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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농경이 문화 경관이 되다
가천마을 다랑이논
문화재 지정 | 명승 제1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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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남 남해군 |
지중해풍의 해안이 있다. 한반도 남쪽, 남해군 홍현리의 해안은 지중해의 어느 바닷가 같은 느낌을 준다. 산마루에서 바다로 향하는 지형은 급경사를 이루어 바닷물 속으로 급히 흘러가고, 바위에 부딪혀 하얀 포말을 만들어내는 파도는 검푸른 바다로 이어져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다. 아름다운 바닷가의 풍경이다.
홍현리 바닷가에 위치한 자연부락인 가천마을에는 바닷가로 깎아지른 급경사지에 다랑이논이 자리하고 있다. 다랑이논은 바닷가의 험한 지형에서 오랫동안 이어진 척박한 삶이 빚어놓은 풍광이다. 다랑이란 손바닥만 한 작은 논을 의미한다. 삿갓을 씌우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논배미가 작아 ‘삿갓배미’로 불리기도 한다. 다랑이논은 경사가 심한 비탈에 석축을 쌓아 폭이 좁고 길게 만든 논배미로 이루어진다. 어느 것은 농작물을 심는 논의 폭보다 석축의 높이가 더 큰 경우도 있다.
가천마을의 다랑이논은 무려 100층도 더 된다. 설흘산과 응봉산의 산줄기가 흘러내린 계곡을 따라 산중턱에서 바닷가까지 산비탈에 조성되어 있다. 등고선 방향으로 층층이 형성된 다랑이논의 석축은 매우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태양의 각도에 따라 그림자가 달라지는 모습은 신비롭기 그지없다. 철따라 고운 옷으로 갈아입고 구름이 끼거나 눈과 비가 올 때면 시시때때로 제각기 다른 풍광을 만든다. 또한 논에 심겨진 농작물에 따라 연초록에서 황금색에 이르기까지 계절마다 다양한 색깔의 긴 띠를 층층이 형성한다. 그 사이사이에는 석축이 길게 무채색의 가로선을 그어 마치 공책의 줄과도 같은 정연한 경관을 연출한다. 더욱이 다랑이논 한가운데 자리한 마을과 그 앞으로 펼쳐진 짙푸른 바다는 함께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만들고 있다. 이렇게 빼어난 풍광이 바로 가천마을의 모습이다.
다랑이논은 산간오지에 살던 선조들이 급경사지에서 벼농사를 짓기 위해 산비탈을 깎아 만든 농경지다. 전통적인 삶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낸 농경문화 경관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을 비롯해 일본, 중국, 필리핀 등 여러 나라에 다랑이논이 조성되어 있지만 이들 대부분이 내륙 산간 지역에 위치한 데 반해 가천마을 다랑이논은 바다에 면하고 있다.
가천마을 다랑이논의 논두렁은 돌을 촘촘히 쌓아 축조했다. 여기에 사용된 돌은 마을 뒷산에서 채취한 것이다. 지금도 배후의 산비탈 급경사면에는 수많은 암석이 풍화되어 퇴적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경사가 심한 이곳에 한 뼘이라도 논을 더 넓히기 위해 석축을 가능한 수직으로 쌓았다. 석축은 무논(물이 괴어 있는 논)을 만들기 위해 윗부분이 수평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매우 아름답고 독특한 농업 경관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다랑이논은 농업을 바탕으로 하는 전통 경관이다. 그래서 농경이 지속되어야만 경관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벼와 마늘을 번갈아 가며 1년에 이모작으로 재배하고 있다. 현재 마을을 중심으로 기계화가 가능한 곳은 경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비탈이 심한 지역이나 경작 여건이 어려운 논배미는 이미 휴경지로 변한 곳이 많은 상황이다. 이러한 휴경지는 세월이 지나면서 석축이 무너져 황폐해지고 그 아름다움 역시 저절로 훼손된다.
남해 가천마을이 형성된 것은 아주 오래전이다. 마을의 유래에 대한 자세한 자료는 없으나 대대로 이 마을에서 살아온 김해김씨, 함안조씨에 의해 신라 신문왕 때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마을에 전해지는 미륵과 육조문에 대한 전설을 통해 보면 고려시대 이전에 이미 마을을 이루었고, 임진왜란 때 사용되었다는 설흘산 봉수대는 이미 그 이전 가천마을에 주민이 집단적으로 거주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본래 마을의 옛 이름은 간천(間川)이었다. 아마도 능선 사이를 흐르는 개울이 있어 그렇게 불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조선 중엽에 이르러 마을 이름이 가천(加川)으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가천마을에는 농경과 관련된 문화자원이 많다. 농경사회는 기본적으로 다산(多産)과 풍요를 가장 중요시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성과 관련된 성신앙이 매우 노골적으로 표현된다. 가천마을에는 이러한 성신앙을 의미하는 암수바위가 있다. 경상남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된 ‘남해 가천 암수바위’는 마을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암수의 바위 한 쌍이 약간 떨어져 서 있다. 암바위는 여인이 잉태하여 만삭이 된 모습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고, 숫바위는 남성의 성기 모양으로 우뚝하게 솟아 있다. 암수바위는 ‘미륵불’이라 하여 각각 암미륵, 숫미륵이라 부르기도 한다. 과거 아무도 모르게 숫미륵 밑에서 기도를 드리면 득남한다는 전설이 있어 이 고장의 여인들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에서도 많이 다녀갔다고 한다. 이곳은 조선 영조 때 남해현령으로 부임했던 조광진에 의해서 처음 발견되었다. 그의 꿈에 노인이 나타나 계시를 주었다고 한다.
가천마을에서는 매년 풍년과 풍어, 마을의 평안을 비는 동제(洞祭)를 지내고 있다. 정갈한 사람을 제주로 뽑아 제사를 모신다. 제사의식은 먼저 마을 뒷산에서 채취한 깨끗한 황토를 밥무덤에 있는 기존의 황토와 교체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다랑이논에서 수확한 햇곡식과 과일, 바다에서 잡은 생선으로 정성스럽게 상을 차려 제사를 지낸다. 제사 후 제삿밥은 밥무덤에 묻어둔다. 밥무덤은 마을의 중앙, 동쪽, 서쪽 세 곳에 있다. 돌탑으로 만들어진 밥무덤은 3단으로 되어 있다. 가장 윗단에 삼면으로 돌벽을 세우고 바닥에는 황토를 깔고 그 위에 둥근 돌을 얹어 물건을 보관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제사가 끝난 후에는 농악을 울리고 횃불놀이를 하는 것으로 축제가 이어진다.
가천마을 뒷산인 설흘산 정상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다. 경상남도기념물로 지정된 봉수대는 높이 6m, 너비 7m의 규모이며 사각형의 모양으로 축조되었다. 왜구의 침입과 재난을 알리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남해현읍지》에 의하면 이 봉수대에서 남해 금산, 전남 돌산의 봉수대와 서로 연락했다고 한다.
가천마을은 다양한 문화자원을 가진 아름다운 해안마을이다. 우리나라 어느 곳에도 다랑이논이 이토록 푸른 바다와 접해 비경을 연출하는 곳은 없다. 가천마을 다랑이논은 명승으로 지정되기 전까지 묵논이 되어 휴경지로 황폐해지고 있었다. 농촌의 물리적 구조는 문화를 유지하게 하는 행위가 지속되지 않으면 곧바로 파괴될 수밖에 없다. 다랑이논이 명승으로 지정되고 마을을 찾는 관광객이 많아지면서 근래에 가천마을은 활기를 되찾고 있다. 이제 마을에서 다랑이논을 바탕으로 마을주민이 주체가 되어 활용을 위한 다양한 노력이 시작되고 있다. 앞으로 더욱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마을의 번영에도 중요하지만, 활용을 중요시하는 문화재인 명승의 지정목적에도 부합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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