 오랫동안 도시공원으로 이용되었던 탄금대는 뒤늦게 국가지정 명승으로 그 장소적 가치가 인정되었다. 명승으로서의 가치를 높이고 시민들의 공원으로서도 잘 활용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야 할 것이다.

충주시의 명소인 탄금대는 나라를 잃고 정복국의 신민이 되어 변방으로 올 수밖에 없었던 악성 우륵의 가야금 소리가 한의 울림으로 퍼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또한 문경새재를 넘어온 왜군에 맞서 배수진을 치고 최후의 결전을 벌였던 장수 신립의 함성이 메아리쳐 우렁차게 들려오는 듯하다. 지난날 커다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자리했던 명승 탄금대는 국가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역사적인 경승지다.

신립 장군 순절비각

배수진을 치고 최후까지 전투에 임했던 신립의 전공을 기리는 비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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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범 집필자 소개

서울시립대학교 원예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조경학석사,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표 저서로는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우리 명승기행: 역사문화 명승 편》, ..펼쳐보기

출처

우리 명승기행
우리 명승기행 | 저자김학범 | cp명김영사 도서 소개

소소하지만 소중한 우리 유산의 중요성과 의미를 다시 한 번 일깨운다. 특징에 따라 명승 49곳을 고정원, 누원과 대, 팔경구곡과 옛길, 역사·문화 명소, 전통산업·문화..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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